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의 심리평가 결과를 보면 TCI 자율성 점수가 낮은 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율성, 연대감이 성격 미발달 상태를 반영하고 특히 자율성의 설명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성격 미발달 문제가 기저에 깔려 있는 내담자일수록 단기 상담으로 접근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율성이 낮은 내담자의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제가 우리나라에서는 단기 상담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면 대학교의 학생상담센터를 방문하는 학생들을 평가하면 특이하게도 명문대에 재학 중인 학생일수록 TCI의 책임감 하위차원이 낮은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들 중 자율성이 낮은 경우야 흔한 일이지만 왜 명문대 학생일수록 책임감이 더 낮을까요?
명문대 학생이라면 엄청난 경쟁을 뚫은 우수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이므로 일반대 학생에 비해 잘 적응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TCI 자율성 성격 중 책임감은 '선택', '조율', '책임'의 3요소로 구성됩니다. 자신의 태도, 행동 등을 본인의 의사결정에 의해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과정을 '조율'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결과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임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이죠. 이 3요소가 유기적으로 잘 진행되어야 책임감이 발달하게 됩니다.
문제는 명문대 학생일수록 책임감의 첫 번째 요소인 '선택'의 권한이 자신에게 없습니다. 우수한 지적 능력과 재능으로 인해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고 본인의 기질과 적성에 맞는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원하거나 요구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선택한 길이 아니니 결과가 어떻든 선택을 강요한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임감 점수가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원하는 걸 성취하기 위해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저항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적이 있는지 물어보는 게 유용합니다. 명문대생일수록 그런 경험이 전무한 걸 알게되실 겁니다.
자율성은 저항(방종 말고)의 에너지를 먹고 자라는 겁니다.
덧. 그럼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는 명문대 학생들은 어떨까요? 이 글의 내용과 반대로 책임감 하위차원만 유독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MMPI-2의 Re 척도가 동반 상승하는 경우도 많고요. 과도한 책임감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건 이것대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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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죠.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으나 회사를 그만두는 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는 배우자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으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건 니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는 부모
얼핏 보면 본인이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도록 배려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에게 떠미는 것일 뿐입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든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것이든 일신 상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책임은 선택한 본인이 진다고 해도 당연히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놓친 것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배우자나 부모 등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니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선을 긋는 건 이러한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보다 관계에 훨씬 더 해로운 짓입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결국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강압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라면 해로운 짓임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반대한 결과(그것이 무엇이든)를 책임질 여지를 두고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지지를 하지 않는 건 '너는 내가 원하는 걸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그 책임은 너 혼자서 져야 할거야'라고 손절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걸 암묵적으로 강요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교활한 속셈이 깔린 행동이죠.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만약 순수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면 두 가지 옵션이 뒤따랐을 겁니다. 첫째, '내 생각에는 이러저러한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진심어린 조언, 둘째, '만약 내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라는 지지 표명.
그러니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훨씬 더 성숙한 행동이고 관계를 유지하는데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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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라도 일단 도박에 중독되게 되면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되는 건 맞습니다. '거짓말'과 '무책임'은 도박 중독의 증상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도박 중독자들이 하나같이 무책임한 사람들일까요? 글쎄요.
다른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보죠.
많은 도박 중독자들의 재발 요인들을 추려내다보면 공통된 이유 몇 가지로 묶이게 되는데 그 중 하나는 일상생활을 하다가 조금 모자라는 돈을 도박으로 메우려다가 다시 도박에 빠지는 겁니다.
조금 모자라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도박 빚 이자가 조금 모자라거나, 자녀의 학원비가 조금 모자라거나, 갑자기 경조사가 생겼는데 축의금을 낼 돈이 조금 모자라거나.... 어쨌거나 현재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살짝 부족하지만 대박이 아니더라도 도박으로 한번만 따면 금방 메울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작은 모자람입니다.
만약 도박 중독자가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맞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냥 배를 째면 됩니다. 이번 달 이자쯤이야 다음 달로 넘기고,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학원비도 한 달 밀리게 하고, 축의금은 그냥 말로 때우면 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도박으로 인해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피해를 주고 상처를 남겼는데 이것만큼은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보고 싶은 책임감이 마음 한 구석에는 남아 있는거지요. 그 책임을 지는 방법이라는게 절대로 책임질 수 없게 만들고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도박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작은 책임을 지려다가 더 무책임하게 될 수 있는 게 도박 중독입니다.
