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소방관의 위상은 아직까지는 3D 직업 중 하나일 뿐 입니다. 남이 하면 존경할 수 있겠지만 내 자식이 하겠다면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 말리는 실정이죠.
그만큼 소방관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위험의 최전방에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화재를 진압하는 것 자체도 위험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탁월한 체력과 우수한 두뇌, 거기에 빠른 의사 결정을 위한 순발력과 위기 대응 능력이 필요하죠.
이 책은 현직 소방관이자 의사 결정 과정을 전문으로 연구한 심리학 박사인 사브리나 코헨-해턴이 썼습니다. 노숙 생활을 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소방관, 그것도 영국에서 여성으로서는 가장 높은 직급의 소방관이 되어 20년의 현장 경험을 쌓았고 급박한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이 잘못 내린 선택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걸 목격하면서 이러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심리학을 전공하여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전문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영국은 유럽에서도 여전히 테러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라라서 저자가 출동한 현장 묘사도 화재를 진화하는 것보다는 테러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를 줄이고 생존자를 구출하는 119 구조대의 활동에 더 가깝습니다. 추가 테러의 위협이 있고 이를 고려하면서 화재 진압도 해야 하고 생존자 수색을 하면서 동시에 부하 소방관들의 신변 안전도 신경 써야 하니 현장 지휘관이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현명한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한 노하우의 습득이 결정적일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런 고 스트레스 상황에서 어떻게 현명한 의사 결정을 할 것인지, 최근 연구 경향은 어떠하며 오랫동안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소방관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이 책의 소개에서도, 수많은 언론과 추천사에서도 '저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위기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알려준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책을 아무리 읽어도 대체 그 놈의 방법이 나오지 않더군요. 그저 나오는 건 저자가 출동했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박감 넘치는 현장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소방관들의 헌신과 희생정신 뿐입니다. 그건 이 책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봐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감동이잖아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영국 전역의 소방 구조 시스템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자화자찬은 차고 넘치지만(지겨울 정도로 반복됩니다) 그게 어떤 방법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의사 결정 전문가인 심리학자라면서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심리학 연구 결과들에 대한 인용도 거의 없어요.
제가 이 책에서 그나마 건진 건 긴박한 사건 현장에서는 많은 현장 지휘관이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빈도로 '직관적 의사 결정'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왜 대단한 발견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용한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자원이 부족할 경우에는 인간은 당연히 직관적(때로는 무의식 수준에서) 의사 결정과 행동을 하기 마련이니까요. 반복 숙달 과정을 통해 몸에 밴 형태로 말이죠.
제가 원래 기대를 잘 안하는 편이지만 YES24에서 최근에 밀고 있는 책이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요란하게 소개를 하고, 광고도 거창하게 하는 바람에 혹했나 봅니다. 역시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네요.
심리학 분야 뿐 아니라 제가 올해 읽은 책을 통틀어 가장 돈이 아까웠던 책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추천하기 어려운 책이네요. e-book으로 봐서 북 크로싱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위안이 될 정도입니다(국민도서관으로 배송할 배송비를 아낄 수 있으니).
배운 내용이 없으니 '월덴지기가 흥미롭게 읽은 구절들'도 당연히 없습니다.
덧. e-book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은 북 크로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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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자가 어떤 말을 하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도박 중독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고, 그만하라고 가족들이 말릴 때 귀담아 듣지 않은 것도 자신의 잘못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도박을 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테니 제발 도박만 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읍소합니다.
얼핏 보면 자신의 도박 문제를 인정하고 치유가 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가 갈등 하나 없이 변화 단계 중 준비 단계나 실행 단계에서 곧바로 출발하는 도박자는 매우 드물거든요.
오히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면 납작 엎드려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유형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자기 고백에는 잘못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상담자에게 의존하고 자신은 편하게 묻어가려고만 하죠. 의존 대상이 가족에서 상담자로 바뀐 것 뿐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도박자는 제 시간에 상담에 오고, 상담도 열심히 하지만 재발이 잦으며 재발을 하고 나서는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동시에 다시 열심히 노력할테니 도와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도박 문제에 대한 진지한 수용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도박 결과를 깊이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발이 반복되고 끝내는 지쳐버린 가족이 포기하는 걸로 상담이 끝나고 맙니다.
이런 도박자일수록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치유 초반부터 한계 설정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의사 결정부터 자신이 직접 내리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극도의 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담을 아무리 오래 해도 치유의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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