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 관계 갈등 해결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부부, 연인, 친구사이 같은 사적 관계는 말할 것 없고 업무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을 촉발시킨 사건은 내용 때문이었을 수 있으나 이미 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서는 내용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뤄야 할 모든 것은 오로지 감정 뿐입니다.
예를 들어 가사 분담을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결정한 맞벌이 부부가 있다고 해 보죠. 남편이 집안일을 맡은 날인데 그 날따라 갑자기 야근이 잡혀 퇴근이 늦어지는 바람에 집안일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피곤에 지쳐 먼저 들어온 아내가 엉망인 집안 꼴을 보고 기분이 상해서 역시나 야근에 지쳐 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쏘아 붙입니다.
여기에서 아내가 당신이 집안일을 담당하는 날인데 무책임하다,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해라, 나라면 사람을 써서라도 내 책임을 다햇을 것이다 라고 하거나 남편이 내가 놀다가 집안일을 방기한거냐, 맞벌이라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걸 왜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냐, 하루쯤 집안일이 밀리는게 대체 뭐가 문제냐 네가 너무 예민하고 청결벽이 있다 라고 반박하면서 싸운다고 해 보죠.
이 갈등 상황에서 다뤄야 할 내용은 뭘까요? 남편의 야근? 지금부터 처리해야 할 집안일? 업무량과 집안일의 부조화? 남편과 아내의 입장 차이?
앞으로도 비슷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니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합리성과 논리를 따지는 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하는 수고를, 그걸 감내하는 고마움을, 미리 이야기하지 못한 미안함을 다뤄야 하는 것이죠. 거의 대부분은 감정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서로 어느 정도 수준에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고 누군가 먼저 포문을 열고 나면 그 감정을 침착하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자신의 상한 감정을 알아달라고 하는거지만 포탄이 떨어져 상처를 입고 나면 반격을 하거나 방어를 하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그래서 이야기가 겉돌기 시작합니다.
특히 기존에 쌓인 감정까지 한꺼번에 폭발시켜 모든 게 당신 때문이라고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걸 누그러뜨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는 오히려 역풍을 불러 일으키는데다 타이밍을 잡는 것도 쉽지 않고요.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될 수도 있죠.
이 때 사용해 볼 수 있는 효과적인 멘트는 이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이 풀리겠어? 꼭 풀어주고 싶은데 방법이 잘 생각 안나"
이미 감정이 격화되었거나 핵심 감정을 다루지 못하고 이야기가 겉돌 때 유용한 이 멘트는 주의를 문제 해결 방법으로 돌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해결 방법이 있다면 혹은 마음에 두고 있는 방법이 있다면 스스로 꺼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효과가 있고요. 설사 방법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뾰족한 해결 방법 없이 그냥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 자체가 목적인 갈등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해결 방법이 없다는 걸 상대방이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해결 방법이 실제로 있든, 없든 간에 사용할 수 있는 멘트입니다.
맨날 똑같은 감정 싸움이 반복되고 한번 시작되면 금방 끝나지 않는 갈등으로 지친 분들은 한번 사용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 다만 냉소적인 감정 상태에서만큼은 절대로 저 멘트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에게 비아냥처럼 들리기 때문에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하셔야 합니다. 뭐든지 진심을 담는게 중요하죠.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112
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된 주제 중 하나로 sociotropy-autonom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두 개념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 sociotropy : 대인 관계가 중요한 성격 특질
* autonomy : 독립성이 중요한 성격 특질
그 유명한 Aaron T. Beck이 이 congnitive-personality contructs를 측정하기 위해 Sociotropy-Autonomy Scale(SAS)을 만들기도 했지요. 물론 우울 장애에 대한 risk factor로써 살펴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 효능감이 높고, 목적 의식이 강하며,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경향도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향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 이들을 독단적이거나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향 때문에 이기적이라는 오해를 왕왕 받기도 합니다만 자율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며 그 과정을 자신이 통제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획득하게 될 확률이 큰 것이죠.
이기적인 사람 중에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는 있지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질-성격 검사인 TCI를 빌어 설명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이냐의 여부는 자율성 차원보다 연대감 차원이 더 많이 좌우합니다.
자율성 차원이 high 수준일 때 연대감 차원이 high라면, 자기 초월 차원의 정도와 상관없이 HHH(창의적인), HHM(성숙한), HHL(조직화된) 성격 경향을 보입니다. 모두 이기심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 유형이죠. 하지만
연대감 차원이 low라면 HLH(광적인), HLM(괴롭히는), HLL(독재적인) 성격 경향을 나타냅니다. 세 성격 유형 모두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만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TCI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반영하는 성격 차원은 자율성이 아니라 연대감입니다.
사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통제받는 걸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가 명령받는 걸 워낙 싫어하니 자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지도 잘 이해하거든요. 그래서 아랫사람이 알아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거기에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까지 낮은 사람이라면 나만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마음까지 강하겠지요(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율성이 강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기적이라는 사회의 편견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TCI의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이 극도로 높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글마저도 신경 안 쓰시겠지만요;;;;
태그 -
Aaron T. Beck,
autonomy,
risk factor,
SAS,
sociotropy,
TCI,
기질,
사회 심리학,
사회적 민감성,
선택,
성격,
연대감,
우울 장애,
의지,
자율성,
책임,
통제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103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선현들의 말씀,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이 이미 너무나도 많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주변만 둘러봐도 별로 없는 것 같더군요. 오히려 걔 중 제가 제일 행복하달까요?;;;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고자 할 때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을 참 많이 듣게 됩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의미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되는데 비교는 행복함을 느끼는데 큰 저해 요소로 작용하니까요.
