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여담이지만 저는 아이 문제로 심리평가나 상담을 받으러 온 부모의 문장완성검사에서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하게 키우는 것'이라는 응답을 발견하면 주의하는 편입니다. 경험적으로 부모-자녀 관계가 문제인 가정이 많았거든요.
문구 자체만 놓고 보면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자기 다짐처럼 느껴지기에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사실 저 문장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이의 기질, 아이가 바라는 것, 아이가 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내 아이를 이렇게 저렇게 키우겠다는 다짐 속에는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욕구와 희망과 꿈이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는거지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았다손쳐도 부모의 기준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와 욕심이 먼저, 아이의 욕구와 꿈은 나중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아이의 행복이 우선적인 기준이 아닌 자신의 대리 만족을 위한 욕구의 투사 대상으로써 아이를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못했으니 우리 아이는 그런 걱정 안 하고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자'고만 욕심낸다면 정작 아이가 공부 대신 다른 것을 하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허락하고 지원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내 대신' '내가 못한' 공부를 해야 하니까요. 이런 투사는 아이와 부모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정말 불행한 일이죠.
다음으로는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이라는 질문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넓게는 나에게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다짐이 가장 바라는 것인 부모는 자신에 대한 바로 그것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고 나와 다른 존재인 내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기대'를 하게 되고 제가 예전에 했던 포스팅(
관계는 '기대' 때문에 망하고, 불행은 '비교' 때문에 느낀다)에서처럼 부모-자녀 관계를 망치게 됩니다.
칼릴 지브란이 자신의 시(
'자녀는 부모가 키우는 분재가 아니라 스스로 크는 소나무이어야 합니다' 포스팅 참고)에서 말했듯이 부모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줄 수는 없으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이 참 부모의 역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 아이가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꿈, 다른 희망을 품고 있다면 세계적인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처럼 다른 북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와 같은 북 소리를 듣고 같은 박자에 흥을 느끼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다른 리듬을 타는 내 아이를 보는 것도 즐겁고 보람된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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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간 관계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두 가지로 '기대'와 '희생'을 꼽는다는 트윗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합니다만 유효성과 가능성은 별개의 것이라는 게 항상 문제죠.
혹자는 희생은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 사이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있냐며 반문합니다. 기대가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면서요.
개인적으로는 굳이 기대를 하지 않더라도 현재에 충실하게만 살면 충분히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번 포스팅에서 다룰 내용은 아니니 통과하고요.
기대를 내려놓기가 정 힘들다면 대상을 바꿔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남에게 기대하지 말고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죠. 남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기대하면 좌절을 맛볼 확률이 매우 높죠. 간혹 기대를 충족한다손 쳐도 일시적인 안도감을 느낄 뿐이지요.
자신에게 기대를 해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남에게 기대하는 것만큼 불확실성이 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믿음에 기반한 기대는 성취를 향한 연료를 제공할 수도 있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성공해 있거나 성공 여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든 꼭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목표 지향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작은 기대를 하는 것도 기대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다면 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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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 적에 어른들이 꿈이 뭐냐고 아이들에게 물으면 "대통령", "간호사", "선생님", "대장"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꿈이 되고 싶은 목표였던게지요.
요새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몰라요"가 가장 많습니다. 그래도 차라리 되고 싶은 목표를 이야기했던 예전 아이들이 그립죠.
도박 중독자에게 도박 빚을 갚는 것과 잃어버린 돈을 복구하는 것을 빼고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많은 도박자들이 가족과 알콩달콩 사는 거라고 합니다. '알콩달콩'이라는 표현은 도박자들끼리 어디에 모여서 배우는지 빠지지도 않고 항상 등장하는 단골 메뉴입니다.
근데 가족과 알콩달콩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다시 물으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도박 밖에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무한반복의 루프입니다.
과연 꿈이란 뭘까요?
저는 꿈을 신기루라고 생각합니다. 틸틸과 미틸(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잘못된 용례랍니다. Bloodlust님의 댓글 참조)이 곁에 두고 줄창 찾아다녔던 파랑새와 같은 것이죠. 보기에는 근사해 보이지만 실체도 없는 것을 좇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드는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발끈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꿈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괴로움을 잊고, 꿈을 이루기 위해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꿈이 있기 때문에 자기 발전도 있는거라고.
그럼 묻겠습니다. 왜 현재의 괴로움을 잊고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자기 발전을 하려는 건가요?
꿈을 이루고 나면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이라고 쓰고 착각이라고 읽는다) 때문 아닌가요?
10억 원을 따면 행복해질 것 같고 그러면 도박을 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도박 중독자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정말 꿈을 이루고 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만약 10억 원을 모았는데, 사장이 되었는데, 사법 고시에 패스했는데, 정작 꿈을 이루었는데 행복하지 않다면 어떡하실건가요?
저는 꿈을 꾸지 않는 인생이 비참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자신의 곁에 있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꿈을 꾸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꿈을 꾸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면 꿈이 필요없을 것도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제가 이 글의 맨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꿈이 어떤 목표라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친듯이 달리기 전에 바로 곁에서 미소짓고 있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우선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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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단도박이 중요할까, 삶의 변화가 더 중요할까' 포스팅에서 단도박보다는 삶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아무리 도박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결국 다시 도박에 손을 대게 된다는 것이 그 글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도박 중독자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는 걸까요?
'바닥치기의 효과는 잠재된 희망에 달려있다' 포스팅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무엇보다도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삶의 목표를 세움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도박 중독자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보세요. 삶의 목표를 갖고 있는 도박 중독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뚜렷한 미래가 없습니다. 그저 불확실한 도박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불안정한 미래가 존재할 뿐입니다.
단도박보다는 삶의 변화가 중요하고 삶의 변화는 삶의 목표를 세워야 가능합니다.
그러니 도박 중독자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세요. 그것이 도박자에게 잠재된 희망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도박자를 부활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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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선 포스팅에서 저는 끝까지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도박 중독자가 '바닥을 치도록' 해야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닥치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지 않았기에 이 포스팅에서는 그 전제 조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바닥치기'에 대해 설명하면 많은 가족들은 도박자가 바닥을 치고 나면 곧바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치료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줄로 착각합니다(물론 그런 도박 중독자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단순히 바닥을 치도록 도박자에게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조금 더 교묘하게 '거리 두기'와 '선 긋기'를 통해 도박자를 압박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게다가 이것도 도박일 수 있습니다.
바닥에 내려간 도박자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굳이 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죠. 자신의 도박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대신 지지 않기 때문에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때, '아, 나는 진정으로 도박 중독자이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돌아갈 집이 없다면, 내민 손을 잡아줄 사람이 곁에 없다면,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이 끝없이 지속될거라는 처절함을 경험한다면, 도박자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수 있습니다.
물 무서운 줄 모르고 강가로 달려가는 철부지가 물을 먹도록 잠시 내버려두는 일은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는데 효과적일 수도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그대로 가라앉아서 세상을 등지듯이,
바닥을 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더 이상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도박자는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치료자와 도박자의 가족은 도박자가 바닥을 치기를 기다릴 때, 방치하고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의깊게 도박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손을 내밀 타이밍을 노려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부여잡고 도박자가 주위를 둘러볼 때,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바닥치기'의 효과는 도박자에게 보여주는 '잠재된 희망'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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