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내용은 2015년 4월 10일의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3가지' 포스팅에 기반하여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의 원인을 추론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저는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3가지로
1. 버리겠다는 협박
2. 상처받은(실패한) 자녀 탓하기
3. 편애의 노출
을 들었습니다. 이 3가지 부모의 실책은 워낙 중요하기도 하고 또 상담 현장에서는 너무나 흔히 만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내담자의 어떤 문제를 봤을 때 이 3가지 원인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할까요?
* 버리겠다는 협박 : Rejection Fear
: 대인 관계 문제를 호소하는 내담자 중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어릴 때의 경험(실제가 되었든, 가상의 위협이 되었든 간에)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과도한 착취를 감수하는 등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받습니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 아이일 때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계속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 것이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평등한 대인 관계 상황을 참고 있는 내담자가 있다면 어렸을 때 primary caretaker로부터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 이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건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 상처받은(실패한) 자녀 탓하기 : Basic Trust
: basic trust는 성과나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만으로 수용되고 인정받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할 때 형성되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나름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실패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해 비난을 받게 되면 과정이나 노력이 아닌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고 결과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결과 지상주의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의도야 당연히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그런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실패한 결과에 대해 비난받은 자녀는 자신이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수용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 당사자가 무려 자신을 낳아준 부모이므로 나중에는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됩니다.
* 편애의 노출 : Low Self-esteem
: 자기 혼자 독점하던 사랑을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동생을 돌보도록 강요받는 경험을 하거나 외모, 성적 등 자기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수행을 보이는 형제자매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건 누구에게도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다른 형제자매를 자신보다더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받는 상처는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특히 부모가 편애를 할 때의 이유란 게 대부분 외모, 기질, 성품처럼 개선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뛰어난 성적처럼 따라하기 매우 어려운 것들이 많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에게 큰 상실감과 좌절을 맛보게 합니다. 이런 편애가 지속되면 당사자는 자신이 원체 못났으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자기 비하, 자기 회의적 사고와 무력감에 빠지게 되어 객관적으로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3가지 행동과 상담에서 내담자가 흔히 호소하는 문제를 짝지어서 설명했지만 자세히 보면 rejection fear, basic trust, low self-esteem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존감이 낮은 내담자가 외동이라면 부모가 편애의 노출이 아닌 실패한 자녀 탓하기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반복적인 과도한 책망도 낮은 자존감 형성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부모의 잘못된 행동과 내담자가 보이는 문제가 일 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담자가 어떤 문제를 호소했을 때 이러한 영역들을 점검해 보는 게 필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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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책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출판이 되었죠. 그동안 월덴 3에서 소개한 책들만 정리를 해 보면,
1.
몰입의 즐거움
2. 몰입의 재발견 <- 오늘 소개할 책
3.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4.
몰입의 경영
이렇게 됩니다.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가 다분히 일반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책이라서 그런지 '몰입의 즐거움'의 확장판인데도 쉽게 읽힌다면 그 둘 사이에 낀 이 책은 조금 난도가 있는 편입니다.
전작인 '몰입의 즐거움'을 읽고 난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옳거니, 몰입이 정말 중요하구나. 그런데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몰입의 기쁨과 만족을 끌어내면서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걸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가능은 할까?'
이 책에서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몰입을 방해하는 장막과 힘들을 우리 내면에서 기만하는 장막(유전 명령, 문화, 자아의 요구)과 외부에서 작용하는 힘(착취, 기생, 인간의 창조물)으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진화를 통해 미래에 추구해야 할 자아상으로 복합성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자아인 초월적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몰입의 즐거움'에서 이야기하는 몰입이 개인 수준의 몰입이라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몰입은 인류 진화의 수준까지 넓힌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말하는 이 책의 논제는 '진화 과정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일부가 되는 것이 현재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과정에서 매순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몰입의 즐거움'과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에 비해 조금 어렵지만 지적인 자극의 강도는 더 강해진 책입니다. 좀 더 학문적으로 몰입을 공부하고 싶은 심리학도라면 이 책이 더 맞을거라 생각해요.
각 장이 끝나면 충분히 이해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자기 진화를 위한 질문이라고 썼지만) 질문이 제공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습까지 되는 책입니다.
