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조금 많기 때문에 소위 스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 끝까지 읽으실 분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읽기를 권해 드립니다.
닫기
임상 현장, 특히 소아를 다루는 임상 장면에서 임상심리학자들은 가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자녀의 진로, 학업 성취와 관련해 심리 평가를 받게 하려는 부모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지능지수와 관련된 질문과 요구입니다. 많은 경우 이런 부모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녀가 천재라고 믿는 유형,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자녀가 둔재라고 믿는 유형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믿음의 기준이 학교에서 실시한 지능 검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천재라고 믿는 유형의 경우 학교에서 실시한 지능 검사의 결과가 140 이상이 나왔다면서 자랑스럽게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실제 검사를 해 보면 대체로 우수하기는 하지만 천재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고 부모가 원하는 영재는 더더군다나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유형에 속하는 부모들은 때에 따라 평균 수준의 지능을 가진 자녀에게 무리한 수준의 과외 활동을 강요함으로써 과도한 부담감으로 인해 아동에게 오히려 정서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자녀가 둔재라고 믿는 유형의 경우에도 학교에서 실시한 지능 검사의 결과가 경계선 수준인 70대가 나왔다고 하는데 실제 지능을 측정해 보면 평균 수준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실망한 나머지 자녀의 학업을 너무 빨리 포기함으로써 아동이 적절한 학습 기회와 경험을 제공받지 못함으로써 체계적인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역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에 다닐 때에도 단체로 지능 검사를 받았습니다(참고로 학교에서 실시한 제 지능지수는 88입니다). 학교마다 적성 검사나, 인성 검사처럼 집단으로 실시할 수 있는 심리 검사를 경쟁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보면 아마 지금도 지능 검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학교에서 집단으로 실시하는 지능 검사 결과는 별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 이유는 집단으로 실시하기에는 지능을 측정하는 검사 자체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IQ(Intelligence Quotient)로 알고 있는 지능지수는 지능 검사에 의해 측정되는데
전체 지능(Full IQ)은
언어성 지능(Verbal IQ)과
동작성 지능(Performance IQ)으로 구성이 되고 검사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각각 5∼6개의 소검사의 측정값으로 구성됩니다. 즉 11개에서 12개에 이르는 소검사 결과를 통해 지능이 측정되고 각 소검사의 결과는 다양한 검사 자극과 시간제한, 가중치 적용에 의해 측정되고 계산됩니다. 따라서 지능 검사의 시행과 채점 및 결과 해석에 익숙한 전문가가 일대 일로 검사를 해야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검사 시 검사자는 단순히 문제를 내고 답을 옮겨 적는 정도의 수동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에 임하는 피검자의 동기 수준, 주의 산만 정도, 눈맞춤, 자발적인 의사표현 여부, 특이한 몸의 움직임, 신체적 불편함 등을 체크하고 피검자가 검사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최근에 집단으로 실시할 수 있는 지능 검사가 개발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충분한 신뢰도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학교에서 실시하는 지능 검사에 사용되는 검사들이 모두 엉터리는 아닙니다. 실제 시각-운동 협응 속도를 측정하는 '바꿔쓰기' 소검사와 유사한 검사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특정 영역에 편중된 몇 개의 검사로만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능을 측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능 검사를 통해 주의집중능력, 학습 능력, 기억 능력, 판단력, 개념형성능력, 논리적 사고력, 추상적 사고력, 문제 해결 능력, 분석 능력, 종합 능력, 언어 이해력 및 표현력, 지각 조직화 능력, 공간 지각 능력, 정신 운동 속도, 시 지각 조절 능력. 시각적 기민성과 같은 다양한 인지적 기능이 측정되는데 집단으로 실시되는 지능 검사는 이러한 능력들을 모두 포괄하지 못하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지능지수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입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전체 지능은 언어성 지능과 동작성 지능으로 구성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전체 지능이 100이라고 하더라도 언어성 지능과 동작성 지능이 모두 100이면서 전체 지능이 100인 사람과 언어성 지능이 120이고, 동작성 지능이 80이면서 전체 지능이 100인 사람은 똑같이 전체 지능이 100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기능 수준을 보이게 됩니다. 지능지수라고 하는 단일 지수는 그다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어성, 동작성 지능지수, 그리고 각 소검사의 흩어짐과 분포, 각 소검사의 반응 내용에 대한 해석이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자녀의 지능이 100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매우 실망합니다. 120이라고 하더라도 만족하는 부모의 수는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120이라고 하는 지능 지수는 우수(superior) 수준에 해당하는 인지적인 기능 수준을 반영하며 상위 7%에 속하는 매우 우수한 수준입니다. 또한 130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합니다. 모두 다 130 이상의 지능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능지수는 그 사람의 향후 수행을 예측해보기 위한 기준의 하나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유일무이한 것도 아니며 지능지수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지능지수가 120인 사람에 비해 90인 사람이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우물에 가두어버리는 낙인 효과(stigma effect)입니다.
예전에 개그 콘서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청년백서'의 구호를 빌자면...
"지능은 하나의 지수일 뿐, 과신하지 말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