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본적으로
심리평가 실시의 타이밍과 검사도구의 선정을 평가자가 수검자와 상의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지만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상황이 개선될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진단을 위한(엄밀하게 말하면 약물 치료를 위한) 심리평가의 조기 실시와 병원 수익 극대화를 위해 개발된 battery 체계는 그야말로 병원 장면에서나 필요한 것이고 정작 수검자의 사정(경제적이든 심리적이든)을 고려한 것이 아닌데 상담 장면에도 충분한 고민 없이 무분별하게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로 심리평가에 대해 문외한인 수검자가 이 검사를 받겠다고 '찍어오면' 평가자는 그대로 실시해야 하고, 불필요한 검사를 빼거나 꼭 필요한 검사를 추가하도록 검사 과정을 manage할 수 있는 권한도 시간도 없으며, 심한 경우는 심리평가를 받는 수검자와 검사를 실시하는 임상가, 심리평가를 의뢰하는 접수자가 아무런 의견 조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심리평가를 실시하고 있고 이런 '엉터리' 심리평가의 수효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일입니다.
너무도 중요하기에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조직의 효율성을 우선하는 시스템은 절대로 수검자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얼핏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더라도 전담 상담자가 수검자와 상의해 어떤 심리검사를 실시할 지, 언제 실시할 지를 신중하게 고려하는 게 정답입니다. 시스템에 의해 당사자인 수검자와 상담자가 배제되는 시스템은 그야말로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일 뿐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담자가 심리평가의 실시 타이밍과 실시할 검사도구 선정의 권한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어떤 심리검사도구의 조합이 수검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제안하려 합니다.
검사도구의 조합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선별심리평가와 종합심리평가가 그것입니다.
종합심리평가는 의뢰 사유가 주요 정신 장애의 변별 진단과 그에 수반되는 약물 치료까지 고려해야 할 때 주로 시행합니다. 주요우울장애, 조현병,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이 종합심리평가가 필요한 대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별심리평가는 즉각 종합심리평가를 실시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때 대략적인 심리상태를 살펴보고자 할 때 진행하며
일반적으로 MMPI-2/A, SCT 조합을 많이 사용하지만 저는 TCI/JCTI, MMPI-2/A, SCT 조합을 더 많이 사용하고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상담 현장에서는 기질/성격 상의 어려움을 가진 내담자가 많이 방문하는데 MMPI-2/A, SCT 조합만으로는 이를 감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굳이 빼야 한다면 차라리 선별심리평가에서 SCT를 빼는 게 낫습니다. 이건 이제부터 말씀드리려는 교차 검증의 중요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간혹 본인에게 익숙한 문장완성검사나 그림 검사(HTP, KFD 등)만 단독으로 실시해도 되지 않냐고 물어보는 선생님이 계신데 그렇게 실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문장완성검사는 반 투사 검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수검자가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응답 내용을 왜곡, 윤색, 조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림 검사는 어떨까요? 그림 검사 역시 로르샤하 검사처럼 중립적인 자극을 사용하는 완전 투사검사가 아니라는 약점도 있고 무엇보다 상당한 경험을 쌓지 않으면 구조적 해석이 쉽지 않다는 제한점이 있습니다. 또한 비구조화된 검사의 특성 상 평가자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결과만 선별적으로 선택할 위험성도 있기에 문장완성검사나 그림 검사와 같은 투사법 검사는 반드시 MMPI-2/A와 같은 객관적인 검사와 함께 실시하고 의뢰 사유에 대한 교차 검증을 실시해야 합니다.
수검자가 실시 검사가 많아지는 것에 부담을 느껴 거부감을 표시한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TCI/JTCI, MMPI-2/A 조합을 먼저 실시하고 문장완성검사나 그림 검사는 차후에 다시 실시하거나 상담 회기를 활용하여 추가 실시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면 투사법 검사만 단독으로 실시하지 마세요. 반드시 구조화된 검사 결과와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이는 심리평가 초심자이든 충분한 경험을 쌓은 전문가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자만심에 의한 오해석은 오히려 심리평가 실시 경험이 많은 고수에게 더 흔히 일어난다는 걸 감안하면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임상가라면 누구든 주의해야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보고 신뢰도를 확인할 수 없는 TCI/JTCI도 충분한 검사 라포를 형성했다고 확신할 수 없는 한 단독 실시하지 않는 게 안전합니다. MMPI-2/A에서 K, S 척도 상승으로 방어적인 경향성이 나타난다면 TCI의 결과도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특히 성격 차원). 그러니 TCI/JTCI도 MMPI-2/A와 함께 실시하는 게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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