제가 추천하는 몰입(flow) 관련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책을 읽는 순서는 1 -> 3 -> 2 -> 4(이건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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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월적 자아를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삶을 즐겨야 한다.
2. '복합성'을 더해야 한다.
3.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
4.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5.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미래 건설'에 힘을 쏟아야 한다.
* 기대와는 달리 '플로우'는 여가나 놀이 시간처럼 긴장을 풀 때보다 어떤 어려운 작업,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한계를 끌어내야 하는 작업에 매달릴 때 일어난다. 사실 플로우 이론의 가장 중대한 공헌은 심리학적 견지에서 일과 놀이가 반드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 플로우의 첫 번째 징후는 명확하게 규정된 목표에 주의가 집중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지루한 일조차도, 기술을 끌어내야 할 상황을 만들어 목표를 명확히 하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질 때가 있다.
* 자유의지에 따라 사는 사람은 외부 요인이 미래를 절대적으로 결정한다는 논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 우연과 필연은 고민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유일한 통치자다.
* 의식이라는 제 3의 결정 요인은 우리를 안전으로도, 파멸로도 이끌 수 있다.
*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들의 총합이 곧 우리의 인생이다.
*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왜 그런 방식으로 느끼고, 무엇이 우리 행동의 동기가 되는지 평생 모르는 채 살아간다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즉 밀도 있는 경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 마음은 정돈된 정보가 있어야만 정돈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명확한 목표가 있고 피드백을 받을 때만 마음은 잘 작동한다.
* 기술과 집중이 필요한 활동을 하게 되면 마음이 무질서에 사로잡혀 광적으로 뛰어다니는 현상을 예방할 수 있다.
* 어딘가에 집중하지 않을 떄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십중팔구 우울한 이유
1. 부정적인 가능성이 언제나 긍정적인 가능성을 압도한다. 우리 삶에는 한마디로 '나쁜' 일이 '좋은' 일보다 많이 일어난다.
2. 그런 부정적인 성향이 적응에 유용하기 때문. 단 '적응'이라는 말이 생존 확률의 증가를 의미한다고 가정할 때.
* 논리도 과학적 담화도 의사소통에서 일어나는 비틀림을 피할 수는 없다. 언어로 현실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고, 일반화는 모두 의심스러우며, 사람 사이에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 집단과 함께 생활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사람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외향적인 선조(살아남은 자들)의 후예이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쾌락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이제 사회성도 우리 시대에는 과도해지고 해로워지기 쉽다.
* 쾌락과 즐거움(혹은 플로우)의 차이는 이렇다. 쾌락은 유전으로 프로그램 된 필요(먹기, 마시기, 쉬기, 성행위, 사교성 등)에 항상성이 깨어질 때 그것을 되찾아주면 발생하는 반면, 즐거움은 대개 유전으로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일에 기술을 활용한 결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이 커질수록 근본적인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온 지구를 자신의 세계로 보는 사람만이, 유해물이 어디에 폐기되든 그것을 해롭다고 여긴다.
* 자신에게 왜 어떤 충동이 일어났는지, 왜 어떤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정신력을 통제하는 첫걸음이다.
* 유전자가 우리 몸을 번식 도구로 활용하듯이, 문화 역시 존속과 성장을 위한 도구로 개개인을 활용한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문화는 우리에게 그 우월성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화가 잘된 사람이란 국가나 당파, 종교를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려는 사람이다.
* 자국 문화가 제시되는 현실 묘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대중매체가 세상을 '문화의 영향력에 따라' 제시한다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속을 확률은 줄어든다.
* 일단 자아가 존재하게 되면, 그 최대의 목적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 좀 더 작게 보자면, 만족을 모르는 자아는 거의 모든 고대 집단에서 사람들의 정신 에너지를 집어삼켰다.
* 자기성찰 의식이 출현하면서 자아가 자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재산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아가 외부 상징물과 자신을 동일시할수록 더욱 약해진다는 점이다.
* 사람이 정신력을 가장 많이 투자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면 그 사람의 자아를 나타내는 핵심적 관념이 드러난다.
