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출범하기 이전에 사행사업체에서 운영하던 도박중독 치료기관만 존재하던 시절에는 이 문제를 염려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상당 수 기관에서 각자 알아서 국가 공인 자격증이나 엄격한 수련 과정을 통해 배출된 전문가만을 채용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그런지 도박중독 회복자가 치료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요(제가 아는 한 전국적으로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단도박 모임이야 치료자가 아닌 협심자들에 의해 유지되는 수평 모임이기 때문에 오랜 단도박 기간을 유지하는 협심자가 치료자 행세를 하는 극소수의 잘못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웠고요.
그런데 사감위가 출범한 이후 도박중독전문가 양성과정을 개설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단지 수십 시간의 교육만 받으면 자격증을 주기 시작했고 이 자격을 가진 도박중독 회복자가 실제로 치료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현장 적응 훈련도 없이 곧바로요. 몇 명을 제외하고는 강사의 대부분이 도박 중독 현장에 대한 경험이 없는데다 알코올 중독 전문가 양성 과정을 벤치마킹해서 급조한 나머지 도박 중독 현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강의만 받은 사람들이 도박중독자를 치료하게 된 것이죠.
혹자는 말합니다. 도박에 중독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도박 중독자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리지 않겠느냐고.
맞습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장점입니다. 대부분의 치료자는 도박에 중독된 경험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도박중독 치료라는 것이 그런 공감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박중독 치료는 도박중독의 다양한 기전과 원인 분석, 도박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있어야 하고 다양한 심리치료적 기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부부 갈등이나 가족 갈등 해결을 위한 couple therapy, group therapy 경험도 있어야 하고 특히 우울, 불안, 성격 장애 등 정신병리적 지식과 함께 이러한 공존 장애를 평가할 수 있는 심리평가 능력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임상심리학자들은 중독 분야, 특히 그 중에서도 도박 중독을 심리치료 분야의 막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전문성과 노하우가 필요한 힘든 분야라는 뜻입니다. 그냥 도박 중독에 대한 얄팍한 지식만 갖고 뛰어들어서는 안 되는 분야라는 말이죠.
그런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암 회복자가 암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박중독 회복자는 치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전문 기술과 지식을 갖춘 이후에 하라는 겁니다. 내가 걸려봤으니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안이한 생각만으로 다른 내담자의 회복과 치유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우울증에 걸려봤다는 것만으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종합병원에서 3년 동안 치열한 수련을 마치고 전문가가 되어 도박중독 분야에 입문하였을 때 적어도 3년 동안은 막중한 책임감에 상담을 할 때마다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박중독 치료는 사명감과 각오만 갖고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전문 지식과 제대로 된 치료 기술, 사명감을 모두 갖춰야 하는 분야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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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미루어 짐작하는, 정작 도박자의 가족이 상담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도박 중독이 과연 나을 수 있는 병인가요?"입니다.
대중 매체는 연신 도박 중독이 불치병이며 몇 십년이 흘러도 재발하는 무서운 병이라고 도박 중독의 폐해를 강조하는 선정적인 나팔을 불기 바쁩니다. 단도박 모임에서도 완치라는 말을 쓰는 걸 두려워합니다. 도박 중독은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니 단도박 모임을 절대로 빠지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하물며 도박 중독이 과연 나을 수 있는 병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 치료자들도 있습니다.
심리학에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와 반대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용어인데 희망을 잃거나 더 나빠질 것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실제로 병이 더 악화되거나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 걸 말합니다.
도박 중독 치료에도 어김없이 노시보 효과가 작용합니다. 당연히 완치된다고 생각해도 치료하기 쉽지 않은 병이 도박 중독인데 절대로 완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제대로 된 치료 효과가 나타날 리 만무하죠.