이보다 더 행복을 방해하는 게 조건을 거는 겁니다.
'월급이 얼마 이상 된다면 행복할텐데'
'수능을 잘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면 행복할텐데'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행복할텐데'
'아이를 가진다면 행복할텐데'
'이번 인사에서 승진을 한다면 행복할텐데'
이러이러한 조건만 충족한다면 행복해질 것 같다는 조건을 걸자면 끝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게다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설사 조건을 충족했다해도 그 기쁨과 행복은 절대로 오래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조건을 또 추가하게 되고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뒤로 미루는거지요.
그러니 행복하고 싶으면 조건을 설정하면 안 됩니다. 행복과 조건 충족은 절대로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조건을 거는 순간 행복으로 가는 발걸음이 느려질 뿐입니다.
조건을 걸지 않는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 때까지는 이미 설정된 조건을 적극적으로 없애는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만약
설정된 조건을 없앤다고 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오히려 그 조건을 적극적으로 없애고 피해야 합니다. 행복해질 수 없다는 내 안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장애물이니까요.
'월급이 얼마 이하여도 행복할 수 있다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면'
'여자 친구를 사귀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면'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해도 행복할 수 있다면'
'이번 인사에서 승진하지 못한다 해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조건들이야말로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내 행복을 방해하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92
제목에는 부부용이라고 했지만 갈등이 일어나는 2자 관계라면 상대방이 배우자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부모 형제가 되었든 간에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소위 대화 기술을 가르치는 많은 책들이, 때로는 상담에서도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감적 경청을 해야 한다, 입을 열지 말고 귀를 열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듣기보다 말하기가 더 중요하다고요. 경청을 하려면 말을 하는 상대방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둘 다 똑같이 경청만 하려고 한다면 무슨 소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서로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격화되는 게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첫째.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해 억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말하는 비율의 압도적 차이가 생기므로(그 압도적 차이를 일시에 좁히려고 상대방이 감정을 실어 말하는 등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 둘째.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잘못된 말하기 방법(비아냥, 냉소, 과잉 일반화, 허수아비 공격, 논리적 비약 등). 즉, 둘 다 말하기 방법의 문제입니다.
결코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말하기가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말하기는 생각하기를 전제하고 있고(아무런 생각없이 말한다는 통념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마세요. 그런 무뇌인간은 거의 없습니다),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감정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전달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말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말을 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 대화와 마음의 창을 닫은 문제는 말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 제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몇 가지 원칙 또는 팁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내가 말을 해야 상대방이 듣는다. 일단 말을 시작해야 한다.
: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나서 그 다음에 이야기해야지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전례가 있지 않나요?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꼬투리를 잡을 준비를 하고 듣게 됩니다. 반대로 꼬투리를 잡히기 싫어서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보세요.
둘째. 내가 다 말하기 전에는 대화가 끝난 것이 아니다.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의 말을 듣자.
: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 이유는 공감적 경청 따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공감적 경청은 전문적인 상담자나 대화 기술을 충분히 훈련한 사람들이나 가능한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상대방의 말을 듣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 위해서입니다. 돌려서 말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지 않았다면 대화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말을 들으세요. 그 다음에 내가 말할 순서가 올 겁니다. 남자에게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후퇴할 동굴이 필요하다는 말 따위도 믿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동굴은 필요합니다. 단지 감정적으로 폭발할 것 같을 때 열을 잠시 식히기 위해서 필요한거죠. 감정이 가라앉으면 곧 다시 돌아와 말하기를 재개해야 합니다.
셋째. 말할 때 상대방이 나를 알아줄거라 기대하지 말고 내 말만 하자.
: 이게 가장 중요한 팁인데 보통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말할 때 상대방이 내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데 그 기대가 당연히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상대방이 하는 말은 듣지 않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려고 노력하는 게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자꾸 이야기하지만 공감적 경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엄청난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해요. 좀 더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말을 할 때 상대방이 이렇게 저렇게 반응했으면 하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 겁니다. 만약 아무리 해도 그런 기대를 내려놓을 수 없다면 당신은 상대방과 대화를 할 게 아니라 전문 상담자와 상담을 먼저 해야 합니다.
넷째. 절대적인 대화의 양을 늘려라. 그게 꼭 양질의 대화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내용이 더 낫다.
: 말을 줄이는 이유 중 하나는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하려고 머릿속에서 걸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필터를 작동시키면 점점 말 수가 줄어들 뿐입니다. 좋은 말이 10%에 불과하더라도 10개 중 1개보다는 100개 중 10개가 훨씬 낫다는 걸 기억하세요. 일단은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의 연결 고리가 생기게 됩니다. 나머지 90개의 말 실수는 어떡하냐고요?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감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지만 그런 실수는 말을 할수록 점점 줄어들게 되어 있고 어차피 말을 계속 해야 말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깁니다. 그러니 10%의 비율을 좀 더 늘리고 내용의 quality를 높이는데 주력하는게 더 효과적입니다.
다섯째. 갈등을 두려워하지 마라.
