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심리학회는 세부 워크샵 일정표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등록하라는 것(이미
2008년에 제가 한바탕 비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동안 전혀 개선되지 않았네요)에 이미 빈정상했고 중독심리학회는 학술대회 내용이 별로라서 어떻게 할까 고민 중에 정신병리연구회 하계학술대회에서 DSM-5 워크샵을 한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여 하루 휴가를 내어 다녀왔습니다. 이것으로 올해 임상심리전문가 연수 시간은 다 채웠삼~
원래는 DSM-5 워크샵만 들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시간이 1시간 30분 모자라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전에 하는 치료 사례 회의까지 신청해서 들었습니다.
장소가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강당이었는데 본관, 별관과 떨어진 별도의 건물이라서 그런지 조용한 게 마음에 들더군요. 워크샵이 열렸던 대형 강의실에 에어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내내 더웠던 것은 빼고요. 하루종일 부채질하느라고 지쳤습니다. ㅠ.ㅠ
우선 치료 사례 회의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4개의 강의실에서 각각 연속으로 2개의 사례를 진행했는데 책상을 원형으로 배치한데다 토론자가 일방적으로 comment하지 않고 청중을 사례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시도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이 효과가 있으려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도 충족되지 못해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히 망했습니다. 연수 평점 시간이 아니라면 저만해도 그런 치료 사례 회의에는 참석 안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참석자가 온통 사례 발표를 앞둔 수련 레지던트 선생님들뿐이고 전문가는 가뭄에 콩나듯이 하더군요. 이래 가지고 무슨 발표자에게 도움이 되는 노하우와 comment가 나오겠습니까. 둘째. 여전히 심리치료와 상담을 하지 않는,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을 토론자로 배치했더군요. 인력 pool이 부족한 건 알지만 그럴바에는 토론자의 수를 줄이고 대형 강의실에서 하더라도 질을 높이는 편이 낫습니다. 발표자와 수준 차이가 거의 없는 토론자는 이제 그만 좀 보고 싶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사례 발표는 그나마 이상한 치료 기법들을 적용하지는 않았더군요. 오히려 현장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사례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 때문에 발표자나 참석자나 참 지루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전문가랍시고 참석한 김에 이런저런 생각나는 점을 좀 많이 말했더니 나중에 혼자서 다 떠들더라, 아예 강의를 하더라는 뒷담화가 들려오던데 매우 불쾌합니다. 오죽 엉망이었으면 저같이 낯가림 심한 사람이 나서서 떠들어야 했는지에 대한 치열한 반성부터 해야 할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심리치료와 상담 수련을 간과하면 나중에 심리평가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상담심리전문가들이 병원 장면에 진출한 뒤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경고를 해도 귓등으로나 듣고 정신들을 못 차리니 원... 쯧쯧쯧...
오후에는 DSM-5에 대한 워크샵이 있었는데 3시간 30분으로 예정된 시간 내에 8명의 전문가가 20분씩 intensive하게 강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예정보다 30분이 더 걸렸지만 8개의 강의 모두 매우 훌륭했습니다. 특히 성격 장애 발표를 담당한 박준영 선생님의 강의는 아주 발군이었습니다. 부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핵심을 정확하게 짚더군요. 매우 좋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잘 하셨고요. 확실히 junior 전문가들이 대거 투입되니 에너지도 넘쳐서 전반적으로 워크샵에 기합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덕분에 DSM-5에 대한 기대가 듬뿍 생겼습니다. 자료집과 발표 자료의 슬라이드가 차이 나는 강의가 몇 개 있지만 워낙 꼼꼼하게 DSM-IV와의 차이를 잘 정리해 주셔서 자료집만 꼼꼼히 뒤져봐도 DSM-5의 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신병리연구회에서 이번 워크샵 자료를 온라인으로 공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직 최종 결과가 아니라서 내년 APA 학회가 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DSM-5를 공부하느라고 2013년이 정신없이 그러면서도 즐겁게 지나갈 것 같습니다.
아직 90% 정도만 결정된 상태라서 최종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럽게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의 분류와 진단 기준이 임상 현장의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바뀌었고 과잉 진단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진단에 필요한 기간을 대폭 늘리는 등의 깨알같은 노력도 꼼꼼히 기울였더군요. 각 장애의 severity를 평가하도록 한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아마 병원에서 평가만 담당하는 임상가들은 full battery에 의존해 평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DSM-5에 맞춰 진단하기 위한 새로운 평가 방법의 개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심리치료나 상담을 주로 하는 임상가들은 초기 적응기만 잘 넘기면 DSM-IV에 비해 업무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워낙 현장의 실태를 정확하게 반영해서 적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거든요.
dementia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점, MR의 진단에 더 이상 지능 지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점, 도박 중독이 충동 조절 장애 중 유일하게 중독 장애로 이동한 점 등도 새로웠습니다.
빨리 DSM-5로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DSM-IV는 빈틈이 너무 많은 진단 편람이기 때문에 상담을 할 때나 supervision을 할 때마다 적잖이 짜증나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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