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 임상 심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심리 평가이며 심리 평가의 핵심은 심리 검사 도구입니다. 대학원에서 심리 평가와 관련된 수업을 들으면서, 더 늦게는 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한 1년차 때 손에 쥔 심리 검사는 얼마나 매력적인 것이었던가요. Rorschach 검사 결과를 보면서 피검자의 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전지전능함과 함께 대단한 것이라도 손에 쥔 양 가슴 떨리는 느낌이 한번도 들지 않았던 임상 심리학자는 아마도 없을 겁니다.
물론 좋은 심리검사 도구는 적절히 활용하기만 하면 다른 어떤 도구로도 알 수 없는 한 인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죠. 왜 임상 심리 평가에서는 Full Battery(지능 검사 도구, MMPI, HTP, BGT, SCT, Rorschach)를 강조할까요? 여러 개의 검사를 한꺼번에 실시하고 그 결과를 통합하도록 할까요? 물론 심리 검사 도구마다 측정하고자 하는 심리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의 검사 도구를 지나치게 믿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들어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심리 검사를 할 때 될 수 있으면 피검자의 개인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실시합니다. 그래야 검사자의 주관이나 선입견으로 검사 과정이 오염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검사가 끝난 후에는 배경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려고 합니다. 이전에 심리 검사가 실시되었는지의 유무, 간호 기록지, 병동 기록, 외래 기록, 과거 학교 성적을 포함한 피검자의 개인 신상 정보 등등.
심리 검사는 강력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만능이 아닙니다. 따라서 피검자에 대한 정확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정보가 누락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래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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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병원에서 임상 심리 평가를 진행하는 저는 어떻게든 힘든 군 복무를 빠지고 싶어하는 환자들의 전반적인 특성상 다른 임상 장면과 달리 Malingering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즉 자신의 증상과 문제를 과장하려는 환자들을 정말 문제가 있는 환자와 구분해 내야 하는 것이죠.
며칠 전 저는 병동에 입원 중인 한 사병의 심리 평가를 의뢰받았습니다. Full Battery로 구성되는 종합 심리 평가였습니다. 일병이라는 계급과 26세라는 나이를 제외하고 어떤 개인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검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병동에서 3개월 전 실시한 MMPI와 SCT의 사본은 가지고 있었지요. 검사를 실시하는 도중 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환자가 지능 검사에서 일부러 나쁜 점수를 받으려고 애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CT에서는 매우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쓰던 환자가 말이죠. 검사를 진행하면서 이런 제 의심은 점점 더 짙어졌습니다. 지능 검사를 채점해보니 45 이하의 측정 불가능 수준으로 나오더군요. 이 환자가 정말 이런 수준의 지능을 가진 환자라면 SCT나 로샤, BGT에서 이에 상응하는(이런 결과가 이해되는) 결과가 나왔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검사 결과는 전혀 짝이 맞지 않는 조각들을 모아놓은 모자이크와 같았습니다.
검사가 끝난 후 이 환자에게 SCT와 MMPI를 다시 작성하도록 지시하고(3개월 전 실시한 검사 결과와 판이하게 다르더군요. 기존 증상의 악화나 다른 증상의 발현이 전혀 없었는데에도 말이죠) 병동 기록을 살펴보니 무려 명문대 법학과 4학년을 휴학하고 고시에도 패스를 한 재원이더군요. 이 환자는 이병 때 자대에서 구타를 당한 후 Panic Disorder, PTSD 등으로 진단이 계속 바뀌면서 틈만 나면 휴가를 나가 외부의 local NP에서 진단서를 끊어왔더군요. 고위 공무원인 아버지는 국방부에 3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내면서 의병 제대를 신청했고요. 제가 검사를 하기 3주 전에는 서울의 유명 종합병원에서 종합 심리 평가도 받았습니다.
그 결과의 사본도 제가 보았는데 임상 심리학도라면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supervisor가 검토를 한 보고서에 떡하니 정신 분열병(Schizophrenia)으로 진단이 되어 있더군요. 이 supervisor의 실력이 엉터리라서가 아니라 보고서의 주된 호소(Chief Complaints)를 보니 영락없는 정신 분열병의 증상들이고, 검사 결과도 정신 분열병을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많이 해 왔더군요. -_-;;; 이 병원에서는 피검자가 군인이고 휴가 중인 것을 감안하여 개인 신상 기록 등의 수집을 생략하고 피검자의 호소 증상과 심리 검사에만 의존하여 진단서를 발급하였던 것입니다.
이 환자는 그 병원에서 심리 검사를 받기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증상을 호소한 적이 없었고 현재 군 병원 정신과의 보호 병동에서 지내면서 아무런 문제 행동이나 증상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치료진이 보지 않으면(실제로는 CCTV로 보고 있지만) 웃으면서 잘 지내지만 치료진만 나타나면 동작을 멈추고 땅만 바라보는 자세를 취한답니다. -_-;;;
당연히 저는 진단 없이 환자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드러내는 행동을 강조해 보고서를 작성했지요.
이 글의 교훈은 그렇습니다. 심리 검사 도구는 분명 강력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검사의 결과들이 예상 가능한 profile을 지나치게 많이 벗어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다양한 정보원과 기록을 통해 피검자를 이해하는데 빠지는 정보가 없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앞의 경우와 같이 피검자의 자기 진술과 몇 가지 심리 검사 도구에만 의존해서 잘못된 진단을 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심리 검사 도구는 만능이 아닙니다. 분명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명확히 알고 사용하는 사람의 손안에서만 제대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과 충분한 경험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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