그러니
도박이라는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사소한 무책임은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당분간은 참아야 합니다.
도박 중독은 무책임의 병이지만 치유 과정에서는 사소한 무책임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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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을 치유할 때 필요한 게 많지만 콕 집어서 두 개만 꼽으라면 '매사에 진실하라는 것'과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것', 이 두 가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도박 중독 치유 방법이 이 두 가지 기본 원칙에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죠.
이 두 가지 원칙은 '거짓말'과 '무책임'이라는 도박 중독의 가장 큰 폐해 또는 증상과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이 중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것'과 관련됩니다. 과도한 도박으로 인해 가족 및 타인에게 재산 상의 손실을 입히고 그들의 믿음을 저버린 책임을 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진솔한 사과와 함께 용서를 구하는 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도박 중독자는 어떤 순서로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안에서 밖의 순서로 해야 합니다. 감정의 짐은 안에서부터 밖으로 덜어내야만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박에 빠져 양심을 속이고 변명을 늘어놓고,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방치한 것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 다음이 배우자나 자녀와 같은 현재 가족 구성원입니다. 그 다음이 원 가족과 친척 순입니다. 그 다음이 친구를 비롯한 지인, 마지막이 함께 일했던 동료입니다.
그런데 도박자는 반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며 남인 채권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용서를 빌고, 그 다음은 직장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상사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회적 매장을 당하지 않으려고 돈을 빌린 친척을 찾아가 입막음을 하고, 그 다음이 마음의 빚을 덜겠다며 부모님을 찾아가 사죄합니다. 그러면서도 배우자와 자녀에게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기 때문에 자신을 이해하고 언젠가는 받아줄거라고 합리화하면서요.
중독자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건 의외로 자기 자신입니다. 온갖 고초와 마음 고생을 했으면서도 그게 책임을 지는 방법이라고 착각하면서요. 아닙니다.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위로해야 합니다.
예전에 강북삼성병원의 신영철 선생님이 처음으로 중독자를 만나면 가장 먼저 이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도박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세요.
"도박 때문에 고생많았지?, 정말 미안해, 내가 할 말이 없다.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사과를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 치유의 힘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잊지 마세요. 사과와 용서는 안에서 밖으로 하셔야 합니다. 그 반대 순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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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된 주제 중 하나로 sociotropy-autonom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두 개념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 sociotropy : 대인 관계가 중요한 성격 특질
* autonomy : 독립성이 중요한 성격 특질
그 유명한 Aaron T. Beck이 이 congnitive-personality contructs를 측정하기 위해 Sociotropy-Autonomy Scale(SAS)을 만들기도 했지요. 물론 우울 장애에 대한 risk factor로써 살펴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 효능감이 높고, 목적 의식이 강하며,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경향도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향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 이들을 독단적이거나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향 때문에 이기적이라는 오해를 왕왕 받기도 합니다만 자율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며 그 과정을 자신이 통제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획득하게 될 확률이 큰 것이죠.
이기적인 사람 중에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는 있지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질-성격 검사인 TCI를 빌어 설명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이냐의 여부는 자율성 차원보다 연대감 차원이 더 많이 좌우합니다.
자율성 차원이 high 수준일 때 연대감 차원이 high라면, 자기 초월 차원의 정도와 상관없이 HHH(창의적인), HHM(성숙한), HHL(조직화된) 성격 경향을 보입니다. 모두 이기심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 유형이죠. 하지만
연대감 차원이 low라면 HLH(광적인), HLM(괴롭히는), HLL(독재적인) 성격 경향을 나타냅니다. 세 성격 유형 모두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만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TCI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반영하는 성격 차원은 자율성이 아니라 연대감입니다.
