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얼마전에 포스팅한
'주로 병원에서만 수련받은 임상심리전문가를 위한 조언'과 댓구를 이루는 성격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가지를 말씀드리겠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상담자도 과학자라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임상/상담의 현장 모델을 흔히 scientist-practitioner model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담 전문가들은 practice에 초점을 맞춘 수련을 집중적으로 받는 반면 scientist가 되어야 할 필요성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저는 흔히 scientist-practitioner model에서 scientist를 탐정으로, practitioner를 성직자로 비유하곤 하는데 내담자와 동고동락하고 내담자의 편에서 내담자의 치유를 위해 애쓰는 건 잘합니다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때로는 회의주의자의 자세로 객관적인 근거를 비판적으로 살피는 탐정의 역할은 간과되거나 때로는 폄하되기까지 합니다.
저는 3년을 병원에서 수련받고 임상심리전문가가 되자마자 상담 현장에서 지금까지 practice를 하고 있는데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담심리전문가 수련을 받고 계신 선생님들께 이 말씀을 꼭 한번쯤 드리고 싶었습니다.
1. 회의주의자의 시각을 추가할 것
: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을 공감적으로 경청하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담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내담자가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감추거나 방어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상담자를 조종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내담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상담자가 너무 많은 것에 굉장히 놀랐고 사실 지금도 놀라고 있습니다. 심리평가 수퍼비전을 하다보면 자신이 상담했던 내담자의 모습과 심리평가를 통해 드러난 모습이 다른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지는 상담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을 무조건 믿는 것을 치유적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을 무조건 믿는다고 치유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상담자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내담자가 하는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판정하기 위한 fact finding 자체가 아닙니다. 내담자도 (당연히) 거짓말을 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상담에 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내담자가 그런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내담자의 주관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할 수 있게 됩니다.
2. 심리평가에 입각한 formulation을 연습할 것
: 내담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상담을 하게 되면 무엇이 객관적 진실이고 무엇이 주관적 거짓말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되므로 상담자를 혼란에 빠뜨리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상담은 fact finding을 해서 옳고 그름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내담자가 한 말과 호소하는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고 심리평가가 그러한 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는 상담의 다양한 모델과 접근법에 의해 내담자를 바라봤다면 이제는 심리평가를 통해 심리검사 도구가 측정하는 심리적 속성과 개념을 중심으로 내담자를 이해해 보는 것이죠. 심리검사는 분석적이고 계량화된 자료를 다루므로 내담자를 계량화하여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다룬다며 거부감을 느끼는 상담자도 있지만 그건 검사 도구 나름입니다. 어떤 심리검사도구(특히 투사 검사와 기질/성격 검사)는 상담자에게 익숙한 story telling을 통해 내담자의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하니까요. 심리평가는 굉장히 용도가 다양한 칼과 같습니다. 그 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상담자가 도축자가 될 것이냐 검객이 될 것이냐의 목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니 심리검사를 공부하고 활용에 익숙해질수록 굉장히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됨을 아시게 될 겁니다.
3. 가설을 설정하고 접근하는 법을 익힐 것
: 상담자 중 상당수는 상담 중에 느끼는 막막함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만 심리검사를 사용하지만 그건 심리평가를 반쪽만 활용하는 겁니다. 심리평가는 일단 던져서 뭐가 걸렸는지 살펴보는 그물로만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도구니까요. 심리평가는 상담의 초기에 상담의 목표와 접근법, 과정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내담자가 호소하는 주된 문제와 증상, 어려움 등의 초기 정보를 토대로 가설을 설정(이를 위해서는 정신병리학이나 다양한 임상 관련 이론에 대한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합니다)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겁니다. 가설을 설정할 때는 특정한 이론적 접근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만 하면 항상 같은 가설을 설정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family system theory의 차원에서만 내담자의 문제를 평가한다면 어떨까요? 애착 이론으로만 내담자의 문제를 설명하려고 한다면요? 가설을 설정할 때는 내담자의 표면적 주 호소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다양한 가설을 세워보는 연습을 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를 옮겨타는 파격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담자를 보는 시각이 넓어집니다. 깊이보다는 넓이가 중요합니다.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되어 일가를 이루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상담은 어차피 평생 작업이니까요. 한 우물만 무작정 깊이 파다 보면 그 우물에 갇히게 됩니다. 결과는 다들 아시겠지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입니다.
