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00년 대 초반에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깨닫게 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심리 문제를 겪게 되면 곧바로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거나 최소한 관련된 책을 곧바로 구매해서 읽는데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눈을 깜박이는 틱 증상을 보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모나 주변의 학부모들에게 물어보는 걸 더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심리적 문제를 세세히 다루는 전문 서적의 수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사람들이 읽지를 않으니 찍어낼 수 없는 것이죠. 이 문제는 나중에 제가 도박 중독 관련 책을 쓰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렇더라도 요새는 인터넷만 잘 검색해도 양질의 정보를 많이 찾을 수 있으니 전에 비해서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핵심적인 정보를 잘 요약해서 담고 있는 책이라는 매체를 활용하지 않는 풍토는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어떤 문제인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한 감에 의존해 이런 저런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걸 말리는 편입니다. 제대로 된 참고 서적의 추천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그래서 정신건강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대처 방법입니다. 꼭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지 않고 자가 치유를 한다고 해도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것이 안전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수준의 심각한 문제는 혼자서 심리학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때의 공부는 제대로 된 전문가를 찾아가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가 치유를 위한 심리학 공부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추천 서적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위 일반인을 위해 쓴 베스트셀러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읽을 때는 마음에 와 닿고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변화로 연결되게끔 이끄는 힘이 약하거든요.
사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닥치는대로 심리학 서적을 읽는 것 보다 더 해로운 건 상담/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정신건강전문가가 되어 상담/심리치료를 하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전문 수련 과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심리적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정신건강전문가가 되서는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전문가가 되고 난 이후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러한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하거나 전문 수련 과정에 들어가는 것을 치유 과정과 혼동하지 마세요. 자신이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끌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 다음에 이걸 업으로 삼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에 임상/상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임상심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 중에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비율이 늘고 있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좀 두려울 정도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샜는데 몇 줄로 요약하겠습니다.
* 자가 치유를 위한 심리학 공부는 상담/심리치료를 병행하든 아니든 정신건강전문가의 자문을 받아서 할 것
* 자문을 받지 못할 때도 일반인을 위한 심리학 베스트셀러는 치유를 위한 책으로 부적합하니 피할 것
* 상담/심리치료를 전공하는 것은 치유가 아님. 심리학을 업으로 삼을지는 치유가 마무리 된 뒤 결정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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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나서 곧바로 이런 저런 단체에서 저마다 정신건강전문가를 투입하겠다고 줄을 대는 북새통 속에서 이전과 달리 한국심리학회도 재난심리위원회를 중심으로 기민하면서도 진중하게 움직였고 2주도 안 되는 시점에 심리요원들을 위한 집체교육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저만 해도 5월 초부터 안산 지역의 학교를 배정받아 심리지원 자원봉사를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파견 형식으로 근무일에 자원봉사를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바람에 따로 개인 시간을 낼 필요도 없이 평소에 근무하듯이 전일 자원봉사를 하는 행운을 누렸기에 기왕 자원봉사를 할거라면 끝까지 제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집체교육을 받을 때도 분위기를 타고 끓어올랐다가 양은 냄비처럼 식어버리지 말고 학회가 중심을 잡고 최소한 올해는(개인적인 기대로는 내년까지) 지속적으로 자원봉사를 했으면 했고 당시 재난심리 위원회의 운영진들이 모두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셨기 때문에 이번 자원봉사만큼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두 달이 지난 지금 제가 초반에 가졌던 의구심은 그대로 적중하여 혹시나 했던 마음은 역시나로 끝이 났습니다. 재난심리 위원장 명의로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에게 6월 30일자로 발송된 공문의 내용인즉슨 7월 각급 학교의 방학에 맞추어 자원봉사를 종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7월 중으로 지속적인 상담이 필요한 학생은 정신건강증진센터 및 WEE센터로 연계하고 상담을 종료하는 학생들은 간단한 신상과 상담진행상황을 학교에 있는 상담 담당 교사에게 전달하고 끝내라는 거지요.
제가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가장 많이 전해들은 이야기는 자원봉사를 나오는 건 정말 고맙지만 하려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중간에 어설프게 빠져나가면 현장에서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상담전문교사나 WEE클래스 담당 교사가 잔여 업무를 모두 뒤집어 쓸 수 있어 결국은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우려섞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모두 사실이 되었습니다. 초반에 투입된 전문가들이 주력한 일은 정서행동특성검사를 전학년에게 실시하고 2차 선별평가까지 진행하여 위험군(또는 우선관리군과 일반관리군까지)으로 분류된 청소년들에게 상담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대적인 선별 작업이 진행되었고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청소년들이 선별되어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 경우 그런 선별 평가가 어느 정도 완료되어 지속상담을 시작한 것이 6월 3주차부터입니다. 그래놓고는 갑자기 상담을 중단하랍니다. 라포가 형성되었건 말건 학회 차원에서 손을 뗄테니 마무리하고 그만 나가랍니다. 그리고 자원봉사 활동의 댓가로 활동비를 줄테니 신분증과 통장사본, 전문가 자격번호를 알려 달랍니다. 누가 활동비 따위를 받겠답니까?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몰려든 수 백명의 전문가 중 어느 누가 활동비 따위를 신경쓰겠습니까(학회에서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얄궂게도 종료 공문에 활동비를 주겠다는 내용이 함께 적혀 있으니 기분이 더 상하네요).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지만 이미 결정난 사항이랍니다. 단호한 답장이 그것도 너무나 빨리 왔기에 더 반박할 의지를 잃었습니다.
한국 심리학회 산하 재난심리 위원회 명의로 종료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저도 더 이상 회사의 근무일에 자원봉사를 나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명령을 내지만 않아도 자원봉사를 할 수 있으니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자원봉사를 계속 하고 싶으면 개인 자격으로 하랍니다.
7월에 대부분의 학교들이 기말고사와 연이은 방학으로 상담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이 방학에도 개인상담을 받으러 나오겠노라고 이야기를 하는데다 학교마다 방학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해서 돕겠다고 하는데 정작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그것도 언론의 추이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기관이 다 빠져나가도 끝까지 남아서 돕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한국 심리학회가 발빠른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수많은 전문가가 매일 안산의 수많은 중, 고등학교에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제 그만 하랍니다.
어떤 이유로 자원봉사를 종료하게 되었는지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고, 이와 관련하여 150명이 넘는 자원봉사 전문가의 의견을 단 한번도 수렴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실망스럽습니다.
이번만은 다르겠지, 이번만은 다를거야.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습니다. 학회는 역시나 였습니다. 과거에도 역시나였고, 현재도 역시나이며 앞으로도 역시나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는 기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덧. 학회의 잘못된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제 자원봉사 활동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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