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는 책은 무수히 많습니다. 심리학 분야를 비롯해 인문학을 살펴봐도 그렇고요. 힐링을 다루는 많은 책들도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을 맞추라고 이야기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제 경험 상 옳은 말일수록 내 것으로 만들기는 더 어렵더군요. 저는 나름 현재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그렇게 되기까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누구든 그렇게 되려면 단순히 책을 읽고 머릿속으로만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결정적인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런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만 에크하르트 톨레가 이야기하는 'Now'를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게는 그런 체험의 기회를 준 두 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하고 '여행'입니다.
죽음과 직접 조우했던 건 아니었지만 삶의 유한성에 대해 뼈저리게 통찰했던 경험이었죠. 지금도 가끔 마음을 치고 지나가는 세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장래가 주목되는 심리학 박사였던 제 학부 선배의 죽음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약혼녀와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어처구니없이 계단에서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조문을 가면 표정 관리가 잘 안 되기는 하지만 그 선배의 장례식장에서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했던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 인생이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에 빠져 한동안 힘들었었죠.
두 번째 죽음은 가뭄에 콩나듯이 제게는 아주 드문 술 친구이자 고등학교 동문이었던 녀석의 죽음이었습니다. 제 보험 설계사이기도 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오더군요. 반가운 마음에 "술 생각 나서 전화했냐?"고 농을 던졌는데 그 녀석이 아니라 그 녀석의 남동생이었습니다. 어제 새벽 귀갓길에 뺑소니 차에 치여 그 녀석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전년도 말에 기분좋게 술 한잔 하고 헤어지면서 불콰한 얼굴로 사람좋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녀석은 자신에게 내년이 없을 걸 알았을까?'하는 생각이 몇 달 동안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나에게도 내년이 허락되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도요. 조문을 갔다가 속도위반으로 임신을 한 약혼녀를 보고 가슴이 또 한번 무너졌습니다. 그날 참 많이도 울었지요.
세 번째 죽음은 도박 중독 상담을 받던 제 내담자였습니다. 술 문제도 함께 있던 분이었는데 가족과 함께 상담을 받고 있었고 가족 갈등이 심해서 그 쪽으로 초점을 맞춰 상담을 진행하던 차에 이 분이 술 김에 가족에게 울분을 토로하면서 버리지 않고 갖고 있던 박카스 병에 담아놓은 농약을 충동적으로 마시는 바람에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결국 저세상으로 가버리셨습니다. 그 때의 충격으로 포스팅을 한 글(
'임상심리학자들이 피검자/내담자를 자살로 잃는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도 있습니다. 그 당시 남은 가족들을 계속 상담하면서 함께 애도 작업을 했는데 상담자로서는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유한성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지금까지 살면서 저도 병환이나 고령으로 많은 친지들과 사별했지만 선배와 친구와 내담자, 이 세 사람의 죽음만큼 제게 큰 울림을 준 사건이 없었습니다. 이 세 번의 경험으로 제 인생관이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생명의 덧없음을, 삶의 유한성을, 죽음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전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지 않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보다 훨씬 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남지 않을만큼요.
그래서 저는 죽음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이 올 때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도망가지 말고 최대한 머무르면서 그 의미를 곰씹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돌리고 싶겠지만 버티세요. 어차피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언제 내게 닥칠 지 모릅니다. 그걸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죽음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Now'를 충실하게 살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여행'도 있습니다. 죽음과는 반대 의미에서요. '삶의 충실함'을 몸으로 느꼈거든요. 몇 번의 경험이 있었는데
'2006년 터키 여행 때 생일날 열기구 위에서 본 떠오르는 아침해', '2009년 네팔 여행 때 본 일출', '2010년 쿠바 여행 때 마리아 라 고르다 해변에 누워 있던 경험', '2011년 스페인 여행 때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고 눈물 흘린 경험', '2013년 케냐 여행 때 라무섬에서 보낸 2박 3일' 등이 대표적입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꼈거나 살아있기를 잘 했다는 뿌듯함을 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행에는 여러가지 장점이 참 많지만 저는 제가 살아있어서 다행이고 행복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도 여행을 사랑합니다. 여행을 가면 현재를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중요한지 매 순간 느끼게 되거든요.
세 번의 죽음을 간접 체험한 뒤로 제 현생관이 바뀌었고 여행을 통해 그 가치를 잊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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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서평 블로그로 유명한 인문학자 이현우 선생의 책입니다. KBS <책 읽는 밤> 2009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을 수상한 꽤 유명한 책입니다만 저는 좀 별로였습니다.
