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된 주제 중 하나로 sociotropy-autonom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두 개념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 sociotropy : 대인 관계가 중요한 성격 특질
* autonomy : 독립성이 중요한 성격 특질
그 유명한 Aaron T. Beck이 이 congnitive-personality contructs를 측정하기 위해 Sociotropy-Autonomy Scale(SAS)을 만들기도 했지요. 물론 우울 장애에 대한 risk factor로써 살펴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 효능감이 높고, 목적 의식이 강하며,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경향도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향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 이들을 독단적이거나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향 때문에 이기적이라는 오해를 왕왕 받기도 합니다만 자율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며 그 과정을 자신이 통제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획득하게 될 확률이 큰 것이죠.
이기적인 사람 중에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는 있지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질-성격 검사인 TCI를 빌어 설명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이냐의 여부는 자율성 차원보다 연대감 차원이 더 많이 좌우합니다.
자율성 차원이 high 수준일 때 연대감 차원이 high라면, 자기 초월 차원의 정도와 상관없이 HHH(창의적인), HHM(성숙한), HHL(조직화된) 성격 경향을 보입니다. 모두 이기심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 유형이죠. 하지만
연대감 차원이 low라면 HLH(광적인), HLM(괴롭히는), HLL(독재적인) 성격 경향을 나타냅니다. 세 성격 유형 모두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만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TCI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반영하는 성격 차원은 자율성이 아니라 연대감입니다.
사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통제받는 걸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가 명령받는 걸 워낙 싫어하니 자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지도 잘 이해하거든요. 그래서 아랫사람이 알아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거기에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까지 낮은 사람이라면 나만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마음까지 강하겠지요(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율성이 강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기적이라는 사회의 편견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TCI의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이 극도로 높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글마저도 신경 안 쓰시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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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으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유고작인 '정신의 삶'을 보통 드는데 인간의 조건은 앞뒤의 두 저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철학 세계를 구축하는데 있어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하이데거 밑에서 수학했고(잠시 사귀기도 했죠;;;) 야스퍼스의 지도 하에 박사 논문을 썼을 정도로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과 두루두루 교류했던 사람입니다. 여성 철학자로 워낙 유명세를 타다 보니 로자 룩셈부르크에 자주 비견되곤 했죠. 혹자는 시몬 베이유, 에디트 슈타인을 함께 묶어서 4대 유태인 여류 철학자로 꼽기도 합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다루지 않고 남겨 놓았던 사유, 의지, 판단의 정신적 활동을 저술하던 1975년 12월 4일 심장마비로 안타깝게 사망하고 맙니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 작업, 행위를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구성하는 세 가지 근본 활동으로 봤는데 그녀는 이 책에서 각각의 요소인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일별하여 인간의 조건을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석이 많은 책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주석이 많다는 건 본문에서 설명한 것 만으로 독자를 이해시킬 수 없다는 의미라고 보거든요. 이건 단순히 글을 쉽게 쓰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그만큼 함축적인 글쓰기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죠.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역시 제 선입견에 여지없이 들어맞는 책입니다. 주석도 많고 어려워요. ㅠ.ㅠ
상당히 천천히 곰씹어 가면서 읽었는데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제 지식의 부족을 절감하면서 동시에 '전체주의의 기원'부터 읽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하는 독서였습니다. 원문을 비교하며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의 질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번역된 책을 아는 분이 있으면 제보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저처럼 한나 아렌트 정도의 철학자가 쓴 저작은 읽어줘야 교양인이지 하는 나이브한 태도로 도전해서는 좀처럼 오르기 어려운 거봉이니 충분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덧1. 책의 난도와 별개로 한길사도 디자인에 신경을 조금만 더 썼으면 좋겠습니다. 하드 커버 양장까지는 참겠는데 디자인이 정말 책을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구립니다.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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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까지 도박과 도박 중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가족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대처 방법은 사실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헤어지는 것과 참고 사는 것.
주변 사람들도 가족들만큼이나 도박 중독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 상황인데 가족들 입장에서 헤어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차라리 속는 셈 치고 빚을 갚아주거나 도박자의 말을 믿어보는 것이 오히려 해 볼만한 도박일 겁니다.
특히 시댁, 친정 따질 것 없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어른들이 종용하는 경우 많은 배우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박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이 상황을 수용(accept)하는 것과 자신을 희생(sacrifice)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수용한다는 건 도박 중독의 문제가 도박자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일차적인 책임도 도박자에게 있다는 것,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치유의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면서 도박자 역시 그 원칙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희생은 수용과 달리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도박 중독이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그저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 이 창피한 일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박자가 직장에서 잘리는 일이 없도록, 필요하다면 도박자의 공범이 되거나, 변명과 거짓말을 하거나, 빚을 대신 갚는 것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뒤집어 쓸 수 있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죠. 당연히 그 결과로 희생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인 도박 중독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합니다.
수용은 희생이 아닙니다. 수용은 치유의 원칙을 지켜 도박 중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희생은 그저 자신을 던져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수용 없는 희생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오게 됩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잊으세요. 도박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아닌 수용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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