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사감위와 함께 발족한 중독예방치유센터가 2년 여 동안 한 일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이 자기관리 메뉴얼을 내놓은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워낙 엉뚱한 삽질만 해왔기 때문에 중간만 해도 대단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책은 의외로 완성도가 꽤 높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상담을 하는 전문가들이 도박 중독 분야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치료 관련 서적을 review한 뒤 만들었고 역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들에게 감수를 맡긴 프로그램이거든요.
처음에 이 책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회의적이었습니다. 2008년 NCPG에 갔을 때 Ladouceur가 자가 치료를 위한 자기 관리 메뉴얼을 선보였는데 의료보험 민영화 때문에 자구책으로 내놓은 티가 역력했거든요. 우리나라는 도박 중독자와 그 가족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이를 따라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병에 대한 인식이 워낙 없고 치료 센터에 나오는 것을 극히 꺼리는 우리나라 도박자의 특성 상 자가 치료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다보면 전문적인 치료 기관을 방문하고자 하는 동기와 의지가 생길 수 있으니 이런 노력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아직 여러가지 고칠 점이 많이 눈에 띄지만 도박 중독 치료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는 새바람이라 생각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책의 장점과 개선점을 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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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p. '도박하는 이유에 따른 전략과 도움 페이지'
-> 도박을 하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 동기를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보기와 연결하여 제공하고 있어 자신이 어떤 동기 때문에 도박에 몰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더군요. 아주 적절하고도 친절한 설명이 좋습니다.
* 21p. '도박 일지, 도박충동대처일지 작성하기'
->대부분의 치료 프로그램에서는 도박 일지와 도박충동대처일지 중 하나만 제공하거나 둘 다 제공해도 별개의 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책에서는 둘을 묶어서 실제 도박 행동과 관련된 일지와 충동을 다루는 일지를 연결함으로써 충동과 행동의 관계를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신선합니다.
* 28. '도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어야 지금의 상태에서 내가 변화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많은 도박 중독 치료자들이 도박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다가 실패하는데 도박자에게 도박이란 나쁜 친구 같은 것이어서 헤어져야함을 알면서도 즐거웠던 추억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면 관성에 의해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탐색하고 인정하는 작업이 중요한데 이 책에서는 정확하게 이 점을다루고 있습니다. 훌륭합니다.
* 29p. '도박으로 인한 득실 찾아보기'
-> 이 작업을 할 때에는 대개 저울이나 자신이 적어놓은 내용의 양을 비교해서 설명하는데 안이 채워진 별과 안이 비워진 별의 비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변화 준비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습니다.
* 35p. '도박을 포기하는 조건'
->많은 도박자들이 도박을 완전히 끊는 것과 조절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을 주저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박자가 도박을끊을 수 있도록 결정 지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참신합니다. 특히 하단부에 '줄이기'보다는 '끊기'를 권유하는 방향으로 이 책이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밝힘으로써 신뢰도를 높였습니다. 이 부분도 높이 살 만 합니다.
* 35p. '나 자신과 계약하기'
->도박자는 도박을 끊겠다는 생각만 백만 번을 하지만 이를 verbalization하지 않습니다. 이를 언어화하고 자신과의 계약을 통해 치료 의지를 외부로 표명하는 작업은 우유부단함의 고리를 끊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아주 적절한 개입입니다.
* 38p. '변화하는 나를 위해 선물하기'
-> 전에
'단도박을 기념하고 축하하라'라는 글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도박을 끊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의지를 북돋기 위해서는 도박자 스스로 자신을 칭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은 아주 중요한데 적절하게 잘 수록한 것 같습니다.
* 53p. '도박 행동과 관련된 자동적 사고 반박하기'
-> 많은 치료 프로그램에서 비합리적 생각의 일부만 반박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모든 비합리적 생각을 어떻게 반박하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 58p. '상황별 도박충동 강도 체크하기'
->도박 충동에 취약한 상황을 '외부의 사건들'과 '내면의 사건들'로 구분하여 제시하였습니다. 좋습니다. 살짝 아쉬운 점은 점수가높은 항목을 아래에 별도로 정리해서 도박자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건들에 취약한 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배열하지 않은 것입니다.
* 62p. '위험 상황별 도박충동 대처법'
-> 61p에서 먼저 도박자 나름의 대처 방법을 살펴보고 다음 장으로 넘겨 상세한 보기를 제시하는 구성이 좋습니다.
* 64p. '어떤 활동이든지 시작해보고 충분히 경험해 보세요'
-> 도박자는 충동적이라서 싫증을 잘 느끼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 열심히 해야 한다는 comment가 필요합니다. 아주 적절한 언급이죠.
* 106p. '만약 여러분이 영수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실수'와 '재발'의 차이를 알아보기 쉽게 나눈데다 보기를 들어 잘 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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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p.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도박을 시작했다가 문제에 깊숙하게 빠지게 되시지는 않았는지요?'