사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통제받는 걸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가 명령받는 걸 워낙 싫어하니 자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지도 잘 이해하거든요. 그래서 아랫사람이 알아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거기에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까지 낮은 사람이라면 나만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마음까지 강하겠지요(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율성이 강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기적이라는 사회의 편견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TCI의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이 극도로 높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글마저도 신경 안 쓰시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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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그렇게 내 맘을 몰라주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내가 뭘 원하는지 정말 몰라?"
"그런 건 좀 알아서 하면 안 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 아닌가요?
모두 나에게 마음 읽기(mind reading) 할 것을 요구하는 말들입니다.
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 읽기는 지극히 편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시콜콜 일러줄 필요가 없으니 에너지가 절약되고 무엇보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 내가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만 하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마음 읽기를 잘못한 상대방을 마음껏 책망할 수도 있으니 더 없이 편리한 수단이 아닐 수 없죠.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개는 힘이나 권력을 잡은 쪽에서 행사하는 경우가 많고 상대방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곤 합니다.
예전에 어느 포스팅에선가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 읽기를 요구하는 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거기에 선택까지 안 하면서 열매만 따 먹겠다는 심보에서 파생된 아주 못된 버릇입니다.
마음 읽기는 대인 관계에 해롭기 그지없는 방법입니다. 대인 관계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상당수의 원인이 바로 마음 읽기입니다.
그러니 마음 읽기는 요구도 말고 응하지도 마세요.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 읽기를 원하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하세요.
저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해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일부러 모른 척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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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YES24
이 책은 1984년 내면아이와 성인자아의 연결을 통해 심리 문제를 해결하는 '내면적 유대감(inner bonding)' 치유 과정을 에리카 초피크 박사와 공동으로 최초 개발한 Margaret Paul 박사가 썼습니다.
원래 이 분을 유명하게 만든 책은 'Healing Your Aloneness'로 우리나라에는 '내 안의 어린아이 : 잃어버린 내면아이를 만나는 자기 치유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바 있습니다.
이 책은 'Healing Your Aloneness'를 읽은 뒤 내면아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성인자아가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독자들의 빗발같은 성화에 보답하고자 나온 후속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면아이에 대해 좀 더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한 분들은 Healing Your Aloneness를 먼저 읽으시는 것이 좋고 임상/상담 장면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마가렛 폴 박사가 주장하는
내면적 유대감 형성을 통한 치유라는 건 대부분의 탁월한 치료적 기법이 그렇듯이 원칙적으로 간단합니다.
성인자아로서 하는 '생각'과 내면아이로서 느끼는 직관적인 '느낌'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택'과 '책임'을 인식하고 연결하는 것과 비슷해서 좀 놀랐습니다.
이 책은 앞서 출판된 'Healing Your Aloneness'를 읽지 않은 사람도 내면아이 치유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졌고 내면적 유대감 형성을 해 나가는 과정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상담의 초보자라도 쉽게 개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배우자, 부모, 자녀, 친구, 동료와의 관계를 각각 풍부한 사례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실무에서 활용하기에도 좋습니다.
특히 이 책은 각 장의 주요 개념을 장이 끝나는 부분에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하고 있어 독학을 하기에도 편리합니다.
내면아이 치유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하는 명저입니다. 시중에 내면아이 치유법을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이 갑입니다.
중독자를 상담하는 상담자들은 반드시 읽어보세요.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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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아이'란 우리의 인격 중에서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부분으로, 감정을 우선시하는 '직감적인' 본능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본래 모습이자 핵심적인 자아, 타고난 인격인 셈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내면아이와 어린 시절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의 유치함이 아닌 '순수함'을 말한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내면아이의 연약함, 직관력, 경이로움, 상상력, 타고난 지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쇠퇴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 '성인자아'란 논리적인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현실 세계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다. 즉 우리의 지성적이고 우뇌적 부분이며,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인 셈이다. 성인자아는 존재보다는 행동, 경험보다는 행동과 관계가 있다. 성인자아는 우리의 인격 중에서 후천적으로 배운 부분에 해당한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의 목적은 잘못된 믿음을 없애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믿으며 살아온 믿음들, 수치심을 주며 자신을 제한하는 잘못된 믿음에 대해 의심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의 3단계
- 1단계 :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불편함이나 갈등을 인식하는 것
- 2단계 :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 3단계 :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 자신의 감정과 단절되면 타인에게도 단절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단절을 더욱 더 고조시킨다. 이렇게 내면의 자신, 즉 내면아이와 단절되면 자신의 감정과 연결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 사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 대부분이 '성숙하고 적절하며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행동이 뒷받침될 때만 의미가 있다.