: 이 글을 주의깊게 읽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일테고 그 사람과 관계 개선을 하고 싶어서일겁니다. 평생 꼴보기 싫은 사람이라면 모든 부담을 무릅쓰고 일부러 말을 꺼내려는 시도 자체를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그러니 말싸움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런 두려움을 누르고 자꾸 말해야 다름과 차이를 줄일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할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싸움이나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는 방법이 건강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여섯째. 말하기에도 기술과 연습이 필요하다.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히자.
: 앞서 말씀드린 다섯가지 원칙과 팁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데도 뭔가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 들고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드디어 말하기 기술을 익힐 시간입니다. 비폭력 대화법, I message로 말하기 등등 말하기 기술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이 블로그에 소개한 책만 몇 권 참고해도 충분합니다. 다만 모든 기술은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수 있을때까지 반복 훈련해서 체화해야 한다는 것만 명심하세요. 머리로만 아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스텝을 계산하면서 춤을 추는 건 춤을 추는 게 아니듯이 어떤 기술을 사용할 지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다면 제대로 된 말하기가 아닙니다. 음악을 들으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결국은 중요한 건 이겁니다.
일단 말하세요. 나머지는 그 다음입니다. 입을 닫지 마세요. 그럼 마음이 닫힙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83
부모님 사랑은 내리 사랑이자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들 합니다. 부모가 되어 봐야 아낌없이 주는 부모님의 바다와 같은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부모의 사랑은 자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일까요?
저는 그런 사랑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상담일을 하면 할수록 무조건적인 사랑은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짙어지거든요.
자녀가 사소한 일로 감정이 폭발해 부모님은 항상 나를 무시한다고 울분을 토하는 걸 듣고 황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온 부모님이 계십니다. 당신은 자녀를 무시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한번도 없다고 억울하다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왜 그 자녀는 부모님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그건 그동안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왔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부모가 나에게 조건부 사랑을 줬다고 느꼈는데 그 사랑을 받기 위한 기대를 충족할 능력이 본인에게 없으니 답답했던 것이죠.
부모와 자식의 이런 생각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이런 차이를 보이는 가족이 정말 많습니다. 저는 이럴 때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순서대로 합니다.
1. 자녀를 사랑하시나요?
: 놀랍게도 이 질문부터 선뜻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모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부모가 별로 없거든요. 물론 자식을 사랑하는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2. 사랑한다면 왜 사랑하시나요?
: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부모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사랑한다고, 부모가 자녀를 무슨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지만 결국 부모가 스스로의 마음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사랑하는 이유가 무언가는 반드시 있더군요.
3. 자녀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도, 내 기대에 반하는 삶을 살아도 사랑할 수 있나요?
: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해 진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부모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질문을 들은 모든 부모가 주저하거나 대답을 꺼리고 피하더군요.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 면을 세워주고, 내가 바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원하는 배우자를 얻고, 내가 봤으면 하는 손주를 안겨 주고, 내가 원하는 효도를 한다면 그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반대라면요? 그래도 사랑할 수 있나요?
세 질문에 모두 "예"라고 선뜻 대답할 수 없다면 조건부 사랑이 아닌지를 의심해 보세요. 즉,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줘야,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사랑하겠다는 메시지를 나도 모르게 주고 있지는 아닌지를요.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그건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겁니다. 게다가 그 투자는 상대방이 원치 않은 것이라는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앞서의 예로 돌아가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울부짖는 자녀는 이미 부모의 속마음을 읽고 있던 겁니다. 그냥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 달라고 절규하는거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다쳤거나 마음이 약해진 분들이 대부분이니까요. 마음이 건강한 분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어야만 조건부로 사랑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모와 그런 부모의 기대가 너무도 부담스러워 그 사랑을 굴레처럼 느끼는 자녀의 관계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일방적인 관계지요.
부모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욕심과 기대를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기대가 자신도 모르게 대물림되어 자식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때, 그 때가 되면 비로소 진정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포스팅에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 국한해서 말씀드렸지만 연인, 배우자, 친구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면 별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아무런 기대 없이 사랑하고 있는지를요, 상대방이 내 기대에 반하는 삶을 살아도 사랑할 수 있는지를요. 만약 그렇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는겁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59
제목만 보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실텐데 (부모가 보기에) 통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에만 빠져 있는 자식을 답답해 하는 부모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부모가 원하는 것은 자식이 게임을 그만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일텐데요.
"그놈의 쓸데없는 게임 좀 집어치고 이제 공부 좀 해라"
"그렇게 공부 안 해서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냐"
"엄마 친구 아들은 지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잘만 한다던"
"공부란 게 다 때가 있는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빠 말 들어라"
등등의 잔소리를 하기 쉽습니다. 위에서 예를 든 잔소리들은 긍정적 or 부정적 내용, 비교, 협박, 미래 예견 등 서로 다른 내용을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공부'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것이죠.
부모의 의도가 자식이 공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니 공부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하실 수 있지만 도리어 말하고 싶은 의도가 들어간 그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그 말이 의도하는 효과는 물 건너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노골적인 의도가 실린 단어는 반복적인 사전 경험에 의해 이미 부정적인 정서를 유발하게끔 조건화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공부라는 낱말은 듣기만 해도 짜증, 혐오감,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이 자동으로 유발됩니다. 그러니 '공부'라는 단어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이 아무리 긍정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해도 차단되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녀가 공부를 하게 만들고 싶을수록 '공부'라는 단어를 빼고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요새 애들 뭐 좋아하냐?"