이 책은 이현우 선생이 이야기한대로 블룩(Blook)입니다. 블룩은 블로그(Blog)와 책(Book)의 합성어로 블로그에 올려둔 포스트를 골라서 편집하고 교정을 봐서 만든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작년에 제가 낸 책도 블룩이었는데요 뭐. 하지만 호흡이 짧은 블로그의 포스트를 모아 만드는 책이라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거나 없다면 흐름이 매끄러워야 독자들이 읽기 편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서재입니다. 이런 저런 다양한 책이 막 꽂혀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재미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테지만 제가 좋아하는 방식의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스로를 찌질이, 곁다리 등으로 선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진을 위한 동력으로 삼는거야 상관없지만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 역시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제목부터 좀 거슬렸습니다. 나중에 다 읽고난 느낌 역시 블로그 글쓰기는 블로그 글쓰기일 뿐이라는 것. 책으로 묶을 때는 거의 다시 쓰는 정도의 수고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도 반성이 되는 책이었네요.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서재로 나뉘어 있습니다.
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 러시아 문학 읽기
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 영화에 대한 이야기
3. 아, 겸손한 느릅나무들 : 니체, 데리다, 벤야민 읽기
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 : 지젝 읽기
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 : 번역에 대한 로쟈의 생각
첫 번째 서재의 글들은 유난히 호흡이 짧습니다. 블로그의 글들을 그동안 계속 읽었던 팬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뭐랄까 핑거 푸드만 잔뜩 집어먹은 느낌이어서 입맛만 다시다 끝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처럼 뒷머리를 후려 갈기는 좋은 글도 있습니다. 김규항의 칼럼 '희망을 위하여'를 읽고 쓴 논평,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도 좋았구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더군요. 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전 여전히 김규항 선생의 사상을 지지합니다.
두 번째 서재의 글들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없었다기보다는 선택한 영화들이 재미없었기 때문(솔직히는 못 본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이었죠. 게다가 저는 기본적으로 예술에 평가와 비평의 잣대를 들이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휘휘 넘어갔습니다.
세 번째 서재의 글은 두 번째 서재의 글에 질린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니체와 데리다, 벤야민의 저작에 익숙한 독자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니체만 조금 읽어보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네 번째 서재인 '지젝 읽기'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였습니다. 속된 말로 지젝을 너무 빨더군요. 제가 얄롬을 숭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뭐 지젝의 정치적 입장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편입니다만...
다섯 번째 서재인 '번역에 대한 로쟈의 생각'은 대체 왜 포함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번역 시장의 왜곡과 일반인들의 편견 등에 대한 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게 왜 이 책에 수록되었는지는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말하고 싶어서 넣은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김우열 번역가의
'나도 번역 한번 해볼까'를 추천하겠습니다.
지적 충격을 주는 글꼭지도 많고 생각해 볼 거리도 많이 던져주지만 전반적으로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의 책이라서 읽고나서도 영 정리가 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의 글이 좋은 분들에게만 추천드릴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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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
* 행복한 사람은 삶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당신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행복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대되거나 회고될 뿐이다.
* 자유를 잘 다룬다는 건 원자력 에너지를 다루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 국가란 인간이 동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
* 전제주의나 독재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자본의 '합리적인' 독재보다 더 나쁜 것일까? 이 질문은 "과연 후세인이 부시보다 더 나쁜 놈일까?"란 질문과 같은 것이다.
*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는바, '장사꾼들의 자유'와 '농부들의 자유'가 그것이며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이 정의(근본적인 변화)에 편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그건 자신들이 물적 토대(힘)를 갖고 있기에 곧 정의롭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것이다. 자신의 말(구호)에 책임지고, 그 말에 물적 토대(힘)을 부여함으로써, 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때만이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지 않게 된다.
*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 - 카뮈
*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다.
*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 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삼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난센스(무의미)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난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문학에서의 '난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다.
*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위)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다.
*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 상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순환하지만, 인간들의 순환은 점점 통제되는 것이 그 진실이다. 물론 이런 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다.
* 지젝이 기대하는 것은 미국(초자아)과 제3세계(이드) 사이의 합작이라는 현재의 '억압적 탈승화' 국면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럽이라는 자아의 역량을 회복/확장하는 것이다.
*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 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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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거장들을 통해 살펴보는 책인, 인문학자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2009)'를 북 크로싱합니다.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기 위해 이상, 짐멜, 보들레르, 벤야민, 투르니에, 부르디외, 유하, 보드리아르같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궁금한 분들께 추천합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궁금한 분들은 '소개글'을 참고하세요.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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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라는 인문학자의 이름은 인문학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많이 회자되는 이름이기는 한데 정작 당사자의 책은 본 적이 없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과 같은 책을 벌써 사 두었음에도 독서를 미루다 나중에 구매한 이 책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사람들은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때문에 선뜻 다가서지 못합니다. 문학, 철학, 역사학을 아우르면서 고전도 섭렵해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도 알게 모르게 받게 되고 말이죠. 이 책에도 어김없이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라는 지극히 무거운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이해를 높이기 위해 단 부제 때문에 오히려 더 부담감 백배가 된 좋지 않은 예라고나 할까요? 그냥 '상처받지 않을 권리'로 둔 것이 나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 책은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인문학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돈, 도시, 유행, 도박, 가난, 허영, 홀릭과 같은 자본주의적 단어들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해 이상, 짐멜, 보들레르, 벤야민, 투르니에, 부르디외, 유하, 보드리아르와 같은 거장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적인 삶을 낯선 것으로 바라볼 수 없는 한 자본주의 폭력의 시간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합니다.