단도박 모임에서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해 도박 중독을 완치가 없는 병이라고 이야기하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초심자와 그 가족을 좌절시키고 싸워보기도 전에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첫 단도박 모임에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더 좌절했다고 보고하는 가족들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제가 볼 때 단도박 모임을 그렇게 오래 다니면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는 협심자는 단도박 모임의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도박 중독이 절대로 나을 수 없는 병이라고 단정짓고 지레 겁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다른 글(
'단도박이 아니라 탈도박이다' 참조)에서 저는 단도박이 아니라 탈도박이라고 부르자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도박 중독 치유는 도박을 하지 않는 단도박 기간을 단순히 연장하거나 도박을 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과 마음가짐으로 무장한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탈도박하게 되면 더 이상 재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치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도박 중독은 절대로 불치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박 중독은 분명히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재발에 주의해야 하는 병임에는 틀림없지만 두려움에 떨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박 중독이 불치병이라고 믿는, 그래서 평생 재발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치료자는 도박 중독자와 그 가족을 상담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이 없다고 믿는 목사가 구원에 대해 설교하면 되겠습니까? 자살 관련 분야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Paul Quinnett이 한 말, "자살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상담자는 자살하려는 사람을 상담하지 마라"는 말은 도박 중독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도박 중독이 나을 수 없는 병이라고 믿는 치료자는 도박 중독자와 그 가족을 상담하지 마세요! 그것이 오히려 도박자와 가족을 돕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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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은밀한 중독'이라 불리듯이 도박 중독은 모든 걸 감추고 숨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치유 과정에서 가족들이 대위 변제를 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뒤로 숨어서 남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하고 무조건 의지하는 도박자를 책임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함이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박 문제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문제를 감추고 자신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고자 하는 도박자의 시도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치유의 모든 것은 도박과 관련된 모든 것을 투명하고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에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박자가 자신의 도박 문제를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부끄럽더라도 꿋꿋하게 이겨내겠다는 자세로 버티기 시작할 때 전환점이 생깁니다.
단도박 모임(GA)에 나가고 전문기관에서 상담을 받는 건 도박자에게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닙니다. 어둠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 있는데 시간만 되면 억지로 햇볕에 노출시키는 것과 같은 불쾌감을 유발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도박 중독으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는 기미를 보이면 도박자는 상담 기관이든 단도박 모임이든 나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이런 꺼림칙한 마음과 싸울 수 있을까요?
자신의 회복을 자랑하러 나가세요. 자주 나가는 단도박 모임의 협심자를 부러워하게 만드세요. 상담자를 경탄하게 만드세요.
절대로 도박을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내가, 절대로 변화하지 못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못 나올 것 같았던 내가 이렇게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시동을 걸었노라고, 아직은 미약하지만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노라고 자랑하세요.
진정한 치유는 내면에서 시작되지만 자랑은 진정한 치유를 이끌어내기 위한 마중물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회복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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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병의 특징이기 때문에 치유가 어려운 겁니다. 바꿔 말하면 도박자가 자발적으로 단도박 모임에 나가거나 전문기관에서 상담을 받기 시작하면 이미 치유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도박 중독 뿐 아니라 모든 중독의 공통점이기도 한 문제 부정(또는 부인)은 임상가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치유 과정에서 중요한 관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막상 치유가 시작되면 도박자나 상담자 모두 마음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항상 순방향으로만 진행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뒤로 퇴보하거나 속도가 늦춰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특히 치유가 순조로워서 단도박 상태를 비교적 쉽게 유지하고 도박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쉽게 대응하게 되면 전에도 한번 말씀을 드린 것처럼 자만심과 싸우는 것이 오히려 핵심 문제로 부상하게 됩니다.
단도박 모임을 나가면서 자신감이 붙고 상담에도 익숙해져서 웬만한 도박 충동에도 끄떡없거나 도박 충동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수준이 되면 이제는 혼자서도 충분히 도박을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만심이 머리를 들게 됩니다.
그러면 단도박 모임과 상담에 지각하거나 개인적인 일 핑계로 한번 두번 빠지게 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말도 없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물론 단도박 모임의 협심자나 상담자가 챙기기는 하지만 공교롭게도 연락이 되지 않거나 하면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가족의 중요성이 이 시점에서 부각되는데
상담에 빠진 것 자체를 문제삼지 말고 상담자와 충분히 상의하여 합의 종결하였는지를 물어보고 그렇지 않다면 상담을 그만두더라도 반드시 상담자와 합의하여 공식적으로 종결하도록 도박자를 설득하세요.
공식적으로 합의 종결하지 않으면 연결 고리가 끊겼기 때문에 혹시 재발하더라도 도박자가 다시 상담을 재개하기가 매우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치유 과정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중단한 것이기 때문에 도박자가 스스로 도박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말하는 '불완전한 회복' 상태에서 그만두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상담을 그만 받더라도 반드시 상담자와 상의하여 합의 종결할 수 있도록 점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공적인 치유를 위해 가족이 꼭 챙겨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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