"쉬는 시간에는 주로 뭐 하니?"
"직장이 아닌 직업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는데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차근차근 생각해봐라"
"맨날맨날 놀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위의 말만 들으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단어가 빠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 말을 하는 부모의 의도는 결국 공부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지요.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 끌고 나가려면 '공부'라는 단어가 만든 차단벽을 일단 우회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라는 단어가 부모가 아닌 자녀의 입에서 절로 나올 수 있도록, '공부'가 낳는 두려움, 불안 등의 심리적 불편감을 스스로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만 빼고 말하는 역발상의 전략이 가끔은 더 깊은 수준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54
시중의 많은 자기계발서가 단점을 찾아내 분석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단점을 극복해야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제가 그런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표적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저는 단점을 극복할 시간과 노력이 있다면 차라리 그걸 장점을 극대화하는데 사용하라고 늘상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점보다 장점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단점을 극복하는 것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쉽다. 이건 실질적인 이유인데요. 비유를 들자면 장점을 극대화하는 건 잘 달리고 있는 자동차를 가속하는 것과 같고 단점을 극복하는 것은 반대 방향으로 긴급 유턴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갑자기 유턴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위험하며, 차에도 무리를 주게 됩니다.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나 달리는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죠. 오히려 어려운 것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아는 겁니다.
둘째. 나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장점은 그야말로 내가 잘하고 익숙하고 능수능란한 것이고 남들보다 잘 하는 경쟁력입니다. 그러니 장점을 배가할수록 일이든, 대인관계이든 간에 나에게 이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완벽하게 극복되기 전까지는 손실의 영역입니다. 설사 극복이 되었다고 해도 영점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점의 극복이 장점으로 승화될 수 있을지는 가 봐야 아는 것이죠. 그렇다면 장점(+ 영역)을 극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단점(- 영역)을 줄여서 손실을 최소화하는 게 궁극적인 이득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 번째 이유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셋째. 장점을 극대화하면 단점이 보이지 않는다. 장점이 극대화되면 일종의 후광 효과가 생겨서 단점을 감추고도 남습니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단신의 왜소한 풍체를 가졌다는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칭키즈칸이나 알렉산더 대왕과 어깨를 겨루는 정복자였으니까요. 장점을 극대화할 수록 단점은 사소한 일이 됩니다.
'내가 키가 작다고 사람들이 놀리던데요?', "그건 작은 키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당신에게 장점이 없어서입니다"
넷째. 사람들이 관심있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단점이 더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게 가장 눈에 잘 띄일거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사실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관심 갖고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건 우리의 장점(과 그 장점이 그들에게 주는 이득)이죠. 내가 대머리인지, 엉덩이가 튀어나왔는지, 피부가 지저분한지에 대해 사람들은 전혀 관심없습니다. 내가 글을 잘 쓰는지, 노래를 잘 부르는지, 말을 잘 하는지, 친화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죠.
그러니 신경 쓰이는 단점이 있나요?
그럼 잘하는 것, 장점을 찾아서 그걸 최고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세요. 그러고 나면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게 될 겁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49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우리는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 가능하면 힘들지 않은 일, 하면서 재미있는 일, 남들보다 보람있고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을 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경제가 많이 어려워져서 일할 수 있는 자리만 주어져도 감지덕지인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평생 해야 할 일이라면 가능하면 위에서 나열한 특성들을 갖춘 일을 누구나 하고 싶을 겁니다.
심리학이 인기 있는 분야가 된 지금 심리학을 공부해서 심리학으로 먹고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했고 그러다보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분들의 문의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픈 사람들은 심리학으로 큰 돈을 벌기는 어렵다는 정도는 대체로 알고 물어봅니다. 궁금한 건 이거죠.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호기심과 설레임, 열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심리학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가.
보수 수준, 직업의 안정성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다분히 심리적인 속성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재미나 보람, 열정을 주는 일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건 파랑새를 찾는 것과 같거든요.
우리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을 해도, 아무리 흥분되는 모험을 해도 그러한 즐거움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기준이 평생 할 일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질리지 않고 계속 할 수 있는가'입니다.
어떤 일이든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쉬운 부분과 힘든 부분을 갖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비율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질리지만 않을 수 있다면 결국은 그 안에서 다시 긍정적인 내용, 쉬운 내용, 즐거운 내용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제게는 심리학이 그렇고, 여행이 그렇고, 블로깅이 그렇고, 고양이가 그렇습니다.
심리학과 여행과 블로깅, 그리고 고양이는 질리지 않더군요. 아직까지는요.
그러니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을 한 방에 찾아주는 일을 찾기보다는 질리지 않아서 계속 꾸준히 할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태그 -
고양이,
금수저,
보람,
보수,
블로깅,
심리학,
여행,
열정,
일,
재미,
직업,
질림,
행복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45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러움보다 질투가 훨씬 더 강력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뭔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다는 말을 했을 때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에는 부러움과 질투, 시기심 같은 것들이 있죠. 물론 그 행복의 이유란 것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것이어야만 하는 전제는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행복하다고 하면 뭔 소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당황하게 되어 어떠한 감정을 느낄 여유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의 아는 사람이 승진을 하여 직급도 상승하고 연봉도 크게 올라 요즘 사는 맛이 난다고 자랑하는 말을 들었다고 해 보죠.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강하다면 포기하지 않는 한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내 나름의 행복을 찾아야지'라는 긍정적인 동기 유발자로 작용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습니다. 일종의 플러스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질투는 나를 끌어올리기보다는 상대방을 끌어내리려는 마이너스적인 성질이 강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제깟게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운이 좋았거나 윗 사람에게 사바사바해서 그 자리를 꿰찼겠지 뭐' 따위의 상대방을 폄하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부러움과 질투 중 질투가 부러움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감정이라는 겁니다.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고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부러움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그러한 질투의 감정을 억누르고 부러움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질투심이 시키는대로 전혀 득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사고하거나 행동합니다.
