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가 상담에서 보이는 행동의 의도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건 상담자가 흔히 하는 일이지만 그 행동이 겉으로 보기에 부정적인 유형인 경우 이를 해석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역전이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상담 초기인 경우는 저항으로 해석하기 쉽기 때문이죠.
하지만 내담자에게 부모-자녀 관계 문제가 있고 내담자의 행동 의도가 '파괴적 관심끌기'라면 이는 당연히 상담 장면에서도 재현됩니다.
내담자가 상담을 받으러 오는 이유가 심적 고통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굳게 믿고 있는 상담자는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기 어렵습니다(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해결 방법만을 몰라서 상담자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내담자는 극히 드문 경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특히 파괴적 관심끌기를 통해 애정 욕구를 채우려는 내담자는 스스로 상담자에게 어필할 만한 강점이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실제로 그런 능력과 강점이 없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에 자연스럽게 체화된 파괴적 관심끌기를 통해 상담자에게 어필하려고 하고 부모-자녀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담자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파괴적 관심끌기 행동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당연히 상담자는 강한 역전이를 경험하게 되고 내담자를 제압하거나 통제하려는 욕구를 느끼게 되는데 감정의 강도가 지나치게 강하다면 이것이 내담자의 파괴적 관심끌기가 재현되는 것인지를 한번쯤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파괴적 관심끌기는 일종의 가해자 테스팅 같은 거라서 상담자가 이를 간파하고 현명하게 소거 및 대치할 수 있다면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담자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감정을 제어하기 어렵다면 한번쯤 파괴적 관심끌기 가능성을 고려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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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진단명을 남발하는 것에 알러지가 있습니다만 심리평가의 주 의뢰 사유가 진단인 경우 의심되는 공존 장애가 많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R/O을 붙여서 되는대로 나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 의뢰 사유가 치료 계획 수립이나 향후 대처 방법의 모색인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주의집중을 잘 못하는 초등학교 1학년 남아가 심리평가 의뢰 되었는데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면서 등교를 거부하고 밤에는 혼자서 안 잘려고 심하게 떼를 쓰는데다 억지로 혼자 재우면 어김없이 야뇨를 하고, 시험 기간이나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는 날이 되면 눈을 심하게 깜박이는 문제를 보일 때 어떻게 formulation해야 할까요?
정확한 변별 진단만 필요하다면 ADHD, Transient Tic Disorder, Enuresis, Adjustment Disorder, Separation Anxiety Disorder 등등의 가설을 세운 뒤 검사 sign으로 검증하면 될테지만 아동에게서 관찰되는 증상이 다양하고 여러가지 진단이 동시에 의심될 만큼 혼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검사 sign을 정리하면서 진단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각 장애로 단독 진단을 한다면 어떤 것이 피검자의 심리적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는지를 특히 염두에 두고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아동의 경우 핵심 문제가 평가 불안의 문제인지, 애착의 문제인지, 파괴적 관심 끌기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주의력 문제인지 말이죠.
핵심적인 문제를 찾아내면 거기부터 시작해서 다른 장애의 중복 진단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예상되는 진단 가설이 많을 때에도 좀 더 손쉽게 피검자의 문제를 formulation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연습이 평소에 잘 되어 있지 않으면 핵심적인 문제를 골라내는 눈이 안 생기기 때문에 전에
'임상심리평가보고서 이렇게 쓰면 안 된다 II'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R/O 진단을 남발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양한 진단이 동시에 의심되는 경우에는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독 진단을 먼저 찾고 그 진단을 통해 피검자의 핵심 문제를 찾는 것을 연습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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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문제는 없다'라는 글에서는 문제를 삶의 변화에 적응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불협화음으로 설명을 했습니다만 오늘은 모든 문제에는 나름의 (숨겨진)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임상 장면, 특히 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심리전문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심리평가를 통해 '환자'의 '문제'를 찾아내고 심리치료를 통해 그 '문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증상'이 곧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증상을 잡으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이죠.
이런 접근은 자칫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해 엉뚱한 곳을 공격하는 우를 범하게 만듭니다. 특히 원인 치유적인 접근보다 증상 완화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현대 의학이 지배하는 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가들은 이런 접근에 자신이 경도되어 있지 않은 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문제'는 그것을 '문제'라고 이름 붙이면서 부정적 영향력이 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상담자는 내담자가 문제라고 지칭하는 그것이 가져오는 주관적 고통감에는 공감해야 하지만 그것을 진정 문제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왜 나타났을까의 차원에서 꼭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모든 문제에는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는데 그것의 보여지는 모습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내담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나타나는 증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부정적인 모습이 보여도 내담자 본인에게는 중요한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문제를 통해 그러한 이유나 목적을 대리 충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파괴적 관심끌기'가 있습니다.
'파괴적 관심을 추구하는 아동 다루는 법'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부적절한 행동을 통해 주 양육자의 관심을 끄는 것인데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그저 일탈 행동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개망나니처럼 보이는 아동의 행동이 단순한 '문제'가 아닌 정서적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는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그것이 부분적이든, 일시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내담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담의 목표는 내담자가 '문제'라고 보고하는 것의 존재 이유를 함께 찾고, 그 관계성을 내담자가 이해, 수용하고, 그 원래 이유를 위한 새로운, 그러면서도 건강한 대안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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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는 다른 과에 비해 환자를 잃지 않는 과로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만으로도 꼭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지만 다른 장애의 경우에도 충동적인 자살 시도가 꽤 많으며 상당수가 성공해 소중한 목숨을 잃습니다.
죽을 것을 예상하지 않고 시도하는 소위 '파괴적 관심끌기'와 이차적 이득을 위한 시도가 예상치 않게 도를 지나쳐 불행한 결과로 귀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일선 현장에서 환자를 가장 많이 만나는 정신과 의사 뿐 아니라 임상심리학자, 사회복지 전문가들도 이에 대한 education과 함께 정신적 충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저만 해도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년에 충동적인 자살로 내담자를 잃은 뒤 일주일 동안 도저히 일손이 잡히지 않고 방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도움을 받을 곳이 전혀 없더군요. 시스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결국 혼자서 힘들게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최근에는 감정 노동을 하는 직군을 중심으로 정서적 소진(emotional burnout)을 예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제 생각에는 내담자/피검자를 suicide로 잃는 문제의 해결이 더 시급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도 현장의 임상가에게 강력한 trauma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supervisor급의 임상가들이 치료에 종사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임상 여건 상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이런 문제를 접할 때마다 임상가란 정말 야전에서 각개격파로 외롭게 싸워야 하는 운명인가 하는 회의가 많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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