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 상담의 목표는 강렬한 부적 정서가 이미지 등으로 응축되어 있는 걸 언어화하여 풀어내도록 돕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치료 기법과 상담 기술이 동원되는데요.
대개의 내담자들이 상담 의뢰될 당시 이미 심적으로 굉장히 약해져 있어 그런 치료적 접근을 견뎌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많은 상담자들이 성급하게 성폭력 피해가 일어난 과거로 돌아가 탐색을 시도하거나 내담자가 보이고 있는 증상들을 현재 수준에서 다루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위에서 말씀드린 치유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외과에서 연세가 많은 어르신을 수술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증상의 심각성일까요? 아닙니다. 어르신이 장시간의 수술을 견뎌낼 수 있는 체력을 비축하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은 무기력감과 고통감, 절망감으로 뒤죽박죽된 혼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정연한 치료 기법을 사용해봤자 그다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접근하는 걸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래 -> 현재 -> 과거의 순으로 다룰 것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의 경우 정신적 내상을 워낙 심하게 입은데다 조망의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아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잘 못합니다. 그럴수록 작은 희망이라도 함께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주로 이야기하는 상담 주제는 꿈이나 진로에 대한 겁니다. 의외로 자신의 꿈과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정보를 모으는 아동/청소년의 수가 적기에 생각보다 쉽게 접점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붙잡고 지금 무슨 한가한 꿈 이야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아이가 피를 닦고 상처를 봉합할 수 있는 치료진의 접근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문제거든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관계를 맺고 나서야 현재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신뢰도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죠.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사건 이야기는 조사 과정에서 지겹도록 되풀이해서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발고한 이후에 자신보다 더 괴로워하는 부모와 가족을 보면서 괜히 이야기를 했나 하는 후회 속에 살면서 현재도 지옥처럼 변했기에 과거와 현재에는 상담자가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현재, 과거로 거슬러 올라오는 우회로가 오히려 내담자의 상처를 직접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빠른 시간 내에 치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러니 과거 -> 현재 -> 미래 또는 과거,현재 -> 미래의 순으로 상담하지 마시고 미래 -> 현재 -> 과거 순으로 상담하는 걸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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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채 성장해 열등감으로 고통받는 어른이 되었고 그러한 사랑을 대리 충족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풍족하지만 지극히 가부장적인 집으로 시집가서 자신과 똑같은 딸아이를 낳아 투사한 나머지 그 아이는 어릴 때의 엄마 모습과 똑같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아이를 상담한 실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케이스를 만나셨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히려 아동 임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경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자아가 성숙하지 못하고 자아 강도도 약하기 때문에 훨씬 더 세심하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죠. 발달 수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기술의 조율이 필요합니다. 제가 일하는 도박 중독 분야는 상대적으로 포탄이 난무하는 피투성이의 전쟁터이기 때문에 꽃밭의 민들레 한 송이 한 송이까지 모두 살릴 수는 없습니다. 떨어지는 포탄을 막아내기에도 벅차니까요. 그런 점에서 아동의 세심한 마음을 무한 인내심으로 보듬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아주 예민한 악기를 조율하는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겉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놀이 치료나 표현 예술 치료 등의 치료 기법에 대한 폄하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반성합니다. 문제는 칼이 아니라 그 칼을 쓰는 고수의 내공이었던 것인데 말이지요. 어떤 치료 기법이든지 마찬가지겠지만요.
저는 환경 개선을 위해서라도 아동을 심리치료할 때에도 부모에 대한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책의 저자인 이보연 선생님은 부모의 협조 유무와 관계없이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에 대한 믿음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더군요. 상담자의 그런 확신이 미정이가 딛고 일어설 발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전이가 일어났을 때 상담자가 아이의 마음 읽기 요구에 동참하지 않고 스스로 표현할 때까지 끝까지 버텨준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아주 좋은 책입니다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랬을 것 같지 않은데 책으로 묶는 과정에서 미정이와 헤어지는 부분(상담의 종결 부분)이 분량때문에 다소 급하게 처리된 듯 보이더군요. 조금 더 깊이있게 다뤄주셨으면 개인적으로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아동을 만나는 임상가 뿐 아니라 어린 아동을 둔 부모님이라면 분명히 도움이 될 좋은 책입니다. 이처럼 상담 실화를 매끄럽게 엮은 책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거든요.