질투를 느끼는 모든 사람이 악감정을 갖고 행동하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내 행복을 저해하는 주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일으킨 질투의 감정이 자신과 그 사람 모두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고려하지 않은 건 상대방이 내가 행복을 자랑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성품의 소유자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내 맘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라면 이런 걱정 따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을 모두 내 성공과 행복을 기뻐해 줄 선량한 사람들로만 채울 수 없으니 역시 행복을 항부로 자랑하는 건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42
시작부터 여담이지만 저는 아이 문제로 심리평가나 상담을 받으러 온 부모의 문장완성검사에서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하게 키우는 것'이라는 응답을 발견하면 주의하는 편입니다. 경험적으로 부모-자녀 관계가 문제인 가정이 많았거든요.
문구 자체만 놓고 보면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자기 다짐처럼 느껴지기에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사실 저 문장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이의 기질, 아이가 바라는 것, 아이가 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내 아이를 이렇게 저렇게 키우겠다는 다짐 속에는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욕구와 희망과 꿈이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는거지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았다손쳐도 부모의 기준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와 욕심이 먼저, 아이의 욕구와 꿈은 나중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아이의 행복이 우선적인 기준이 아닌 자신의 대리 만족을 위한 욕구의 투사 대상으로써 아이를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못했으니 우리 아이는 그런 걱정 안 하고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자'고만 욕심낸다면 정작 아이가 공부 대신 다른 것을 하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허락하고 지원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내 대신' '내가 못한' 공부를 해야 하니까요. 이런 투사는 아이와 부모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정말 불행한 일이죠.
다음으로는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이라는 질문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넓게는 나에게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다짐이 가장 바라는 것인 부모는 자신에 대한 바로 그것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고 나와 다른 존재인 내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기대'를 하게 되고 제가 예전에 했던 포스팅(
관계는 '기대' 때문에 망하고, 불행은 '비교' 때문에 느낀다)에서처럼 부모-자녀 관계를 망치게 됩니다.
칼릴 지브란이 자신의 시(
'자녀는 부모가 키우는 분재가 아니라 스스로 크는 소나무이어야 합니다' 포스팅 참고)에서 말했듯이 부모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줄 수는 없으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이 참 부모의 역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 아이가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꿈, 다른 희망을 품고 있다면 세계적인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처럼 다른 북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와 같은 북 소리를 듣고 같은 박자에 흥을 느끼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다른 리듬을 타는 내 아이를 보는 것도 즐겁고 보람된 일 아닐까요?
태그 -
기대,
꿈,
대리 만족,
무라카미 하루키,
문장완성검사,
부모,
부모-자녀 관계,
상담,
심리평가,
아이,
욕구,
칼릴 지브란,
투사,
행복,
희망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40
스트레스는 무조건 피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몸에 해로운 디스트레스와 어느 정도 유익이 있는 유스트레스로 굳이 나누지 않더라도 적당한(tolerable) 수준의 스트레스가 야기하는 가벼운 긴장감(또는 설레임)은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고 행동을 활성화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과도한 스트레스를, 그것도 장기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받게 되면 굉장히 해롭습니다. 그러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평소에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게 중요한데요.
90년대를 풍미한 스트레스 대처 모형을 주창한 Lazarus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개인 및 환경적 요인을 변화시킴으로써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려는 '문제 중심적 대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유발된 부정적 정서를 완화하려는 목적을 갖는 '정서 중심적 대처'로 스트레스 대처 방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Lazarus는 다분히 정서 중심적 대처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대처 방식으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죠.
저는 Lazarus의 대처 방식 분류가 이성과 논리를 감성과 마음에 우선하는 다분히 미국적인 이분법에 입각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견해를 조금 달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처 방법의 효과성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느냐보다는 일, 관계 차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도식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 대처 방식의 성질이 일과 관련된 것으로 풀어야 함
* 사람(관계)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 대처 방식의 성질이 관계와 관련된 것으로 풀어야 함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 논문을 써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 답답해 미칠 것 같음 : 과제 지향적 스트레스 상황
-> 친구와 만나서 폭풍 수다 (X) : 관계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방식이기 때문에 비효과적
-> 헬스장 윈드밀에 올라 땀 흘리며 운동 (O) : 과제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방식이기 때문에 효과적
* 맨날 나만 보면 갈구는 상사 때문에 입맛도 없고 출근하기가 싫음 : 관계 지향적 스트레스 상황
->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일에 푹 파묻힘 (X) : 과제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방식이기 때문에 비효과적
-> 그 상사를 겪어본 동기와 선배를 만나 상의 (O) : 관계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방식이기 때문에 효과적
첫 번째 스트레스 상황의 대처법은 Lazarus의 분류법에 따르면 둘 다 정서 중심적 대처 방식이지만 제가 볼 때 효과성의 측면에서 전혀 다릅니다.
