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본적으로 논쟁이나 토론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논쟁은 전혀 쓸데 없는 짓이다' 참조)이라서 저랑 생각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말을 섞지 않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지가 이기든 지든 간에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으면 만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더군요.
그들이 원하는 건 승부가 아니고 상대방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대충 져주고 무의미한 말싸움을 끝내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나만 실컷 상처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과 두 가지 행동 원칙을 갖고 싸웁니다.
첫째. 상대방의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 것. 예를 들어 상대방이 "너는 다른 사람과 화합하면서 일하는 건 생각도 안 하냐?"라고 인신공격을 해 온다고 해 보죠. 상대방의 프레임은 나를 이기주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이 이기주의자가 아니라며 다른 사람과 얼마나 화합하면서 일하려고 노력하는지 증거를 대면서 방어하려고 하는 건 상대방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내 땅이 전쟁터가 된다면 방어에 성공해도 초토화 되는 건 내 땅입니다. 기왕 싸우려면 상대방의 본진에서 싸워야죠. 이럴 때에는 "나는 그래도 일이나 잘 하지 너처럼 무능하지는 않다"는 식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옆으로 흘리면서 다른 프레임의 카운터 펀치를 먹여야 합니다. 이 때 제가 사용한 프레임은 '너는 다른 사람을 흠집내는데만 열 올리는 무능력자이다'입니다.
둘째, 상대방의 자폭 공격에 말려들지 말 것.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의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고 적진에서 싸우는데 성공하게 되면 싸우면 싸울수록 상대방만 손해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수준에서 갈등을 봉합하려는 제스쳐를 취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나도 감정적으로 흥분해서(전혀 흥분하지 않았지만) 심한 말이 나갔다는 식으로 맞장구를 쳐 주면 됩니다. 어차피 내상은 저쪽이 다 입었으니까요. 하지만 가끔 무협지 용어를 빌면 '동귀어진'하는 식으로 끝까지 함께 죽자고 막무가내로 나오는 바보도 있습니다. 이 때 더 이상 확전을 하면 내 평판에도 심한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그건 니 생각일 뿐이고"라는 말로 전투를 끝내야 합니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주변에 동의를 구해도 이 시점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분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됩니다.
물론 멍청이와 싸우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겠으나 세상에는 멍청이들이 의외로 많거든요. 준비는 하고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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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은 상대방을 공격하고 논박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의견과 행동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위의 전제에 동의하신다면 저는 논쟁이야말로 가장 해서는 안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논쟁은 동원하는 기술이 논리이든, 감정이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공격당한다고 느낄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셋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공격인데 나만 틀린 것이 아니고 너도 틀렸다는 양비론과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뒤집어 씌우기, 말은 옳지만 싸가지가 없다는 감정에 의존하기 등이 주로 사용됩니다. 다른 하나는 방어인데 회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 말이 맞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사정이 있었다든가, 이런 측면도 있다는 변명이 주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은 수용입니다. 말 그대로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공격과 방어는 아무런 변화도 낳을 수 없으며 결국 지리한 말싸움이 되고 맙니다. 100% 시간 낭비입니다.
그렇다면 수용은 어떨까요? 논쟁을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켜서 상대방이 내 논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승리한 것이 아닐까요?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존심과 자아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손상된 자존심과 자아의 상처를 회복하려는 반동이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변화는 일시적이며 결국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논쟁은 처음부터 생각이 같은 추종자들의 선입견만 강화할 뿐 문제 해결이나 행동, 그에 따른 변화를 낳고자 하는 목적 달성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비폭력 대화(NVC)'에서 이야기 하듯이 상대방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는 한 논쟁은 무의미하며 절대로 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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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바로 똥 이야기입니다.
보통 어디선가 똥 냄새가 난다면 똥 묻었다고 옆사람을 나무라기 이전에 혹시라도 자기에게 묻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가 아닌지부터 먼저 살피는 것이 기본입니다. 혹시라도 똥이 묻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이없고 황당한 모함이 될 수 있거든요.
