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를 할 때 검사 전에 수검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일별하다 보면 DSM의 여러 진단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딱히 어느 것 하나로 수렴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진단들을 떠올려서 비교하고 몇 개의 진단 가설로 정리한 뒤 심리평가를 통해 변별 진단을 하려고 시도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제 경험 상 위와 같은 경우는 심리검사 sign들도 기대만큼 전형적인 profile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심리평가를 마치고 나서도 어떤 진단을 내려야 할 지 분명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아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단계까지 평가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게 됩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평가자가 오로지 진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수검자가
이런 저런 증상을 호소하는데 함께 묶이지도 않고 어떤 진단을 내려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변별 진단을 해야 하는 사례가 아니라 두서없이 보고되는 증상의 핵심을 찾아야 하는 문제일 가능성을 떠올려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진을 할 가능성도 있고 이에 따라 치료 방향 설정도 잘못될 위험성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증상이 계속 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무기력감,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걱정, 만성적인 짜증, 통제되지 않는 눈물, 수면 장해 및 피로감과 같은 증상들을 호소하는 수검자가 있다고 해보죠.
얼핏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도 우울 장애, 홧병, 불안 장애 등등의 진단들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증상들이 어느 하나의 진단으로 딱 묶여지지 않죠.
심리평가를 해도 구조화된 검사에서는 대부분의 임상 척도가 상승되어 있고 투사법 검사에서도 고통감이 두드러지는데 전형적인 양상이 아니라서 수검자가 힘들어 하는 건 분명한데 특정 진단을 내리기에는 결과 양상이 애매한 겁니다.
진단에만 집중해서 수검자를 case formulation하게 되면 이런 사례의 경우 증상이 계속 바뀌게 됩니다. 우울 장애처럼 보였던 증상은 어느새 사라지고 신체화 장애처럼 보이는 증상이 새로 등장하는 것이죠.
이럴 때는 진단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서 이런 증상들을 만들어 내는 기저의 핵심 문제가 무엇일까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증상이 수검자에게 어떤 이차적 이득(secondary gain)을 가져다 주는 지를 포함해서요.
문제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이파리나 꽃만 보면 오히려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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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가가 아닌 병원이나 상담센터에서 근무하는 임상가들은 이미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전문가를 만나 면담을 끝낸 수검자를 평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chart에 기록된 정보를 바탕으로 가설을 설정하고 심리평가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왜 하필 지금 왔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뭐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니까 왔겠지 또는 버티다 버티다 안 되니까 힘들어서 지금 왔겠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마는 거지요.
물론 그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왜 하필 지금 왔는지를 탐색하는 게 굉장히 유용합니다. 정말로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왔는지, 알려지지 않은 오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외부의 도움을 받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다가 최근에 깨닫게 되었는지, 그랬다면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되었는지 등등 매우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니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묻지 않으면 수검자가 알아서 대답하지 않기 때문에 검사 전 또는 검사 후 면담에서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병원 장면처럼 문제의 정도가 심각한 수검자가 많은 곳에서는 심리평가를 할 때에도 변별 진단이 중요하기 때문에 진단 기준 충족을 위한 주 호소(Chief Complaint) 중심으로 탐색하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잠재 가설이 너무 많아질 수 있어 진단이 틀릴 가능성이 커지고 무엇보다 임상가에게 과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왜 하필 지금 오셨냐?"는 질문에 대한 수검자의 응답을 면밀히 살펴보면 불필요한 진단 가설들을 배제할 수 있게 되고 무엇보다 심리검사 sign만으로 알기 어려운 빈틈을 메울 수 있는 여러가지 단서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임상가들께서는 꼭 '왜 하필 지금 오셨냐'는 질문을 잊지 말고 수검자(또는 보호자)에게 꼭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할 때 이 질문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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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를 할 때 수검자를 가장 덜 괴롭히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심리검사 도구를 선택하는 것도 임상가의 능력입니다만 반복 사용에 제한이 있는 심리검사의 특성 상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은 도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대면 검사가 끝나고 실시한 검사 sign을 정리하다보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 선택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심리검사 sign들을 선별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단계. 절약성이 가장 중요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최소한의 검사로 최대한의 정보를 모을 수 있다면 가장 좋죠. 그러니 검사 도구 선정 단계에서부터 꼭 필요한 검사가 아니면 가능한 한 추가, 실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검사 수가 때문에 이미 검사들이 battery로 묶여서 처방되는 병원 장면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2단계. Key word를 중심으로 정리
인간의 심리 현상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 다단한 것이라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죠. 다만 일종의 Key word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불안정 애착이라든가, 이분법적 사고라든가, 반복적인 욕구 좌절로 인해 내재화된 분노라든가... 그런 Key word를 방사형 원의 중심에 놓을 수 있도록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의뢰 사유를 꼼꼼히 확인해서 진단 가설, 역동 가설, 관계 가설 등을 세우는 것이 유용합니다. 이 내용은 이미 수 차례 포스팅을 한 바 있죠(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진단 가설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수검자가 호소하는 문제를 바탕으로 '진단 가설' 세우기'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단계. Key word 및 Key word와 1단계로 연결된 개념을 지지하는 검사 sign만 선택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어떤 수검자를 설명하는 Key word로 반복적인 성피해 트라우마를 찾았다고 가정해보죠. 당연히 트라우마랑 연결된 몇 가지 개념들이 더 있을 겁니다. 통제 불능의 자기 파괴적 행동이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정서적 지지 세력의 부재가 다른 하나의 연결 개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찾아낸 개념을 중심으로 이제 트라우마와 연결된 개념들을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찾아서 모으는 겁니다.