* 내면아이가 성인자아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자신이 사랑스럽지 못하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성인자아가 자신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의지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의존이다.
* 의존의 두 유형
- 내면아이가 항상 '남의 시중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
- 사랑을 베풀지 않는 성인자아가 '남들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하는 경우'
* 모든 종류의 의존은 자신의 내면 및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서 갈등을 지속시키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가장 어려운 단계는 마음을 열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는 부분이다.
* 배우려는 의도에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모든 감정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기꺼이 고통을 느끼려는 의지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에서는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한쪽으로 치워둔다. 판단이 유대감 형성 과정과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대감 형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내면아이가 침묵을 지킨다면 이유는 2가지다. 성인자아가 자신을 살펴보고 알아가려는 의도가 아닌 방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경우와 내면아이가 아직 당신의 의도를 믿지 못하는 경우다.
* 내면아이가 되어 말할 때는 인형을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선 인형의 얼굴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고 가슴에 안은 상태에서 숨을 들이마신다. 내면에 의식을 집중하면서 마치 아이가 된 것 같은 상상을 하라. 인형이 당신의 내면아이가 되는 것이다.
* 내면아이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나면, 다시 성인자아의 역할로 돌아와 아이를 위로해줘야 한다. 가슴에 품었던 인형을 안아 올려서 인형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려라. 사랑의 마음으로 인형을 바라보면서 내면아이에게 그 아이의 감정을 이해했다고 알려야 한다. 또한 내면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다.
* 우리는 여러 고통으로 힘들어지면 상담가, 친구, 성직자, 알코올 중독자 모임 등 외부에서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 삶을 힘들게 하는 잘못된 믿음 6가지
- 나에게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
-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무력하다.
-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내 감정보다 중요하고, 나는 그들의 감정에 책임이 있다.
- 나는 다른 사람이 가지는 나에 대한 생각과 느낌, 나를 대하는 방식을 통제할 수 있다.
-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원할 때는 나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 나는 고통, 불편함, 두려움, 상처, 슬픔, 타인과의 단절, 지루함, 실망, 수치심,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
*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기준은 그 행동을 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드느냐가 아니라, 그 행동을 마친 결과 자신에게 어떤 기분이 드느냐다.
* 진정한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있는 기분, 일체감, 순조롭게 흘러가는 느낌 등이다. 이런 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 바로 자유다. 기쁨의 확실한 증표로는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능력도 있다.
*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가치와 사랑스러움을 스스로 인정하는 방법이다.
*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4가지 방식
- 물질, 활동, 사람에 대한 중독
- 노골적인 통제.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이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 은밀한 조종. 칭찬, 보살핌, 친절함, 유혹 등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거나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것을 말한다.
- 저항
* 의존의 기본이 되는 것은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단절에서 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이다. 이 둘이 단절될 때 의존적인 사람들이 모여 의존적인 관계를 만든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 이상에 중독되어 있는데, 의존적인 관계는 서로의 중독을 더 부채질한다. 의존적인 관계는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에 대한 책임을 저벼릴 때 일어난다. 의존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2가지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첫 번째는 자기애적인 사람 혹은 남의 시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공감적인 사람 혹은 남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다.
* 성인자아와 내면아이가 연결되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이 아니라 내면적인 감정이다.
* 자존감을 쌓기 위해 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면아이를 위해 실제로 행동해야만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
* 누군가 자신을 사랑스럽지 못하게 대할 때 참는 것은 상대에게도 절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 부모님께 베푸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고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두려움, 의무감, 죄책감에서 부모님에게 베푼다면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 적절한 한계를 설정해주는 성인자아 없이 버려진 내면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감정적, 성적, 신체적으로 학대할 수 있다. 즉 자녀에 대한 아동 학대는 적절한 한계를 만드는 성인자아의 부재로 버려진 내면아이가 분노에 휩싸일 때 일어난다.