두 번째 스트레스 상황의 대처법은 Lazarus의 분류법에 따르면 위의 경우와 반대로 둘 다 문제 중심적 대처 방식이지만 역시 효과성의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갖고 오게 됩니다.
중요한 건 대처 방식이 문제 중심적/정서 중심적이냐가 아니라 스트레스의 원인이 일이냐 관계냐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속성을 가진 대처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위의 예는 다른 맥락 정보가 없고 순수하게 일 또는 관계로만 받은 스트레스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스트레스 요인이 일, 관계 복합적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나치게 단순화된 접근법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느낄 때 일과 관계 중 어느 쪽 요소가 강한 지 잘 생각해보면 스트레스의 성질을 결정하는 main part는 있을 겁니다. 그게 일이라면 과제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 반대로 관계라면 관계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스트레스 대처와 관련된 집단상담을 진행하면서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상황과 대처법,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짝지어서 분류해봤는데 너무나 분명하게 나뉘는 걸 보고 제가 오히려 놀랐습니다.
아직 통계적으로 검증된 건 아니고 경험적인 발견에 불과하지만 스트레스 대처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태그 -
Lazarus,
과제 지향적,
과제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관계,
관계 지향적,
관계 지향적 스트레스 대처,
대처,
디스트레스,
문제 중심적 대처,
스트레스,
스트레스 대처 모형,
유스트레스,
일,
정서 중심적 대처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31
어젯밤, 아니죠. 정확하게는 오늘 아침에 어떤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제 머리 뚜껑이 제대로 열린 사건의 전모는 이렇습니다.
심리학 분야에서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국내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회사지요. 이 회사는 자체 상담 센터까지 보유하고 있습니다.
상근 직원인지 프리랜서인지 정확한 계약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임상가가 작성한 심리평가보고서를 그 센터의 '상담심리전문가'가 해석 상담을 진행하면서 자기 맘대로 뜯어 고친답니다. 단순히 첨삭하는 것(이것도 제 기준에서는 천인공노할 범죄입니다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이름과 자격번호를 바꿔치기한 뒤 자신이 실시한 것처럼 보고서를 새로 꾸민다네요.
처음에는 제가 잠이 덜 깨어 잘못 이해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조작(자기가 실시하지도 않은 남의 심리평가보고서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자기가 실시한 것처럼 해석 상담을 한다면 그게 조작이 아니고 뭡니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편집 가능한 문서 파일로 보내달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했다네요.
간혹 local NP에서 임상가에게 심리평가보고서의 수정을 요구하는 불미스러운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리평가보고서를 문서 파일로 보낼 때는 수정이 불가능하게끔 제약을 가한 PDF 파일로 전송하도록 권고하는 포스팅을 한 적(
'심리평가보고서를 문서 파일로 전송할 때 주의사항')도 있습니다만 이런 범죄 행위를 뻔뻔하게 대놓고 자행하는 경우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게 그 상담심리전문가(이런 사람이 전문가라면 똥파리가 봉황입니다) 개인의 일탈인지 그 회사 소속 상담 센터의 관행인지 모르겠지만 경고합니다. 당장 그만두세요.
만약 한번만 제 귀에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절대로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상담심리학회의 윤리위원회에 제소하는 건 물론이고 소송을 불사하고 이곳 뿐 아니라 언론에 공개하는 것까지 고려하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fact인지 확인이 될 때까지 회사명을 익명으로 유지하겠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29
"넌 왜 그렇게 내 맘을 몰라주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내가 뭘 원하는지 정말 몰라?"
"그런 건 좀 알아서 하면 안 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 아닌가요?
모두 나에게 마음 읽기(mind reading) 할 것을 요구하는 말들입니다.
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 읽기는 지극히 편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시콜콜 일러줄 필요가 없으니 에너지가 절약되고 무엇보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 내가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만 하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마음 읽기를 잘못한 상대방을 마음껏 책망할 수도 있으니 더 없이 편리한 수단이 아닐 수 없죠.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개는 힘이나 권력을 잡은 쪽에서 행사하는 경우가 많고 상대방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곤 합니다.
예전에 어느 포스팅에선가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 읽기를 요구하는 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거기에 선택까지 안 하면서 열매만 따 먹겠다는 심보에서 파생된 아주 못된 버릇입니다.
마음 읽기는 대인 관계에 해롭기 그지없는 방법입니다. 대인 관계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상당수의 원인이 바로 마음 읽기입니다.
그러니 마음 읽기는 요구도 말고 응하지도 마세요.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 읽기를 원하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하세요.
저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해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일부러 모른 척 하기도 합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27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든 가혹한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든 말이죠.
하지만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알고 난 다음 사람마다 대처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공평한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일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맞서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공평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응해 가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지요. 불공평한 세상을 탓하고 원망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못나게 태어난 자신을 탓하고 체념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게 사실이라도 그걸 개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굉장히 많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면 똑같은 지식과 정보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이를 활용하는 것도 달라지니까요.
서설이 길었는데 이 포스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포기나 체념이 아닌 수용으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어떠한 노력이든 집착에 헛되이 낭비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위해 발휘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결코 쉽지도 금방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일상에서 온전히 행복을 느끼기 위해 꼭 해내야 하는 과제라고 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995
살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한눈에 봐도 딱 나와 비슷한 취향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안타까운 관계의 사람도 있고, 주는 거 없이 미워서 가능하면 안 보려고 애서 피하게 되는 사람도 있죠.