4. 다다익선이 아니라 소소익선
: 상담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상담자들은 내담자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것을 주문받습니다만 앞으로는 다다익선이 아니라 소소익선을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내담자의 어려움을 파악하는게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단기 상담이 주된 접근법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고 무엇보다 비용 대비/시간 대비 효율성을 따지게 될 테니까요. 라포를 형성할 회기 수를 확보하는 것마저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될텐데 내담자의 개인 정보를 상담을 통해 모으는 건 내담자와 작업해야 할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유관 전문가가 더 잘하는 부분은 분업해서 전담하도록 맡기고 상담자가 잘 하는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낫습니다.
소소익선을 통해 핵심적인 정보를 도출하려면 앞에서 말씀드린 가설을 설정하고 접근하는 법을 반드시 익혀야 하고 가설을 잘 설정하려면 회의주의자의 시각으로 내담자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설정한 가설을 검증하려면 심리평가에 익숙해야 하니 이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모든 조언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상담 수련 중에 배운 것만 갖고 소속 기관에서 수퍼바이저나 선배가 시키는대로 history taking에 가계도 그리기, 매번 문장완성검사 결과까지 타이핑하면서 정해진 회기가 줄어드는 것에 발 동동 구르는, 번갯불에 콩 볶는 상담을 평생 하고 싶지 않은 상담자라면 제 조언을 한번쯤은 심각하게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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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자와 상담자는 취해야 하는 stance가 좀 다릅니다. 물론 경험과 내공이 쌓이면 두 정체성이 잘 통합되어 최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런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일단 상담을 할 때에는 상담자의 역할을, 심리평가를 할 때에는 심리평가자만의 역할을 구분하여 각각에 충실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데 심리평가를 실시할 때 상담자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 주로 정신과 세팅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심리전문가나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수련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덜 나타나는데 비해 현장에서 이미 상담 경험이 있거나 스스로 자신을 상담자로 규정하고 있는 임상가에게 이런 문제가 두드러집니다.
상담자의 입장에서 심리평가를 실시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공감과 경청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배경 정보와 피검자의 진술을 아무런 조건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비유를 하자면 상담자는 신부님이고 심리평가자는 탐정에 가깝습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대속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말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탐정은 실체적 진실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수집한 정보도 어디까지나 증거에 기반해서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물론 심리평가를 받으려는 피검자는 대부분 자신에 대해 좀 더 이해하기를 원하고 심리평가를 통해 치유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때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이차적인 이득(secondary gain)이 존재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피검자의 말이나 이전 치료 기록, 배경 정보, 주변 인물의 관찰 결과들은 모두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을거라고 가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심리검사 sign으로 지지되지 않는 정보는 일단 보류하거나 심하게 충돌하는 경우는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평가자가 피검자의 말을 회의하지 않고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심리평가 보고서가 소설인가?'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소설을 쓰게 됩니다.
피검자를 면담한 내용을 중심으로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거면 뭐하러 아까운 시간과 돈을 들여 심리평가를 실시합니까?
상담을 할 때에는 상담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심리평가를 실시할 때에는 심리평가자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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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할 때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탐정이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뢰 사유에 따라 검사 목적 달성을 위해 피검자의 증상, 성격, 역동 등을 탐정과 같이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탐정은 간혹 용의자를 탐문할 수도 있는데 용의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탐정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심리평가를 수행하는 상당수의 전문가가 피검자 또는 보호자의 말을 의문 없이 믿는 것을 가끔 봅니다. 아마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관을 방문하는 만큼 항상 진실만을 말할 것이라고 믿는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신감정이나 진단서 발급을 통한 이차적 이득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 뿐 아니라 아동 검사의 경우에 죄책감을 덜고자 문제의 심각도를 평가절하하는 부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평가를 수행하는 임상가는 항상 정보의 신뢰도를 평가해야 하고 피검자와 보호자의 보고에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심리학자는 과학자입니다. 이 말은 심리학의 세계에 뛰어들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과학자의 자세 중 가장 기본은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라고 항상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하고 반문해야 합니다.
공감적 경청, 수용, 진실, 라포처럼 상담이나 치료 장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심리평가를 수행할 때는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피검자와 보호자를 의심한다는 양심의 짐도 잠시 내려놓고 심리평가에 임하는 순간 오감을 동원하는 탐정이 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피검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됩니다.
의문은 의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심리평가상황에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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