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장애의 진단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상담 장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게 대인 관계 기능(interpersonal functioning)의 문제이고 내담자 스스로도 이 영역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경험(또는 보고)합니다. 물론 군(cluster)에 따라 양상의 차이는 다소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포스팅의 주제는 군(cluster)의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성격 장애의 대인 관계 문제가 동성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동년배의 동성 관계에서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A군 대표로 분열성 성격 장애를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A군 기질의 소유자는 대인 관계에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분열성 기질은 더더욱 대인 관계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A군 기질이 원하는 건 사람들의 무관심입니다. A군 기질은 전반적으로 대인 관계에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공유하는 사람과는 피상적일지언정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열성 성격 장애 남성은 극도로 내향적이고 자신만의 자폐적 공상 세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남성들에게 어필하기 어렵습니다. 좋게 봐도 괴짜이고 나쁘게 보면 히키코모리 같기 때문에 같이 놀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관심 분야에 따라 어필할 수 있는데 분열성 성격 장애들은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 그 분야가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거나 흔히 말하는 SNS에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분야(식물 기르기, 캘리그라피, 사진이나 그림 등)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거든요(물론 그 관계가 오프라인 관계의 친밀함으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열성 성격 장애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내향적이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지만 가부장제 사회인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에 남성에 비해 훨씬 더 강한 박해와 억압을 받기 때문에 분열성 성격 장애 남성에 비해 좀 더 외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회운동이나 스포츠 등 활동적인 분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이게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너무 세 보이거나 지나치게 체제 저항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거부감을 주기 쉽죠. 그래서 동성의 또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겁니다.
다음으로 B군 대표로 연극성 성격 장애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A군과 달리 B군은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데다 자극추구 기질도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대인 관계가 중요하고 특히 연극성 성격 장애는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극성 성격 장애 여성이 동년배의 여성에게 관심을 받는 건 쉽지 않습니다. 연극성 성격 장애 여성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관심을 받기 위한 시도 자체가 어설픕니다. 동년배의 성숙한 여성들에게 그런 시도는 가식처럼 보이거나 재수 없어 보이거나 하기 때문에 따돌림 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외모나 애교 등으로 관심을 받기 쉬운 동년배의 남성과 관계를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연극성 성격 장애 남성도 비슷합니다. 동년배의 성숙한 남성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남성성을 과시하거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런 성숙함이 없기 떄문에 아동처럼 미숙하게 보이고 그래서 여성과 관계를 맺는 걸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동년배 보다는 모성애를 자극할 수 있는 연상의 여성들에게 밀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C군 대표로 의존성 성격 장애를 살펴보겠습니다. C군은 위험회피기질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의존성 성격 장애는 동시에 사회적민감성 기질도 높기 때문에 사람에게 의존해서 위험을 회피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강한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의존성 성격 장애 여성은 같은 여성에게 의존하기 어렵습니다. 성숙한 동년배의 여성들은 give & take가 확실하고 대인 관계에서도 미성숙한 또래를 돌보는 걸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의존을 하고자 하지만 그 댓가로 지불할 것이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년배의 남성은 의존성 성격 장애 여성에게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성숙하고 유약해 보이는 여성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하죠. 반대로 의존성 성격 장애 남성도 위험을 피하기 위한 의존 대상이 필요하지만 동년배의 남성은 너무도 무섭습니다.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서열 의식이 있어 자신이 서열의 아래에 위치할 경우 자신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여성에게 끌리는 것이죠.
결국 모든 성격 장애 내담자가 겪는 대인 관계 문제는 동성의 또래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러니 이성의 또래 관계가 잘 유지되는 것 같아 보인다고 성격 장애가 아니겠지 하고 마음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바꿔 말하면 TCI에서 기질 취약성이 관찰되었을 때 동성의 또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성격 장애까지는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격 장애가 의심되면 동성의 또래 관계는 어떤지 관심을 갖고 탐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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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이성, 여성은 감성의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남자는 입장과 처지를 이해받는 게 중요하고, 여자는 마음을 알아주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생각이든, 마음이든 간에 어쨌거나 나를 알아주는 것,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원하죠.
이걸 상담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인 공감에 포함된 중요한 내용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공감이란 게 정작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현장에서 일하는 상담자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병상련도 아니고 단순한 측은지심도 아니면서 동정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죠.
사설이 길었는데 오늘은 상담 현장에서 사용하는 공감 말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공감(위에서 이야기 한 나를 알아주는 것과 유사한 의미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모든 대인 관계에서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 나를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부부 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쌍방 관계에서는 더더욱 중요하죠.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가사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당연히 남편은 그게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면서 위로하려고 애를 쓰죠. 하지만 아내는 당신은 머리로만 이해를 하지 내 감정을 마음으로 아는 것 같지 않다면서 쏘아 붙입니다.
위의 예에서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고통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할 뿐,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불평하지만 제가 볼 때 이 문제의 핵심은 이해냐 감정이냐가 아닙니다.
아내가 자신의 고통과 힘겨움을 남편이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남편의 이해가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공감은 행동을 기반으로 작동하거든요.