그렇다면 Key word를 지지하는 검사 sign과 Key word와 1차적으로 연결된 개념을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제외한 나머지 검사 결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과감하게 버립니다. 물론 넓은 맥락에서 보면 그 검사 sign들도 수검자의 특정 측면을 설명하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건 핵심적이지도 않고 의뢰 사유와 맞지도 않습니다(2단계에서 이미 의뢰 사유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는 과정을 거쳤으니).
위와 같은 과정을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면 어느 순간 자동적으로 최적의 검사를 선택해 실시하고, 의뢰 사유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하면서 Key word를 찾고, 그 Key word와 1차적으로 연결된 핵심 개념을 찾아서 그걸 지지하는 검사 sign들을 자연스럽게 선별하게 됩니다.
그러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 한결 손쉽죠. 정보의 홍수에 떠내려 가면서 허우적대는 일이 현저히 줄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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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덴 3에서도 몇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심리평가를 실시할 때 검사가 끝난 뒤 원자료를 늘어놓고 뒤적거리면서 퍼즐 맞추듯이 case formulation하는 것만큼 비효과적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임상가들이 여전히 이런 방식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한 5년 쯤 전에 의뢰 사유를 확인하고 가설을 설정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참조)이 있었죠.
그런데도 여전히
수검자가 호소하는 문제를 바탕으로 진단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생님들이 많더군요.
제가 볼 때 이 문제는
증상을 바탕으로 세운 '1차 가설'과 심리평가를 통해 검증해야 하는 '2차 가설(진단 가설)'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고,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밖에 나가는 것도 힘든 상태이며 어릴 때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되었고 최근에는 누군가 내 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호소하는 20대 여성을 평가한다고 해보죠
증상을 바탕으로 한 1차 가설(증상을 보았을 때 평가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가설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Social Phobia :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고 피하게 된다(당황스럽다, 불안하다?).* Avoidant PD :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람들을 피해 왔다(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 SPR, prodromal stage : 밖에 나가지 않고 최근에 누군가 내 욕을 하는 느낌이 든다(social withdrawal, idea of reference or auditory hallucination).* Adjustment Disorder, chronic state : 어릴 때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되었다(identifiable stressor?). * Delayed PTSD : 시선 공포가 있다(비난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guilty feeling?)
등등
1차 가설은 수검자의 주 호소(chief complaint)를 통해 세우는 것으로 숫자가 많아도 상관 없고 틀려도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가설을 많이 세울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어차피 가설 검증 과정에서 배제될테니까요. 1차 가설 설정에서는 정확성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가설이 포함되는 것에 치중하세요.
그런데 심리검사 결과를 갖고 이 많은 1차 가설을 몽땅 검증하려고 하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뿐더러 검증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해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단을 내리기 위한 2차 가설로 추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변별 진단을 위한 추가 정보를 수집하는 겁니다.
위의 보기로 다시 돌아가서
* Social Phobia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 그런지 낯선 사람들에게만 그런지(대상의 일반화 가능성 확인)* Avoidant PD의 경우 창피나 거절을 당한 과거 경험과 그런 경험의 반복 여부(지속성)* SPR, prodramal stage의 경우 persecutory ideation, auditory hallucination 여부(사고 장애 유무 확인)* Adjustment Disorder, chronic state의 경우 가정 및 학교 생활에서의 부적응 유무(malfunctioning)* Delayed PTSD의 경우 sexual history 및 eating problem 확인
등을 추가 면담, chart 및 clinical history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1차 가설 중 몇 개가 탈락하게 되고 좀 더 가능성이 큰 소수의 진단 가설(2차 가설)로 추려지게 되죠.
이제 추려진 몇 개의 진단 가설을 드디어 심리검사 결과를 통해 검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1차 가설을 검증하지 말고 일단 2차 가설로 한번 더 추려낸 뒤 심리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2차 가설만을 검증하시면 좀 더 효과적인 case formulation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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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justment Dis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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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oidant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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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ntifiabel str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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