* 자녀들이 말을 잘 듣게 만드는 법을 물어보러 상담실을 찾는 부모가 많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을 변하게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녀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내면아이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자녀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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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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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자가 어떤 말을 하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도박 중독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고, 그만하라고 가족들이 말릴 때 귀담아 듣지 않은 것도 자신의 잘못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도박을 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테니 제발 도박만 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읍소합니다.
얼핏 보면 자신의 도박 문제를 인정하고 치유가 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가 갈등 하나 없이 변화 단계 중 준비 단계나 실행 단계에서 곧바로 출발하는 도박자는 매우 드물거든요.
오히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면 납작 엎드려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유형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자기 고백에는 잘못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상담자에게 의존하고 자신은 편하게 묻어가려고만 하죠. 의존 대상이 가족에서 상담자로 바뀐 것 뿐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도박자는 제 시간에 상담에 오고, 상담도 열심히 하지만 재발이 잦으며 재발을 하고 나서는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동시에 다시 열심히 노력할테니 도와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도박 문제에 대한 진지한 수용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도박 결과를 깊이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발이 반복되고 끝내는 지쳐버린 가족이 포기하는 걸로 상담이 끝나고 맙니다.
이런 도박자일수록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치유 초반부터 한계 설정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의사 결정부터 자신이 직접 내리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극도의 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담을 아무리 오래 해도 치유의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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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 말은 다름 아닌 가족, 특히 배우자가 도박 중독자에게 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모든 배우자가 도박자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배우자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하거나 직접 행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말이 옳은 것도 아니고 도박 중독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도 아니지만 그만큼 도박 중독으로 인해 가족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짧은 말에는 도박 중독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말을 하는 가족은 도박 중독이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박 중독자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니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도박 중독이 죄라는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도박 중독이 아닌 도박 중독자를 원인으로 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박자를 공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박 중독의 치유는 도박자와 힘을 함쳐 도박 중독을 공격해야 가능한데 도박 중독을 죄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런 협동이 불가능해집니다.
둘째, 이 말을 하는 가족은 상호 의존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당신이 도박에 중독되어 내 삶을 망가뜨린 만큼 나도 당신의 삶을 좌지우지해야겠고 당신은 그걸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인데 얼핏 자신이 통제권을 가지겠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택과 책임에 기반한 자립은 점점 더 어렵게 됩니다.
이 말은 결국 내 인생은 도박자인 당신에게 달려 있고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절대로 나 스스로는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없다는 의존을 고백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말을 하는 가족은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 나도 당신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말이며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보복의 심리에 기반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보복한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을 뿐입니다. 이 문제는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용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죄인이니까 항상 나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내 말대로 해야 해'
이 말에 집착하고 매달릴수록 가족 본인의 치유와 회복은 점점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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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이 병이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도박 중독은 엄연히 미국 정신의학회 진단편람(DSM-IV, 1994)에 등재되어 있는 충동 조절 장애의 일종이니 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것이 도박 중독자의 상습적인 거짓말과 무책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족의 고통감을 덜어주므로 이롭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도박 중독을 병이라고 보면 도박자에게 낙인 효과로 작용해서 치유를 포기하고 자포자기할 위험성이 있고 또 중독의 공통 특성 상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도박자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부적응적인 행동의 원인을 병의 탓으로만 돌리면서 오히려 회복을 저해한다고 강변하는 쪽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충적인 관점에서 가족에게는 도박 중독이 병이라고 설명하는 편이고 도박자에게는 굳이 병적 도박이니 충동 조절 장애의 일종이니 하는 진단을 붙이는 것이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도박 중독이 병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한 도박자의 책임은 없지만 치유의 길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죠.
누구는 도박에 중독되고 누구는 절대로 도박에 중독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도박 중독을 치료하는 임상가도 도박에 중독된 임상 사례가 보고되고 있고 남녀노소 어느 누구도 도박 중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절대로 도박에 중독되지 않을거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박에 중독된 것은 도박자의 자유 의지가 아니며 그렇다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도박자의 마음과 달리 어쩔 수 없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그 가운데 도박자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따름이죠. 이건 도박자에 대한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해 도박자보고 책임지라고 몰아붙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도박자가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 해도 여전히 치료를 받고 도박의 늪에서 빠져나와 회복의 길로 나아갈지에 대해서는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온전히 도박자의 자유 의지에 달린 것이니까요.