덧. 이 책은 열심히 북 크로싱에 참여하시는 별사탕님이 북 크로싱을 위해 기증하신 책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별사탕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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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 기법에는 일종의 유행이 있습니다. 요새는 EMDR, ACT, MBSR(or MBCT)에 이어 긍정심리학을 활용한 치료적 접근이 하나 둘씩 국내에 소개되고 있죠. 중독 분야에서 효과적인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동기 강화 상담(MET or MI)도 꾸준히 인기몰이 중이고요.
실제로 학회 게시판을 보면 관련 워크샵이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오곤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정작 그 치료 기법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떤 장애와 심리적 문제에 적용하면 좋은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워크샵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를 소개하는 치료자/상담자마저도 자신의 임상 경험을 녹여내어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저 그 치료기법에 대한 원론적인 소개와 시연 뿐이라서 큰 돈과 어려운 시간을 들여 힘들게 워크샵을 듣고 나서도 뭘 어떻게 활용하라는 것인지 난감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워크샵을 시행하는 임상가가 단기 코스로 외국에 가서 따온 자격증 하나만 믿고 국내 임상 경험도 충분히 쌓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격증의 한국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세몰이를 하거나 관련 서적을 몇 권 번역하면서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치료기법을 국내에서 선점하기 위해 일단 워크샵부터 개설해서 그렇습니다(전 개인적으로 자신의 임상 분야에서 5년 이상 적용하지 않은 걸 어설프게 들고 나오는 걸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상담 및 심리치료 기법에 대한 수련을 받은 적이 없는 임상가들이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에 나왔을 때 불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심리치료 기법을 고액을 들여 수강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그저 경력을 쓸 때 줄줄이 쓰고 마는 겁니다(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이상한 워크샵 수강 기록과 자격증을 나열하는거 창피하지 않아요?)
치료 기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치료 기법을 적용할 장애와 문제 영역이 무엇이냐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동기강화상담은 병식이 없는 중독 문제를 가진 내담자에게 탁월한 효과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냥 동기강화상담만 배워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치료 기법 수 백가지 알아서 뭐 합니까? 각각의 기법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니 항상 모든 치료 기법은 적용해야 할 대상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배워야 하고 그걸 모르는 치료자로부터는 배워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자칫하면 만병통치약처럼 이거 하나면 다 끝난다는 식으로 맹신하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장애를 치료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심리치료 기법이란 없습니다.
굳이 기법을 익히고자 한다면 오히려 다양한 문제 영역에 일반화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법부터 익히세요. 예를 들어 심리평가보고서에 임상심리학자들이 맨날 사회 기술 훈련을 하라, 부모 교육을 하라고 하지만 정작 사회 기술 훈련이나 부모 교육의 최고 전문가가 없습니다. 대충 흉내만 내거나 그마저도 못하는 기관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센터에서는 그냥 놀이치료나 시키고 맙니다. 놀이치료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치료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치료자를 구하기 쉽고 만만하니까 놀이치료에만 매달릴 뿐 다른 건 아예 손도 못 대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 교육만 해도 ADHD를 위한 부모교육, 강압적 훈육 방식을 고집하는 부모 교육, 헬리콥터 부모를 위한 부모 교육 등 세분화하면 얼마나 다양한 variation이 가능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개입조차도 제대로 하는 전문가가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social skill training 하나만 제대로 파서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가 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박 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본적인 치료 기법 하나 제대로 하는 고수가 없고 내노라하는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 없으니까요. 그러니 기본에서부터 시작해서 기존의 프로그램에서부터 현장 경험을 통해 가감해서 노하우를 축적하세요. 그러면 나중에 프로그램을 만들든,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든 제대로 된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짧게 요약합니다.
* 세부적인 치료 기법을 익히는 것보다 적용할 장애나 문제 영역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에 맞춰 해당되는 치료 기법을 익혀야 함.* 자신의 관심 분야에 정확하게 fit한 세부적인 치료 기법이 없는 경우 적용 영역이 넓은 기본적인 프로그램이나 치료 기법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전문성을 쌓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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