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출처 :
YES24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양창순 선생님이 2012년에 낸 책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들 중 글솜씨가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데 원조급까지는 아니어도 초기에 유명세를 탄 분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은데요.
글솜씨로 유명세를 탄 분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자신의 임상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내공이 글타래로 충분히 쌓이기 전에 출판사의 등떠밀기에 휘말려 비슷비슷한 종류의 책을 계속 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맨 처음 인기몰이를 했던 책은 참 좋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거지요. 외국의 임상가도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제가 극찬을 했던
'당신이 나를 위한 바로 그 사람인가요?(1992)'를 쓴 바바라 드 엔젤리스도
'지금의 고난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2005)'같은 너무나 평범한 책을 후속작으로 내기도 하니까요.
소설가라면 창의력이 고갈되었음을 느낄 때 절필을 선언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지만 임상가는 임상 현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오히려 내공을 더 잃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일을 놓을 수가 없는거지요.
서두가 길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양창순 선생님도 글을 마구 쏟아내는 수준입니다. 개정판을 포함한다고 해도
* 때로는 내 안에, 때로는 내 밖에 있는 나(2001년 11월)
* 나? vs 나!(2003년 1월)
* 당신 자신이 되라(2005년 6월)
* 마인드 포스(2007년 9월)
* 나는 왜 사랑을 못하나(2008년 7월)
* 내 인생, 이 정도면 괜찮아(2008년 10월)
* CEO, 마음을 읽다(2010년 7월)
* 엄마에게(2010년 9월)
* 미운오리새끼 날다(2011년 2월)
*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2012년 7월)
*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2012년 11월)
*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의 심리학 테라피(2013년 8월)
* 나는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2014년 7월)
보시는 것처럼 2000년도 초에는 2년에 1권 정도로 책이 나왔습니다(개인적으로 이것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2008년 '나는 왜 사랑을 못하나'부터 시작해서는 거의 1년에 2권 꼴로 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모든 책을 제가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아무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시간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임상가가 경험할 수 있는 임상 현장에도 제약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결국 사골 곰탕 우려내듯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할 수 밖에 없는거지요.
이 책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가 바로 그런 책의 대표격입니다. 현장의 임상가에게 영감을 주는 책도 아니고, 심리 장애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들이 어디서나 집어들고 아무 곳에서나 쉽게 읽다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집어던질 수 있는 그냥 달달한 pop psychology 에세이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내용의 흐름도 일관되지 않아서 저는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와 비슷한 내용을 기대하고 읽었는데 읽다보니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게다가 제가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는데 TCI의 기질과 성격을 섞어서 '7가지 성격의 보편적 유형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처음의 네 개는 기질의 영향을 좀 더 많이 받는 성격 유형이고 뒤의 셋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더 발전이 가능한 성격 유형이라는 식으로 잘못 설명하기까지 하더군요. 저는 이를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빌려오다 발을 헛딛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패턴인 맨 마지막에 예의 성격 장애나 특이한 정신과적 증상을 빌어 심리적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더군요.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으로는 '자살 본능', '가면 우울', '가짜 철학적 경향(심리학에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는 훨씬 더 정확한 개념이 있습니다만), '강박장애와 편집증', '공황장애', '환절기 마음병', '따돌림', '열등감과 죄책감', '거부불안' 등이 있는데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그냥 생각나는대로 소개한 것처럼 보여서 더욱 씁쓸합니다.
나름 기대하고 집어든 책인데 실망감이 너무 커서 우울해질 지경이더군요. 책의 뒷편에는 전 대법원장인 고려대 석좌교수, 전 삼성 에버랜드 사장, 법무법인의 대표 변호사, 기업의 대표이사 등의 화려한 추천사가 난무하지만 정작 임상가의 추천사는 하나도 없다는 게 이 책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에게도 추천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래서 '월덴지기가 인상깊게 읽은 구절'도 없습니다.
덧. 이 책은 직장 자료실에서 빌려 읽은 책이라서 북 크로싱 하지 않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925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은 사회 심리학에 나오는 심리 현상으로
어떻게 행동할거라는 주위의 기대가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쳐 결국 그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나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등이 자기 충족적 예언과 관계있는 현상들입니다.
심리치료분야의 예를 들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겁니다.
A라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잘못된 기대(예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A는 자신도 모르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을 싫어할만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A의 그런 행동때문에 정말로 사람들이 A를 싫어하게 되면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라고 자신의 기대를 강화하는 것(스스로 자신의 예언을 충족시킴)이죠.
저는 이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심리치료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고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유발해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켰던 바로 그 방식으로 계속 살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자기 충족적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다보면 형태는 달라도 심리적 문제의 근원에 자기 충족적 예언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문제가 별로 없을 정도라는 걸 느낍니다.
상담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가 감정을 갖고 옵니다. 변화를 원하면서 동시에 변화를 두려워하죠. 의식적으로는 바뀌고 싶지만, 우물 밖의 세상이 두려운 개구리가 우물 안에 안주하듯이 이미 익숙해진 삶의 패턴을 무의식적으로 고집합니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 충족적 예언입니다.
그래서 변화의 고리를 연결하려면 자기 충족적 예언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충족적 예언을 하지 않으려면 이전에 포스팅한
'탐정처럼 생각하기'를 응용하거나 인지 행동 치료(CBT)를 통해 잘못된 기대나 예언을 교정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973
paranoid한 내담자를 상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초보 상담자는 모든 내담자들이 고통받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담을 받으러 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다가 도리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paranoid한 내담자가 상담을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악의적이라는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며 상담자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결국은 그 신념을 충족하고야 맙니다. 따라서 말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 상담이 조기에 종결됩니다. 그래서 상담자가 역전이를 느낄 겨를도 없으며 대부분의 상담자는 왜 내담자가 상담을 종결하려고 하는지 의아해합니다.
paranoid한 내담자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이타적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이득이 없는데도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모두 위선자에 가식을 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상담을 할 때에도 상담을 함으로써 상담자가 챙기는 경제적인 이득과 자신이 상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저울질합니다.
paranoid한 내담자는 타인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배우자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상담자를 이상화하게 되면 그 순간은 상담자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것 같지만, 그러한 시간은 짧게 지나가고 금방 상담자를 평가절하하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상담자가 상담을 종결한 후에 돌이켜보면 paranoid한 내담자가 실제로는 별로 깊은 속내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paranoid한 내담자는 말로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사람의 진의를 왜곡하고 폄하하기 때문에 아무리 공감을 잘하고 수용적인 상담자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버텨내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를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 바로 paranoid한 내담자인데 이들은 왜곡된 지각을 바탕으로 상담자를 provoking하게 만들고는 상담자의 반응을 자신의 예상을 확인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상담을 종결합니다.
paranoid한 내담자는 항상 세상은 자신을 착취하거나 해를 끼치려고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상담자의 말도 쉽게 왜곡하고 적대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따라서 paranoid한 내담자를 상담할 때에는
유머, 비유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면 위험합니다.
가벼운 유머나 비유도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dry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해진 틀을 지키고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직면이나 해석은 라포가 완전히 형성된 이후로 미루고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paranoid한 내담자를 상담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일관된 수용과 지지인데 그 길은 정말로 멀고 험한 길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