->무슨 의도로 이 문구를 사용했는지는 이해하나 도박자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도박을 수단으로 선택하는 도박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30p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인정, 배우자와 아이의 편안한미래, 멋진 자동차와 집을 꿈꾸시나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도박을 선택하셨는제 현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요?"라는 문구로 반복되고있습니다. 대폭 수정 및 방향 전환이 요망됩니다.
* 11p. '한 달 간 도박에 쓴 돈과 한 달 간 도박에 쓴 시간을 계산하는 박스'
->이렇게 제시하면 상당수의 도박자가 돈의 액수와 시간을 계산하는데 애를 먹게 됩니다. 편차가 큰 도박자가 많으니까요. 차라리'하루 동안 도박에 쓴 금액 or 시간' 대신 '하루 동안 도박에 쓴 평균 금액 or 평균 시간'으로 적으면 에누리 값을 알아서 계산해 기입합니다. 오히려 이게 더 정확합니다.
* 17p. '도박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 알아보기'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습니다. 경제적, 정서적, 신체적, 관계적 영향을 모두 망라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일단 도박자가 작성하기도 전에 질려버릴겁니다. 어차피 동기 강화에 초점을 맞춘 장이기 때문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경제적 혹은 관계적 영향만 뽑아서 impact를 높이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뻔 했습니다.
* 31p. '도박을 계속하는 미래의 내 모습 상상하기'
-> 제가 현장에서 실제로 해 보니 도박자 스스로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 이런 visualization입니다. 의도는 좋지만 자기관리 메뉴얼에 적합한 과제가 아닙니다. 숙련된 상담자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 39p. '나의 버팀목 명단 작성하기'
->social support를 제공하는 집단의 구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은밀한 중독자'인 도박 중독자는 자신의 문제를 open하는 것부터 매우 힘들어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격려하는 부분이 추가되어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42p. '어떤 생각과 기분이 드는지 아래에 한 번 적어보세요'
-> 생각과 기분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적게 하는 것보다는 하나만 적게 하거나 아예 구분선으로 나누어 따로 적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 45p. '도박 중독의 단계'
-> 모든 도박 중독 문헌에서 많이들 사용하고 있지만 인용 출처를 밝히는 것이 옳은 일이고 또 그렇게 하면 신뢰도가 높아지는 장점도 있습니다.
* 59p. '도박충동 대처전략 작성(예)'
->도박 중독자들은 나름대로 도박충동에 대처했다가 실패했던 경험들을 다들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아주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제시된 보기는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도박자들이 대표적으로 실패하는 대처 전략의 예를 먼저 제시해서 성공한 대처 전략과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낫습니다.
* 61p. '도박충동 다루기'(60페이지)에서 파악했던 위험한 상황에서 강도가 강한 순서대로 대처법을 계획하고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 방법보다는 도박 충동 다루기에서 파악했던 상황들의 충동 강도를 계량화해서 충동이 낮은 순서대로 적용함으로써 성공 경험을 차츰 누적하는 방식이 좋습니다.
* 63p. '도박을 대체할 대안활동은 도박을 통해 자신이 얻고자 했던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박을 대신할 취미로는 이런 것이 좋다'라는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도박이 주는 흥분과 스릴을 대체할 수 있는 취미를 선정하는 것은 도박자의 craving level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자극해서 오히려 높일 수도 있습니다. 아예 상반된 취미를 탐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 63p. '도박 이외에 즐기던(즐기고 있는) 활동 되짚어보기'
-> 단순히 활동 구분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과거/현재', '혼자/함께', '흥분추구/스트레스해소'처럼 세부 분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64p. '오른쪽 페이지의 추천 대안활동 목록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추천 대안 활동 목록을 사용하면 제시된 목록 안에서만 찾게 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차라리 활동 목록을 세부 구분에 따라 꼼꼼히 작성하게 하고 보기를 하나 정도만 제시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낫습니다.
* 74p. '돈을 벌어서 추구하고자 했던 행복한 삶의 가치관을 떠올려 보거나 새롭게 세워 보세요'
->선언적인 문구에 불과합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은 도박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How To'인데 그게 없네요. 게다가 이런 가치관과 태도의 문제는 자기관리 메뉴얼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 93p. '나의 관계회복 목록'
->세부 내용을 보면 '관계회복이 중요한 이유', '관계회복에 필요한 것', '관계회복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말이나 행동' 등의 항목이 있는데 내용의 중복도 중복이지만 너무 복잡해서 도박자가 스스로 작성하기 어렵습니다. 좀 더 쉽게 만들어야 할 듯 합니다.
아직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눈에 띄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감위 중독예방치유센터가 엉뚱한 사업 그만 벌이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이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 주기를 바랍니다.
덧. 이 자기관리 메뉴얼은 아직 제가 일하는 기관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는 아니라서 세부 내용을 참고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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