제게 이 책의 독서는 자본주의적 삶을 낯설게 만들기 위한 일련의 시도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했던 바를 충족했다고 자평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래도 동서양 대가들의 저작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자의 생각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제게는 좀 버거운 작업이었고 제 인문학 지식의 깊이가 얼마나 얕은 지 확인하게 되어 씁쓸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45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인데도 생각보다 책장은 쉽게 넘어가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가는 책장만큼 생각도 쉽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저부터 쉽지 않은 독서였기 때문에 인문학에 어느 정도 소양을 갖춘 분들에게만 추천드립니다.
덧. 더 읽어볼 책으로 소개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가라타니 고진), '도시의 정치경제학(데이비드 하비)',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게오르그 짐멜)'를 건진 것도 제게는 또 하나의 수확이었습니다.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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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선생이 2007년 6월 8일부터 7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의를 정리해 책으로 엮은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2008)'을 북 크로싱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정치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궁금한 분들은 '소개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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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진정한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정작 고전을 즐겨 읽는 사람은 눈씻고 봐도 눈에 잘 띄이지 않죠. 그만큼 고전 읽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강유원 선생은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저자와 그의 시대를 철저하게 이해하기, 둘째. 전체를 통독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보기, 셋째. 구조를 파악하기, 넷째. 독특한 표현과 비유들을 찾아내기, 다섯째. 소리내어 읽기, 여섯째. 문장 다시 써보기, 일곱째. 핵심만 추려내어 써보기입니다. 말이 쉽지 이건 뭐 거의 고시 공부 수준입니다. ㅠ.ㅠ
이 책은 강유원 선생이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2007년 6월 8일부터 7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의를 정리한 겁니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정치론'을 고전 읽기의 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에는 시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 당시의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강유원 선생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기는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습니다. 심리학책을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읽는 것도 힘든 일인데 고전까지 그렇게 요약하면서 머릿속에 넣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여전히 제게 고전 읽기는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그래도 고전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길잡이를 찾은 것 같아서 반갑고 고전 읽기에 도전하실 분들은 이 책으로 워밍업을 하면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80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로 얇고 가벼운 책이거든요.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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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누가 쓴 책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또 어떤 잡놈이 공부 잘하는 법이라는 헛수작으로 애꿎은 아이들 잡으려고 책 썼구만'이라고 생각하고는 들춰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 선생이 쓴 책이더군요(이런 실례가~).
이 책은 제가 착각한 것처럼 공부를 잘하는 법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고 진정한 공부가 삶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알리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은 고미숙 선생과 연구 공간 수유+너머를 아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미흡하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질문의 크기가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든가, '이념이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든가 하는 핵심을 찌르는 화두를 던지는 솜씨는 여전하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에서 이미 충분히 써 먹었던 코뮌과 노마디즘, 밥의 중요성을 또 다시 울궈먹고 있고 이제는 열정으로 생각해주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워지는 과장스러운 문체도 눈에 거슬립니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체화되어 변화를 일으키려면 자발적인 내적 동기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유+너머에 호의적인 저에게조차 거슬리게 느껴진다면 과연 어떤 독자가 고미숙 선생이 원하는 공부가 곧 삶이요, 삶이 곧 공부인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행동할 수 있을 지 심히 걱정됩니다.
자본주의에 침잠되어 공부 본연의 즐거움과 의미를 상실한 현 세태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눈은 여전히 발군이나 방법 선택이 좀 에러입니다.
