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척도(Pa, Paranoia)는 원래 편집증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변별하기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MMPI와 마찬가지로 MMPI-2, MMPI-A에서도 40문항이 변화없이 거의 그대로 유지될 만큼 구조가 안정된 척도입니다.
측정하는 내용은 관계 사고(idea of reference), 의심, 피해 의식 등이라서 이 척도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승한 경우 우선 정신증을 변별해야 할 것 같지만 그건 병원 장면에서의 이야기고 상담에서는 '배신 경험 (지각)'을 탐색하는 것이 더 유용합니다. 특히 상승한 소척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 소척도가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Pa 척도 해석 시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는 편집성 성격 장애 진단이 있습니다. Pa 척도에 포함된 문항은 대부분 문항의 의도가 드러나는 명백 문항이기 때문에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이 많은 편집성 성격 장애 환자들은 Pa 문항에 곧이곧대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척도가 상승하지 않죠. Pa 척도가 상승한 경우 오히려 편집성 성격 장애는 아닐거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오히려 Pa 척도가 극단적으로 낮을 때(30T에 근접할 때) paranoid한 것으로 해석할 때 들어맞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임상 척도는 낮은 수준일 때 해석하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예외인 척도가 몇 개 있는데 Pa 척도가 그 중 하나입니다. 물론 단순히 Pa 척도가 낮다고 무조건 paranoid한 것으로 해석하는 건 아니고 CYN(A-cyn) 내용 척도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승하는지(특히 CYN2, A-cyn2 소척도가 상승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상승했다면 역방향 해석에 좀 더 무게를 둘 수 있죠.
또한 Pa 척도가 상승하는 내담자는 투사(projection) 방어 기제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니 상담자라면 상담하실 때 주의를 기울여야겠지요. 그 밖에 분노나 적대감을 감추기 위한 합리화 때문에 상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누구인지 탐색하는 것도 상담할 때 도움이 됩니다.
Pa(6) 임상 척도에 포함된 3개의 소척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 Pa1(피해의식, Persecutory Ideas)
* Pa2(예민성, Poignancy)
* Pa3(순진성, Naivete)
각 소척도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 Pa1(피해의식) : 이 소척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한 수검자는 세상을 위협적인 곳으로 보고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른 경우 관계 사고나 피해 망상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상 피해/편집 사고를 측정하는 유일한 소척도로 Pa 모척도가 유의미하다고 해도 이 소척도가 상승하지 않았다면 paranoid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소척도가 상승한 경우 실제이든 수검자의 지각이든 간에 배신 경험(지각)을 탐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 Pa2(예민성) : 이 소척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한 수검자는 매우 예민한 것이 특징입니다. 남들에 비해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에 해를 끼칠 대상과 의도를 탐지하려고 온통 신경을 쓰고 있죠. 일종의 감시 레이더가 예민한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Pa1 척도와 동반 상승하면 피해 경험이 현재 진행형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작업 기억이 저하되거나 기타 다른 심리적 문제를 수반할 수 있습니다.
* Pa3(순진성) : 이 소척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한 수검자를 보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1) 근거없는 낙관주의, 2) 이분법적 사고 경향. Pa1과 Pa2 소척도가 상호 관련성이 높은 것에 비해 Pa3 소척도는 인지 왜곡에 가까운 구성 개념을 갖고 있어서 별도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방향성도 다르기 때문에 Pa1, Pa2, Pa3 척도가 일제히 상승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Pa1, Pa2 소척도가 상승한다면 Pa3는 낮게 나오는 것이 보통이죠. 반대로 Pa3 소척도가 상승한다면 혼자서 상승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Pa3 소척도를 어느 방향으로 해석해야 할 지는 다른 검사 결과도 살펴봐야 하는데 문장완성검사(SCT)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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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양창순 선생님이 2012년에 낸 책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들 중 글솜씨가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데 원조급까지는 아니어도 초기에 유명세를 탄 분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은데요.
글솜씨로 유명세를 탄 분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자신의 임상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내공이 글타래로 충분히 쌓이기 전에 출판사의 등떠밀기에 휘말려 비슷비슷한 종류의 책을 계속 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맨 처음 인기몰이를 했던 책은 참 좋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거지요. 외국의 임상가도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제가 극찬을 했던
'당신이 나를 위한 바로 그 사람인가요?(1992)'를 쓴 바바라 드 엔젤리스도
'지금의 고난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2005)'같은 너무나 평범한 책을 후속작으로 내기도 하니까요.
소설가라면 창의력이 고갈되었음을 느낄 때 절필을 선언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지만 임상가는 임상 현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오히려 내공을 더 잃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일을 놓을 수가 없는거지요.
서두가 길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양창순 선생님도 글을 마구 쏟아내는 수준입니다. 개정판을 포함한다고 해도
* 때로는 내 안에, 때로는 내 밖에 있는 나(2001년 11월)
* 나? vs 나!(2003년 1월)
* 당신 자신이 되라(2005년 6월)
* 마인드 포스(2007년 9월)
* 나는 왜 사랑을 못하나(2008년 7월)
* 내 인생, 이 정도면 괜찮아(2008년 10월)
* CEO, 마음을 읽다(2010년 7월)
* 엄마에게(2010년 9월)
* 미운오리새끼 날다(2011년 2월)
*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2012년 7월)
*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2012년 11월)
*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의 심리학 테라피(2013년 8월)
* 나는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2014년 7월)
보시는 것처럼 2000년도 초에는 2년에 1권 정도로 책이 나왔습니다(개인적으로 이것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2008년 '나는 왜 사랑을 못하나'부터 시작해서는 거의 1년에 2권 꼴로 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모든 책을 제가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아무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시간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임상가가 경험할 수 있는 임상 현장에도 제약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결국 사골 곰탕 우려내듯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할 수 밖에 없는거지요.
이 책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가 바로 그런 책의 대표격입니다. 현장의 임상가에게 영감을 주는 책도 아니고, 심리 장애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들이 어디서나 집어들고 아무 곳에서나 쉽게 읽다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집어던질 수 있는 그냥 달달한 pop psychology 에세이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내용의 흐름도 일관되지 않아서 저는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와 비슷한 내용을 기대하고 읽었는데 읽다보니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게다가 제가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는데 TCI의 기질과 성격을 섞어서 '7가지 성격의 보편적 유형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처음의 네 개는 기질의 영향을 좀 더 많이 받는 성격 유형이고 뒤의 셋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더 발전이 가능한 성격 유형이라는 식으로 잘못 설명하기까지 하더군요. 저는 이를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빌려오다 발을 헛딛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패턴인 맨 마지막에 예의 성격 장애나 특이한 정신과적 증상을 빌어 심리적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더군요.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으로는 '자살 본능', '가면 우울', '가짜 철학적 경향(심리학에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는 훨씬 더 정확한 개념이 있습니다만), '강박장애와 편집증', '공황장애', '환절기 마음병', '따돌림', '열등감과 죄책감', '거부불안' 등이 있는데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그냥 생각나는대로 소개한 것처럼 보여서 더욱 씁쓸합니다.
나름 기대하고 집어든 책인데 실망감이 너무 커서 우울해질 지경이더군요. 책의 뒷편에는 전 대법원장인 고려대 석좌교수, 전 삼성 에버랜드 사장, 법무법인의 대표 변호사, 기업의 대표이사 등의 화려한 추천사가 난무하지만 정작 임상가의 추천사는 하나도 없다는 게 이 책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에게도 추천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래서 '월덴지기가 인상깊게 읽은 구절'도 없습니다.
덧. 이 책은 직장 자료실에서 빌려 읽은 책이라서 북 크로싱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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