도박 중독자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도박 문제가 별 것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계속 멸망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밀어넣든지,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고 자신의 참된 인생을 찾겠다고 결심하든지 말이죠.
그 선택은 온전히 도박자의 책임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도박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옳은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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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박 중독자와 그 가족을 상담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몇 가지 깨달음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선택과 책임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어른이 되라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곤 합니다. 주로 철없이 구는 사람들에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법에서 정한 성년이 되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어르신들 말씀처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아님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른이 된다고 말할 때에는 그런 외형적인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겁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죠. 그럼 어른스럽게 행동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어떻게 행동해야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어른스러운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결과를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신중하게 선택하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를 몸과 마음으로 책임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른스럽다고 하지 않나요?
제가 어른스럽다는 말을 앞에서 계속 했던 이유는 선택과 책임이 도박 중독 치유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도박 중독자는 도박을 하겠다는 선택만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도박 빚, 신뢰가 깨지는 것, 법적 문제 등)는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도박자가 도박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돕는 것이 치유의 제 1원칙이라고까지 하겠어요.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도박의 결과를 도박자 대신 책임지는 것만 합니다.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도박자가 채권자들에게 협박당하지 않게 하려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으려고, 신용불량자가 되면 안 되니까, 감옥에 안 보내려고, 혹시라도 절망에 빠져 목숨을 버릴지 몰라서 등등. 하지만 결국 가족의 이러한 선택은 그 결과까지 심사숙고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며 선택 없는(희생하는) 책임지기에 불과합니다.
도박자가 회복되려면 결국 자신의 도박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치유에 임하고 다시는 도박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가족 또한 도박자가 이러한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대신 책임지는 것을 중단하고 도박자가 치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도박 중독자와 가족 모두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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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런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인생은 매 순간마다 선택을 요구하죠. 사소하게는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와 같은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과 깊이는 매우 다양합니다.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딜레마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선택을 하든 100%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선택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누구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선택에서 저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 물어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에 물어보는 것을 감안한다면 반대의 선택을 하는 것이죠. 우리는 머리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꼼꼼히 재고 따져보면 확률적으로 후회를 줄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인간의 머리라는 것은 의외로 그리 정확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당히 많은 객관적인 정보를 주관적으로 왜곡하거나 윤색합니다. 그래서 뜻밖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뭐 영혼 기타 등등으로 불러도 됩니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온통 오염된 머리와 달리 비교적 순수한 편이죠. 그래서 저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고 눈앞에 이득이 되는 것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머리를 구분하기 어려운 분들께는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합니다.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런 저런 조건을 따지고 저울질하지 말고 이것을 선택해서 경험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만약 그렇다는 답이 나오면 무조건 하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첫 번째 방법과 유사하죠.
제 인생이 바뀐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저는 거의 모든 선택을 위의 두 가지 방법에 따라 해 왔지만 크게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고 대부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모든 선택의 근거를 합리적인 이성의 판단에만 맡겨왔던 분으로 선택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제가 사용하는 방법을 한번 고려해 보심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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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자의 가족을 상담하다 보면 도박 중독자의 뻔뻔함에 분노하고 치를 떠는 걸 자주 보게 됩니다.
도박 때문에 생긴 재정적인 손실로 희망이 짓밟히고 당장 경제적인 압박을 온 가족이 받고 있는데 정작 원인 제공자인 도박 중독자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잘 먹고, 잘 자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요. 게다가 별로 뉘우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실상 그동안 도박 문제를 몰래 감추느라 마음 고생을 했는데 막상 가족들에게 털어놓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마음의 부담을 일시적으로나마 덜 수 있어 안색이 좋아지는 도박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오해하듯이 도박 중독자가 가족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박 중독자가 자신의 도박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이로 인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가족들이 합심하여 도박빚을 대신 갚아주거나 도박자가 져야 할 책임을 대신 지다가 결국에는 소위 '바닥'을 치고 나서야 방법을 바꿔 치료를 받으러 나오게 됩니다.