말로는 혼자서 살림하고 애보느라 얼마나 힘드냐며 위로하지만 정작 퇴근하면 나 몰라라 자신만 씻고, 밥 먹고, TV 보고, 일찍 자고, 새벽에 아이가 울어도 모른 척하고, 주말에는 일 핑계를 대면서 휴일 근무를 나가거나 라인 관리를 해야 한다며 골프나 등산을 가면서도 정작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가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겁니다.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을 그었지만 상담에서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면 알게 모르게 자연스레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내담자의 고통에 공감이 되면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게 되고 공명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내담자가 고통을 이겨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탐색하게 됩니다.
'네가 왜 힘든 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고통의 원인으로는 A와 B, 그리고 C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B인 것 같고 나머지 두 개의 이유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으니 환경 개선을 통해 이들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고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온전히 직관할 수 있도록 자동적 사고를 교정할 필요가 있겠다'
이처럼 머리에 기반한 상담자의 문제 이해는 공감에 이르는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공감을 한다면 말이 아닌 행동을 하게 되고 행동을 하다 보면 더 깊은 공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진정한 공감을 하고 싶으면 먼저 행동이라도 하세요. 하루라도 혼자서 아이를 돌보면서 모든 집안 일을 해 보면 아내의 고통이 어떤 수준인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이후에 공감을 더 깊게 하게 만드는 다른 바람직한 행동으로 이어질 지, 공감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회피 행동으로 이어질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행동을 해야 공감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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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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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그리스, 라틴 문헌의 원전 번역 대가인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번역해 내놓은 책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이자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죠. 로마 사상 최초의 공동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도시 국가라는 활동 공간을 빼앗기게 된 당시에 개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철학적 적응으로 인간을 더 중시하거나 반대로 세계를 덜 중시하는 것을 택해야 했는데 첫 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 스토아 학파였고 두 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대표적인 스토아 학파였고요.
에피쿠로스 학파의 우주가 무정부적이라면 스토아 학파의 우주는 질서정연합니다. 자연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며 이성은 신, 운명, 또는 섭리와 같은 것이죠. 따라서 어떤 일이든 그것은 신적인 이성, 사물의 본성에 맞게 일어납니다. 그러니 현인이 추구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생명의 유한성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성을 믿고 정진하라는 내용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굳이 택하라면 스토아 학파보다는 에피쿠로스 학파 쪽에 더 가깝기 때문에 시종일관 계속되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 강조가 좀 거슬리더군요.
그래도 배울 점은 상당히 많습니다. 현대에 나온 자기 계발서에서 배울 만한 것들이나 진배없어요. 고전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최병희 교수가 심혈을 기울인 원전 번역서라서 어렵지 않고 매끄럽게 읽힙니다. 평소 고전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셨던 분이라면 한번 도전해 보심이 어떨까요?
닫기
* 나라는 존재는 육신과 짧은 호흡과 지배적 이성에 불과하다.
*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사물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우리가 죽기도 전에 먼저 멈추기 때문이다.
* 너는 생각의 고리에서 목적이 없는 것과 무익한 것을, 특히 지나친 호기심과 악의를 피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너에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하고 갑자기 물어도 "이것과 이것"이라고 지체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일들만을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 그는 자기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의 칭찬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 사물들을, 너를 모욕한 자가 판단하는 대로, 또는 네가 판단해주기를 그가 바라는대로 이해하지 마라. 사물들을 사실 그대로 보라.
* 복수하는 최선의 방법은 네 적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 인생에서 아직 육신이 굴복하지 않고 있는데 영혼이 먼저 굴복한다는 것은 치욕이다.
* 각자의 가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의 가치와 일치한다
* 이제 더 이상 선한 사람은 어떠어떠해야 하는지 토론하지 말고, 그런 사람이 되라.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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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런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인생은 매 순간마다 선택을 요구하죠. 사소하게는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와 같은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과 깊이는 매우 다양합니다.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딜레마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선택을 하든 100%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선택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누구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선택에서 저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 물어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에 물어보는 것을 감안한다면 반대의 선택을 하는 것이죠. 우리는 머리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꼼꼼히 재고 따져보면 확률적으로 후회를 줄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인간의 머리라는 것은 의외로 그리 정확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당히 많은 객관적인 정보를 주관적으로 왜곡하거나 윤색합니다. 그래서 뜻밖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뭐 영혼 기타 등등으로 불러도 됩니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온통 오염된 머리와 달리 비교적 순수한 편이죠. 그래서 저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고 눈앞에 이득이 되는 것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머리를 구분하기 어려운 분들께는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합니다.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런 저런 조건을 따지고 저울질하지 말고 이것을 선택해서 경험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만약 그렇다는 답이 나오면 무조건 하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첫 번째 방법과 유사하죠.
제 인생이 바뀐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저는 거의 모든 선택을 위의 두 가지 방법에 따라 해 왔지만 크게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고 대부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모든 선택의 근거를 합리적인 이성의 판단에만 맡겨왔던 분으로 선택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제가 사용하는 방법을 한번 고려해 보심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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