또한 실제로 똥이 옆사람에게 묻은거라고 하더라도 "니가 똥 묻은 이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하기 이전에 옷을 버린 것에 대한 공감부터 해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죠. 자기는 평생 똥 묻을 일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언젠가 제대로 똥통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고, 혀로 흥한 자는 혀로 망하고, 남에게 똥물 뒤집어 씌우는 사람은 꼭 똥통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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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자주 방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아시겠지만 저는 온라인 토론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토론은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펴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필요하면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더 나은 제3의 대안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토론 과정에서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은 토론의 주제와 관련 있는 정도와 상관없이 건설적인 토론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주의를 분산시키고, 오해를 낳으며, 인신공격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의사소통과정에서 우리는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 표정, 자세, 목소리의 크기와 빠르기, 음색 등 다양한 비언어적인 수단을 써 자신의 의사를 전달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불필요한 감정이 차단되기도 하고, 잘못 전달된 감정의 오해가 해소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온라인상에서는 이런 비언어적인 장치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건조한 텍스트만 존재하기 때문에 오프라인에 비해 오해를 할 가능성이 훨씬 크고, 일단 오해가 생기면 상승 작용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됩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건설적인 온라인 토론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원만하게 마무리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대부분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거나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서라기보다는 점점 더 감정적으로 치닫는 토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사전에 깨닫고 쌍방이 한걸음씩 물러서 서둘러 상처를 봉합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부부 치료를 하다 보면 거의 대다수 부부의 갈등은 의사소통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생각의 차이에 의한 것보다는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의 골 때문에 생긴 것이 훨씬 많습니다. 사실 많은 부부는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해서 함께 사는 부부도 '내용'보다는 '전달하는 방법'이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생면부지의 남과 토론을 할 때, 이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지는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최소한 온라인 토론이 진흙밭이 되지 않으려면 양쪽 모두 오로지 내용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설사 토론에서 상대방의 옳지 못한 의도가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겨 짚거나 지적하지 말고, 최대한 냉철하게 내용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에 온라인 토론은 끝장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폭탄에 연결된 뇌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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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사회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수 차례 크게 실망한 경험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이유와 현상들 때문입니다.
첫째,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극히 소수의 참여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항상 저도 포함됩니다)은 토론이 장기화될수록 지식의 부족을 드러내면서 했던 말을 지루하게 반복하는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특히 학술적인 토론의 장이 아닌 이상 이런 양상은 갈수록 더 심화하고 결국은 들인 시간과 고민에 비해 참여자가 얻는 것이 거의 없게 됩니다. 인식의 차이를 확인했다는 이야기는 대부분 자기기만입니다. 실제로 남은 것은 감정적인 상처와 앙금뿐입니다.
둘째, 항상 감정적으로 격앙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고 토론에 감정을 개입하지 않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듭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토론의 내용과 상관없이 감정적인 말싸움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인신공격만큼이나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저는 사회적,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그런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감정은 주제와 상관없이 동감하는 사람을 한쪽 방향으로 결집하며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인 공격을 합리화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대부분 감정적으로 먼저 흥분하는 사람일수록 토론의 말미에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고 자기기만을 하는 경향이 강하더군요.
셋째, 흔히 이분법적 사고와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이 쓰이기 마련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중간자, 관찰자의 입장을 배제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건설적인 대안의 제시를 방해합니다. 또한 제가 가장 싫어하는 토론 방법 중의 하나는 상대방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인데 이 방법은 대상이 되는 어느 누구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사용하는 사람만큼은 그 방법의 영향권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비겁한 방법입니다. 대체로 이분법적 사고와 죄책감 자극하기는 동시에 사용되는데 상대방의 감정적인 도발을 유발하기가 쉽다는 점에서 더욱 악랄한 토론 방법입니다. 이것들은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날뛰는 칼이기 때문에 아예 꺼낼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넷째, 사회적, 정치적 이슈는 칼로 자르듯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주제가 별로 없으며(민감한 이슈에 대한 토론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반드시 옳다는 고정관념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토론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미 시작부터 건설적인 토론 자체는 물을 건너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식의 전문성으로 승부하는 학술 토론장도 아니기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의 지식수준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토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지식수준을 공격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정보의 제공 및 공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친절한 모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근거 제시의 요구는 면박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이며 오히려 상대방의 지식 수준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기 마련입니다.
모든 토론이 그렇지만 민감한 이슈에 대한 토론은 자신이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자기 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전도하는 기독교인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그들의 본질적인 믿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방법의 비효과성에 대해서가 아닙니까?
얼굴을 마주보는 오프라인에서도 그럴진대 익명성을 보장받는 온라인에서는 앞서 나열한 네 가지 현상들이 더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월덴지기는 월덴 3 이외의 장에서 민감한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을 극도로 자제할 생각입니다. 이 글뿐 아니라 앞으로 올라오는 민감한 이슈에 대한 월덴지기의 견해도 월덴 3의 기본적인 운영 방침 상 덧글과 트랙백을 모두 허용하겠지만 부디 트랙백과 덧글은 신중하게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심리학 지식의 공유라는 월덴 3의 목적상 이 블로그 내에서는 운영방침이 의사표현의 자유보다 우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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