*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나 미래와 조화롭게 사는 사람들, 한마디로 소위 '행복한' 사람들은 보통 스스로 만들어낸 원칙에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 인간사에서 밈이 더 큰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타인을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
* 타인의 야망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 현 상태가 자연스럽고 옳으며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은 우리를 지배하는 이들에게나 이로운 일이다. 우리에게 이로운 일은 그것이 늘 옳지는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 심리학적 차원에서 기생이란 타인의 정신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자다. 직접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약점이나 부주의를 악용하는 방식으로 다른 존재의 에너지를 빼앗는 존재다. 기생의 형태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데, 그 가운데 일부만 알아두어도 부지중에 다른 생명을 편안하게 해주느라 우리 삶을 허비하지 않는데 도움이 된다.
* 억압은 저항하고 기생은 무력화할 수 있지만 각각의 정신 에너지를 착취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의태이다.
* 문제는 창시자의 손에서 떠난 후에도 밈이 우리 목적에 부합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 한번 밈이 확립되고 나면 우리 마음에 타성이 생겨서 필연적으로 쓰디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 위대한 작품이 매우 적은 까닭은 우리가 예술적 밈 감상에 충분한 정신 에너지를 투자하지 못하거나 그러려고 하지 않기에 소수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밈을 우리 목적에 맞게 활용하지 않는다면, 대개 밈이 주도권을 잡고 자기 목적에 우리를 이용한다. 물론 밈은 자기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도 대부분의 경우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 진화의 첫 번째 원칙은 '유기체는 모두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자신을 증식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생존하고 증식하기 위해서, 유기체는 외부 에너지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세 번째 원칙은 앞의 두 원칙에서 비롯된다. '유기체는 모두 주변 환경에서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흡수하려고 할 것이고, 자기보존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할 것이다'. 네 번째 원칙부터는 드디어 진화의 역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주위 환경에서 필요한 에너지를 (다른 유기체보다) 더 많이 얻어낼 방법을 찾아내는 유기체는 더 오래 살고 복제본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긴다'. 이는 또 다른 중요한 원칙으로 이어진다. '유기체가 서식지에서 지나치게 잘 에너지를 흡수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환경과 자신마저 파괴하기도 한다'. 진화의 마지막 원칙은 이것이다. '대개 유기체의 복합성이 증진되는 방향, 즉 분화와 통합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진화를 끌어나갈 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 서로 다른 종교, 정체, 민족, 가치관, 철학 사이의 다툼은 모두 밈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사례들이다.
*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사랑과 출산이 자유롭고 마음대로였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그만두자.
* 가장 자주 언급되는 플로우의 한 가지 특징은, 자신에 관해 혹은 주위에서 찾아오는 다양한 기회를 활용할 가능성에 관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흥분감이다.
* 플로우 경험의 특징
1. 명확한 목표, 즉 목적이 뚜렷이 정의된다. 즉각적인 의견(피드백), 즉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다.
2. 단호하게 행동할 기회가 많고, 그렇게 할 기회와 자신의 능력이 맞아 떨어진다. 다시 말해 도전해야 할 일에 필요한 능력과 그것에 도전하려는 개인의 기술이 잘 맞는다.
3. 행동과 자각이 하나로 융합되어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된다.
4.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한다. 하는 일과 무관한 자극들이 의식에서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이 일시적으로 없어진다.
5.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6. 자의식 상실, 자아 경계 초월, 성장하는 느낌, 더 큰 존재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이 든다.
7. 시간관념이 바뀌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8. 경험 자체가 목적이 된다.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그 자체로 몰두할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 우리가 그것을 즐기는 까닭은 그것이 잠재력을 드러내고 한계를 배우고 경계를 넓히게 해주는 기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기회는 다름 아닌 '자신과의 소통'이 함축하는 바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플로우는 진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유전 명령에 따라서 과거에 '좋았던' 것들만 계속 추구하게 된다.
* 자신을 덜 의식하면 지금 하는 일에 정신 에너지를 더 집중할 수 있다.
* 사람은 더 흥미로운 기회를 인식하는 기술이 부족하면, 단순하고 잔혹한 길로 퇴보하게 마련이다.
* 플로우가 없으면 일어나는 일
: 그런 상황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이 쓸모없거나 파괴적인 활동에 빠져든다는 점이다. 다양한 약물에 중독되는 현상은 분명 인위적인 수단으로 최적 경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반복해서 경험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유도된 플로우는 2가지 면에서 위험하다. 첫째, 그 개인의 기술을 향상시켜주지 않고 따라서 복합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둘째, 생리적으로 중독되면 개인과 집단에 막대한 엔트로피를 야기한다.