이 때 가족들은 그동안 도박 중독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 못하게끔 막아준 방패와 공범 역할을 본인들이 해 왔음을 깨닫게 되고 그때서야 도박자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박자 및 도박 문제와 거리를 두게 됩니다.
가족들의 보호와 책임 면제의 우산 밑에서 안전했던 도박자는 드디어 직접 화살을 맞게 됩니다. 그것이 생각보다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지 되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도박자는 가족을 돌아보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됩니다.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죠.
그러니 조바심내지 말고 치료의 원칙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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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담을 받기는 하는데 너 때문에 상담을 받는 것'이라고 선을 긋는 도박 중독자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성인이 된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런 말을 다시는 못하게 못을 박아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고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받지 마, 절대로 나 때문에 받는다고 이야기하지 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도박 중독자가 내가 너 때문에 상담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을 허용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는 이 말이 도박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책임 의식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도박 중독자는 상담이 실패하는 경우(이런 마음가짐으로는 대부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상담자, 가족 등 외부 환경에 돌리게 됩니다.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자신과 가족의 인생과 행복을 위한 노력을 책임지지 않는 도박자는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받는 상담이라면 받지 말라고 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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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박 문제를 털어놔야 하는 이유'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도박 중독은 담배를 끊는 것과 비슷해서 자신의 도박 문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면 알릴수록 더 빨리 더 효과적으로 치료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남에게는 도박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독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고 이를 언급만 해도 길길이 뛰는 도박자가 있습니다.
아니할 말로 동네에 소문나면 이사하면 되고, 회사 사람들이 알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면 되지만 가족들이 알게 되면 자신이 도박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이 평생을 따라다닌다고 믿으니까요.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것이죠.
가족이 도박자의 도박 중독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도박자가 걱정하는 것만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도박 문제를 터부시하는 우리나라 문화의 특성 상 가족에게 감추고 싶은 도박자의 마음이 이해는 갑니다.
문제는 배우자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협박(또는 사정)하는 것입니다. 도박자의 말을 따르자니 공범의 역할을 하게 되어 치료에 해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도박자의 말을 무시하고 가족에게 알리자니 이제야 마음 잡고 치료 받으려는 도박자가 홧김에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지 않을까 두렵고...
그야말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그때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내가 일부러 소문을 내거나 고자질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누가 나에게 당신의 도박 문제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를 할거야.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싫고 그 거짓말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으니까. 그러니 내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싫으면 내가 도박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도록 당신이 책임지고 해결해"
이는 일부러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도박자의 공범 역할도 하지 않겠다는 배우자의 의지를 표명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가족들이 배우자에게 도박 문제에 대해 물어보게 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니 그 과정이 도박자에게 치료적인 압박이 되고 자신의 도박 행동 결과를 책임지게 만들라는 도박 중독 치료의 제 1 원칙에도 부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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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든 타의든 간에 주변 사람들이 도박자의 도박 사실을 알게 되면 도박자는 이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나마 동네 사람이라면 자신과 별 관계가 없는 남이니까 대놓고 외출하기 곤란한 정도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되지만 친척들의 경우는 제사라든가 피할 수 없는 각종 경조사 때문에 그러기가 곤란하죠.