다만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설득력있는 갈파와 모든 공부는 나눔으로 완성된다는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개인적으로 고미숙 선생은 이렇게 어정쩡한 stance를 취하는 책보다 좀 더 내공있는 책을 써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덧. 그리고 화보집도 아닌데 반딱반딱하는 재질로 무장해놓고는 이 얇은 책 값으로 11,900 원이나 받고 있습니다. 그린비 출판사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입니다.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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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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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공부하기김해완 (수유+너머)보통 공부는 머리로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다닐 때도 체육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란 머리가 좋은 사람, 즉..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이끌고(?) 있는 고미숙 박사가 쓴 책으로 인문학을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고민과 방향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책 소개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개인적으로 월덴지기가 강력 추천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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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구체적인 모양이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 책, 심리학, 휴식, 자유, 나눔, 노동과 같은 키워드로 특징지을 수 있는 뭔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개인 도서관 겸 갤러리가 될 수도 있고 심리학 북 카페에 '민들레 영토'를 결합한 형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까지가 현재 제가 도달한 지점입니다.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계속 준비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 책처럼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높은 싱크로율을 보이는 책은 별로 못 봤거든요. 벤치마킹 할 거리를 많이 찾았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처음 접한 것은 시사IN의 칼럼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뭔가 운명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알 수 없는 끌림도 있었고요. 그래서 고병권 박사의
'고추장, 책으로 말하다'를 읽었고 그 이후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나오는 책들에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인문학 강좌도 들어볼 생각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이끌어 온 고미숙 박사(일반인들에게는 '달인 시리즈'로 알려진)의, 제목 그대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및 비젼 탐구서입니다.
현재의 심리학은 사회과학에 속합니다. 그래서 사회과학자가 되게끔 훈련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심리학은 인문학과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그런 결합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막연하게나마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제가 꿈꾸던 이상향(?)을 현실화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디어 이상으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실제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고 있고, 걷고 있는 이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생각에 벅찬 희망이 생겼습니다.
저자가 워낙 글빨이 뛰어난 사람이기는 하지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글은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데 이 책은 제게 큰 에너지를 주었습니다.
인문학, 노마디즘, 코뮌이라는 단어에 친밀감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혹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셨으면 하는, 월덴지기가 강력 추천하는 책입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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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어디서든 출구는 있다는 것. 조금, 아주 조금만 발을 내디디면 문득 길이 열린다는 것 - 33p* 대부분의 경우 대학에 자리잡으면 그때부터 공부는 끝난다는 게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40대만 넘으면 '원로'로 자처하면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열정을 쉽사리 접어버린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제도가 부여한 과정을 열심히 습득한데서 멈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 42~42p*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지식의 생산! 앎의 기쁨을 만끽하자는 것.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기쁨이라는 전제는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앎이란 그저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는 것.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식인이 누리는 특권도 일정부분은 그런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리라. 지식의 본래 속성이 기쁨이라면 기득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보상을 받았는데 무슨 대가가 또 필요하단 말인가 - 56~57p* 만약 내가 매달 60만 원씩 붓는 적금을 들었다면 일년에 약 700만 원 정도를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돈이 그만한 관계와 능력, 더 나아가 그만큼의 행복을 내게 주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 70p* 강의의 가장 큰 조건은 가르치는 이가 그 내용에 매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이 왜 학생들에게 외면당하는가? 선생 자신도 감동하지 않는 메마르고 건조한 지식을 썰렁하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 72~73p*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만큼 물질적 순환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 82p* 공동체는 명분이 무엇이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 87p* 진정 자신의 신체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쁜 능동 촉발',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곧 혁명이 되는 출발지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랑은 희생과 연민이라는 도식이 해체되어야만 한다. - 97p* '그가 억지로 무엇을 하거나 불편을 참고서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가능성을 보이기만 해도 나는 그것을 허락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열정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 99p* 소유욕과 희생적 헌신이라는 낡은 도식을 벗어나면 사랑에 빠져도,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도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생에 대한 능동적 에너지를 거침없이 발산시키는 것, 형식이 어떠하건 사랑과 결혼에서 이것을 구현할 수 없다면 그건 모두 사기다! - 102p*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지식의 새로운 경계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지식을 두뇌 활동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삶이 바뀌고 신체가 바뀌지 않고서 능동적인 지식이 생산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도 어렵다. - 138~139p* 인디언들에 따르면,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를 받는 것이다. 증여가 단순히 물질적 나눔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 143~144p* 흔적을 남긴다는 건 단순한 무능력을 넘어 타인의 노동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착취다. 말하자면 '내 대신 네가 치워!'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 점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 148p* 진지함은 공동체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 공동체들은 내적으로는 상하위계가 작동하게 되는 한편, 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짐으로써 결국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 177p* 돈과 지위, 명성 따위를 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말 버리기 어려운 건 무의식에 새겨진 자의식이다. 그것은 때로는 교만과 욕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잉 겸손과 나약함으로 때로는 감상과 무력함으로,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관계와 활동을 가로막는다. - 185~186p* 코뮌이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외부'를 지향한다. 자본의 포획장치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일상의 전면적 재조직화가 우리가 추구하는 혁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 271p* 모두들 한결같이 불평하고 한탄해댄다. 그러나 모두들 불평을 하면서도 정작 떠나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 떠나는 게 더 불안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아니라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불쌍한 도시인들
- 286p*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되는가 - 2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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