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하는 기관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의 네트워크에서 치료하거나 심리평가를 실시한 실적을 점검합니다. 저희야 모든 서비스가 무료이지만 MOU를 체결한 기관은 공익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상응하는 비용을 저희가 지불해야 하니까요. 상당히 많은 돈이 걸린 문제이고 나중에 감사원 감사나 국정감사에서 스캔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여건 상 도박중독에 대한 심리치료를 실시하는 치료자의 자격은 상당히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편이지만 도박중독자와 가족에 대한 심리평가는 실시자의 자격을 엄격하게 요구합니다. 이는 종합심리평가가 아닌데도 상당히 높은 평가비용을 지불하기 때문(건 당 15만 원)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50분의 시간 투자를 요구하는 상담과 달리 자기보고형 검사도구 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피검자에게까지 남용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에 일부 지방 센터에서 올라온 심리평가보고서를 점검하다가 보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 개인적인 의견을 feedback하고 재작성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저를 찾는 그 평가자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한다는 말이 제가 어느 병원에서 수련 받았는지 아는데 자신도 어느 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은 ‘이거 또 열등감의 화신에게 잘못 걸렸구나’였습니다. 심리평가보고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병원에서 수련 받았는지를 대체 왜 이야기 하는 겁니까? 보고서가 엉망이면 서울대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든, 하버드대 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든 엉망인 것이죠. 서울대병원에서 수련을 받았으면(그 평가자가 서울대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엉망인 보고서가 훌륭한 보고서로 탈바꿈이라도 된답니까? 그리고 제가 더 기분이 나쁜 점은 자신의 출신 병원을 모르기 때문에 제가 평가보고서를 평가 절하했을거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겁니다.
어쨌거나 그건 평가자의 개인 특성 문제일 수도 있고 의사소통 상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심리 평가자는 자신의 심리평가보고서에 포함될 수 있는 오류와 결함에 대한 자기 점검과 반성을 내부적으로도 해야 하지만 항상 외부의 평가에도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외부에서 보고서가 틀렸다는 평가가 오면 그럴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서면 그렇지 않음을 원자료 제시를 통해 입증하면 되는 겁니다. 도박 중독자에 대해 잘 모르면 겸허하게 자신의 지식 부족을 수용하고 배울 자세를 갖춰야지 자신의 전문성, 수련 배경 등을 들먹거리면서 감정적으로 complaint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도 많지는 않지만 제가 평가한 환자에 대해 담당의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치료진으로써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제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원자료와 보고서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그래도 제가 옳다는 확신이 들면 자료를 정리해서 납득이 가게끔 브리핑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치료진은 수용합니다. 제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다른 진단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평가자의 감정적인 대응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제 선입견만 더 강화했습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평가자 때문에 앞으로는 모든 센터에서 심리평가보고서를 제출할 때 검사지 사본을 제출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각 센터 평가자의 전문성을 믿고 원자료 점검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평가보고서의 신뢰도가 의심되면서 더욱 철저히 점검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니까요. 만약 그런데도 이번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저는 또 reject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의 평가 결과에 대해 소명하지 않으면 정식으로 그 평가자의 교체를 지방 센터에 요구할겁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도 아닌 피검자가 엉터리 보고서에 의해 MDD환자로 진단되어 병원에 입원해 약물 치료를 받게 된다면 그 피검자에게도 큰 일 일뿐 아니라 정작 필요한 환자에게 쓰여져야 할 비용이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냉정하게 말하자면 저희와 MOU를 체결한 협력 기관은 저희 관할이지만 그 지방 센터에서 계약을 맺은 심리평가자는 저희가 알 바 아닙니다. 그러니 평가보고서가 엉망이라고 판단해서 reject하면 그 센터의 장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 저희에게 complaint할 일이 아닙니다. 삼청업체의 문제는 하청업체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 원청업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여기에 전문가의 도리가 어떻고, 관례가 어떻고 하는 푸념이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가끔 이런 냉정한 사회 시스템을 모르고 전문가입네하며 자신이 속한 전문가 집단의 social skill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참 한심합니다. 심리평가보고서는 불가침의 성역이 아닙니다. 누구든 비판할 수 있고 특히 임상심리학자는 더욱 그렇습니다. 무조건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떼쓰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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