* 플로우를 평가하는 방법은 ESM(경험표집방법)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를 펼쳐 보이는 것'이라는 점이 진실이라면, 플로우가 자유시간보다 업무시간에 더 자주 나타난다는 점은 이치에 맞는다.
* 온갖 종류의 영성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인간 의식에서 엔트로피를 줄이려고 한다는 부분이다.
* 일상의 경험을 의미 있고 목표 지향적인 활동으로 바꾸는 능력은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그 어떤 문화적 게임도 착취나 악용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덧. 제가 좋아하는 김우열 번역가의 담백하고 깔끔한 번역 덕에 조금은 힘을 빼고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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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사회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가 쓴 '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Planet of Slums, 2006)'를 북 크로싱합니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소개글'을 참고하시고요.
슬럼에 대해 제 지식의 지평을 확 넓힌 책입니다. 신자유주의와 슬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얼핏 딱딱해 보이지만 의외로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 재생지를 사용해서 그런지 들고 다니기에 가볍고요.
좌파적 성향(?)이 있는 모든 분께 추천하고 건전한 보수께도 추천합니다.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dung님'이 소장하던 책을 북 크로싱하는 것입니다. dung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다른 분들도 저처럼 즐거운 독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 월덴 3의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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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초에 다음 아고라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킨 글이 있었는데 바로 취업 관련 성차별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칼퇴근에 야근 안하겠다고 답한 여성 지원자는 탈락하고, 야근을 불사하겠다고 한 남성 지원자는 합격한 것을 놓고 여성들의 자세 문제를 성토한 글이었고, 항상 그랬듯이 갑론을박 게시판이 온통 시끄러웠습니다.
평소에 정치, 종교, 성차별에 대해 논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그러는가보다 하고 지나갔습니다만 우연히 제 생각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분의 글을 읽고 김에 제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요즘의 여성 운동을 보면 엉뚱한 지점을 포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여성들은 남성 위주의 성차별적인 사회를 개혁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제도를 공격해야 하는데 남성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합리한 제도를 만든 것이 남성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제대로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은 방법일지는 몰라도 현명한 방법은 아닙니다.
의도와 목표는 좋은데 방법이 틀렸습니다. 여성들의 생각대로 성차별적인 사회 제도를 남성이 만들었다고 해도 이미 남성들은 불합리성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 제도에 익숙해진 상태이고 반성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에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변화에 저항하는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담을 받는 내담자들도 정작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변화에 저항합니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남성들도 그런 제도의 피해자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성에 대한 공격은 반발을 살 수 밖에 없고 원하는 목적을 이룰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제도가 만들어 놓은 달콤한 꿀단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뿐입니다. 불리하면 남성을 공격하고(제도가 아니라), 유리할 때는 여성이 가지는 이득(남성이 돈을 내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것, 힘든 일은 여성이기 때문에 빠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등)을 취하는 자세는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얼핏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실상은 문제 의식을 가진 남성마저도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잠시 잠깐의 달콤함에 취해 여성 착취를 정당화 할 제도와 문화와 가치관을 공고화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힘을 보탠다면 결국에는 꿀단지에 빠져 죽는 파리꼴이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려면 달콤한 꿀부터 거부해야 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열외되는 일에 편리함을 느끼고 안주하지 말고 분노해야 하고, 동등하게 대우해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남자들이 그동안 여자들이 알게 모르게 누려왔던 특권을 내세우면서 변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군대 문제도 그렇습니다. 해당 사항이 전혀 없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군가산점에 목 매고 흥분하는 이유는 기득권을 빼앗긴데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형평성이 없다고 느끼는데 대한 분노의 감정인데, 별로 관계도 없는 출산 이야기나 군대 환경 개선이라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꺼내면 말문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병역은 필요악이며 동시에 성차별을 공고화하는 무기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성들이 우리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겠다고 들고 일어나 공동 병역을 요구하고 주장하면 실제로 여성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게 되느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이 문제는 훨씬 더 빨리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효과를 거두는 전술입니다. 성차별은 이미 합리성, 형평성, 대의명분 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차원에 있기 때문에 거대 담론 차원의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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