자신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1.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 뿐이고 그들 모두를 좋아하며 내 생활이 만족스럽다 -> 이 포스팅 미대상자. 통과!
2. 나와 굉장히 다른 성향의 사람들 뿐이고 그들 모두가 비슷한데 나는 그들이 별로이다. -> 혹시 착취당하고 있나요?
3.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도 서로서로 굉장히 다르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듯 하지만 난 여전히 외롭다. -> 마저 읽어주세요.
이 포스팅은 3번에 해당하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나와 맞지 않는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은 이유가 혹시 내가 나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이야기하지 못하고 카멜레온처럼 만나는 사람의 취향과 스타일, 분위기에 맞춰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세요.
그렇게 사는게 재미있고 활기차다면, 그래서 행복하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헤어져서 혼자가 되었을 때 금방 외롭다고 느끼고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하며 자신의 생활이 뭔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 지속적으로 든다면 당신은 자신의 색깔을 아직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신의 색깔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에너지를 방전시키기만 할 뿐 입니다(당신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인간형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나만의 색깔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색깔이 다른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호기심이 생긴다고 해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죠. 접점을 찾아야 하니까요. 반면에 무채색인 사람에게는 의도가 어찌되었든 일단 접근하기 쉽고 결과는 지금의 그런 모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면 나와 색깔이 같은, 죽이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클럽에 놀러가면, 야구장에 관람을 하러 가면, 한강변에서 나처럼 자전거 출근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금방 말문이 트이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는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색깔이 무엇일지만 탐색합니다. 왜냐하면 무리 속에서 괴짜라고 불리거나 그로 인해 따돌림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집단 속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는 있어도 삶의 재미와 행복을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안전을 지향하는 삶은 호기심과 활력을 억누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남은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색깔은 그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 성품 등을 반영하는데 그걸 극명하게 드러낼수록 서로를 충전시킬 수 있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달라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과 같은 색깔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도 자신의 색깔을 감추고 있을 뿐이니까요. 당신이 먼저 내면의 색깔을 드러내면 그들도 호응할겁니다.
마음 읽기하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의 색깔을 펼쳐 보이세요.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975
자기계발서를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내용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을텐데요.
대표적인 것인 선택과 집중 문제입니다.
어떤 자기계발서에는 우선 순위를 매기지 말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라고 충고하고 다른 자기계발서에서는 중요한 순서대로 처리하라고 조언합니다. 시간이라는 제한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걸까요?
시간이 한정된 자원인 것만큼은 확실하니 가장 중요한 일을 선택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아님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묻혀 있는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열정을 불사르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해낼 수도 있을까요?
저는 둘 사이의 절충점이 가능하다고 보는 편인데 우선 둘 중 하나의 관점 중에서만 고르라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시도해보라는 쪽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는데 그 일이 모두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합니다.
해야만 하는 일들은 사실 해야 하는 이유가 나 자신의 가치관이나 삶의 의미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주어진 일이니까 수동적으로 처리해야 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는 일이 많죠. 이런 일들을 동시에 모두 해 내겠다고 시도해봤자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내면의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수록 상승 작용을 일으켜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제게는 블로깅과 심리학 공부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는데요. 둘 다 제가 굉장히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그 내용을 정리해서 블로깅을 하고 있죠. 그 내용을 보고 의견을 남겨 주신 분들의 코멘트가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로 제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게 도와줍니다. 그런가 하면 포스팅 내용을 보고 강의 의뢰를 하는 분들이 나타나고 그렇게 되면 공부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강의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깊은 수준으로 공부를 하게끔 자극을 받습니다. 이처럼 심리학 공부와 블로깅은 서로 연결되어 상승 효과를 일으키고 시간을 절약하며 생각을 정리하도록 고무합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모두 한꺼번에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신 해야만 하는 것은 빼고 하고 싶은 것 위주로 목록을 만드세요. 하고 싶었던 것을 동시에 시도할 때 얼마나 엄청난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지 꼭 한번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923
흔히 아이들을 나무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래서 무럭무럭 자란다느니 쑥쑥 자란다느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죠.
한편으로는 부모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아이들을 자라게 하려는 걸 분재처럼 키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나무와 같다는 건 스스로 자라는 생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화재나 병충해처럼 자라는 나무가 감당하기 힘든 환경적인 위험 요소를 막아주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습니다. 나무는 원하는대로 맞춤 조립하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는 나무입니다.
아이들이 나무라면 어떤 아이는 쭉쭉 곧게 자라는 침엽수일 수 있고, 다른 아이는 잎이 넓게 퍼지는 활엽수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아이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유실수일 수도 있을 겁니다. 당연히 수종에 따라 자라는 속도가 다를 수 밖에 없죠.
아이가 늦되다고 생각될 때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도 그런 생각이 든다면 부모의 조급함 때문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아이가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쉽게 주눅이 들어서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고, 너무 예민해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편식을 비롯해 자기만의 취향 고집이 심한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부모를 많이 만났습니다. 내 아이가 문제가 있거나 늦되다는거지요.
이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은 대체로 주변의 비슷한 또래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각기 다른 나무라서 다른 특성과, 다른 성질과, 다른 성장 속도를 갖습니다.