도박자가 자신의 도박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는 이유와 해결 방안을 짝을 지어 말씀드리면,
첫째, 자신이 도박 중독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거나 왕따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박자로 인해 큰 경제적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면 도박자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도박자와 잘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어차피 도박자가 이런 사실을 직접 체험하지 않는 이상 말로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도록 이야기를 자꾸 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둘째, 부끄럽고 민망해서 피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무조건적인 회피로 그냥 만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럴 때에는 무조건 피하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주고 비교적 부담이 적은 모임부터 함께 나가자고 유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중에 더 어색하고 힘들 수 있다는 점을 도박자에게 설명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셋째, 드물기는 하지만 도박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성향이 대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인 관계를 피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경조사나 제사 참석이 도박자의 의무내지는 책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 의사를 관철하려고 무리하게 강요하지 말고 의견만 전달하고 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자신에게 참석을 강요한 가족의 탓을 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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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중독을 치료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가능하지만 사실 상
모든 치료 방법의 기초를 이루는 제 1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박자가 도박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할 것"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도박에 중독되게 되면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는 것'과 '책임을 지지 않고 뻔뻔해지는 것'이 가장 큰 도박자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도박자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개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번의 재발을 거치면서 가족들이 자신도 모르게 '공범'의 역할을 한 영향도 있기 때문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도박자가 도박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한다는 말에는 더 이상 가족이 도박자의 공범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실천부터 담보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박자가 밤새 포커판에서 도박을 하다가 출근 시간이 지나도록 귀가를 하지 않은 것을 가족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경우 회사에서 오늘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전화가 오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흔히 아파서 오늘은 결근을 해야겠다고 둘러대는데 이것이 바로 공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출근을 하지 않은 책임을 도박자 혼자서 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져야 할 책임이 되는 것이죠.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되더라도 진실만을 말하고 도박자가 도박을 하게 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젯밤 도박하러 나가서 아직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당연히 도박자는 강력하게 반발하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도박 행동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려는 당연한 저항입니다. 저항에 맞서 이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할 때 도박 중독자는 자신의 도박 행동의 결과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도박자가 도박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변명, 거짓말을 대신 해 주는 행동을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모든 도박중독 치료는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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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에서 전 연령대 중 가장 낮은 투표율에다가 투표자의 절반에 가까운 20대가 한나라당을 지지했다고 해서 지금 블로그스피어가 난리입니다.
사실 뭐 제가 20대일 때에도 정치에 별 관심은 없었거든요. 투표는 제게 주어진 소중한 주권이기 때문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행사했지만 그 때에도 지금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정치 혐오주의자라서 심리학 공부나 열심히 했지 사회 돌아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습니다. 연못에 사는 물고기가 연못 물이 오염되는 것에 신경쓰지 않은 꼴이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그 당시 저도 그랬기 때문에 20대 투표율이 바닥을 기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나라당 지지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대체 뭘 보고 한나라당에 투표한 겁니까? 등록금 내려달라고 시위는 하면서 그걸 견제할 수단인 사학법을 누더기로 만든 한나라당을 지지하다뇨. 10년을 말아먹은 민주당이 꼴보기 싫어서 한나라당에 투표했다는 어이없는 댓글도 보이던데 이 정도 되면 지적 수준을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20대는 명색이 저항과 변화의 세대 아닙니까? 기성 세대의 오염되고 편향된 사고에서 자유로운 자유 세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씹던 밥에 돌 들었다고 똥물을 원샷하다뇨. 제 정신입니까?
우석훈 박사가 '88만 원 세대'에서 짱돌을 들라고 했던데 이제 짱돌은 고이 내려놓고 삽을 드시기 바랍니다. 향후 5년 동안 20대가 일해야 할 곳은 대운하 공사 현장 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에는...
저도 모릅니다. 뭐 편의점 알바를 하시든, 대운하 공사의 현장 경험을 살려 전문 일용직으로 나서든...
다들 본인의 행동에 책임질 나이는 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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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 24
2차 대전 당시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가족을 잃고 극적으로 살아나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면서 깨달은 삶의 의미를 토대로 Logotherapy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 박사의 책입니다.
흔히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그리고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정신요법의 3대 학파로 부릅니다. 그만큼 프랭클 박사가 창시한 Logotherapy는 현대 정신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Will to Pleasure'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Will to Power'를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교해서 프랭클은 'Will to Meaning'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제가 실생활에서나 임상현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 두 개가 모두 나옵니다. 바로
'책임'과
'삶의 의미'이죠. 책임과 삶의 의미는 임상 현장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정신적, 심리적인 건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 두 가지를 공고히 갖게 된 사람은 치료가 완결되었다고 봐도 되겠죠.
이 책은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이라는 책에 'Basic concept of Logotherapy'를 추가했기 때문에 1부는 저자가 경험한 죽음의 수용소 이야기가 전개되고 후반부에는 Logotherapy의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이 전개되기 때문에 흐름이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Logotherapy의 개념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을 하게끔 돕는, 좋은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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