내 아이가 조금 빠르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고, 반대로 내 아이가 조금 늦되다고 걱정할 일도 아닌거지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환경에 맞추어 나무가 제 성장 속도를 되찾게 되거든요.
아이는 자라는 속도가 각기 다른 나무입니다.
나무는 조바심을 낸다고 빨리 자라지 않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916
요새 부모들이 가장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 주도 학습입니다. 자기 자식이 스스로 알아서 척척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자기 주도 학습을 하게 할 수 있는지 제게 물어보는 부모들이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자기 주도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걸 '호기심'이라고 말해 줍니다. 호기심이 없으면 자기 주도 학습을 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왜냐하면 호기심이 끊임 없이 만들어 주는 내적 동기가 없기 때문에 보상과 같은 외적 동기에만 의존해야 하고 그마저 없거나 부족하다면 인내심이라는 밑바닥 연료를 끌어내어 계속 태워야 하니까요.
자기 주도 학습이라고 하면 어른들은 주로 체계화되어 있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하는 학습법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자기 주도 학습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도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해 오던 겁니다. 아이들을 그냥 놀이터나 숲에 풀어놔주면 호기심이라는 나침반이 이끄는대로 알아서 찾아다니며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지요. 어른들이 할 일이라고는 중간에 가는 길을 한번쯤 툭하고 점검해 주거나 호기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과 수확물을 함께 점검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세상은 도무지 아이들이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발동시킬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통제되지 않은 호기심은 불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악용(세상에 대체 불필요한 지식이라는게 어디 있답니까?)당할 수 있다며 대학에 진학하거나 밥벌어 먹고 사는데 필요하다고 사회가 미리 정해놓은 지식만을 습득하는데 표적을 맞추라고 하죠.
이는 모두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런 불신은 반드시 더 큰 불신과 배제와 침묵의 카운터 펀치로 되먹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건 불 보듯 뻔해요.
이건 제 경험인데 하기는 죽기 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했던 수험생 시절과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던 심리학을 호기심에 끌려 즐겁게 공부했던 대학 생활을 비교해 보면 공부 시간은 전자가 압도적이었지만 결과는 후자가 압승입니다. 제가 심리학을 업으로 삼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지만 대학 때 공부했던 지식은 여전히 아주 쉽게 생각이 나고 기억의 저편에서 끌어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 때 무엇을 공부했는지 뿐 아니라 어떻게 생활했는지의 기억까지 모두 뿌옇고 가물가물하기만 합니다. 쉬는 시간에 뭐하면서 놀았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부모가 원하는 종류의 사람을 만들겠다고 아이들을 시스템화된 입시 체계에 집어넣고 돌리면 아이들도 죽을 수 있지만 가장 먼저 아이들의 호기심이 죽습니다. 그래서
'아동/청소년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유' 포스팅에 쓴 것처럼 꿈도 희망도 죽은, 시체 같은 아이들로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녀에게 얼마만큼의 호기심이 남아 있는지를 꼭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남아 있는 호기심이 별로 없다면 아이가 알아서 공부하고 있다 해도 분명한 목표가 그 아이를 견인하고 있지 않은 이상 내면의 무언가를 쥐어짜면서 버티고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 자신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남아 있는지부터 점검하는 게 더 먼저겠지요.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913
예전에 모 대선 후보의 캐치 프레이즈로 인기를 끌었던 것 중에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게 있었죠.
그 때 이후로 살림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이전 MB 정권이 멀쩡한 4대강을 손 본답시고 수십 조 원을 강바닥에(라고 쓰고 토건회사와 짬짜미할때라고 읽는다) 쳐박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도 야금야금 간접세로만 뜯어갈 낯짝은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정권은 조세저항이고 뭐고 그냥 대놓고 갈취하네요. 그게 아니라면 그만큼 국고가 텅텅 빈 비상사태라는 건데 그건 더 무서운 일이 되겠지만요.
하여간 그래서 13월의 월급이라는 연말정산이 13월의 세금폭탄으로 바뀔 것이 확실한데다 3포 세대가 5포 세대로 진화(?)하고 있어 먹고 사는 것만 걱정하는데도 여력이 없는 세상에서 꿈을 가지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또 하나의 희망고문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꿈을 갖는 게 여러모로 낫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을 하면서 깨닫게 된 삶의 지혜가 참 많지만 그 중 하나가 꿈을 갖는 것 만으로도 얻게 되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을 상담하다 보면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없이 무기력하게 사는 청소년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꿈을 갖고 있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꿈을 갖기만 하면 저절로 동기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릇이 준비된다고 담을 것도 절로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릇이라도 있다면 담을 기회가 생길 여지가 있는 것과 같죠. 적절한 욕심은 사람을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동인이거든요.
또 하나 꿈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현재가 즐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돌이킬 수 없고 미래를 앞당겨 살거나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현재인데 아이러니컬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미래에 어떤 꿈을 이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조금씩 그 꿈을 향해 걸어나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죠. 현재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동기를 유지하는데도 중요하기 때문에 꿈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꿈을 갖는 것이 좋을까요? 많은 자기 계발서나 힐링 서적에서는 가시적으로 떠올릴 수 있고 성취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최대한 구체적으로 꿈을 꾸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꿈은 최대한 모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지가 넓어집니다. 너무 구체적인 꿈은 현재의 상태와 괴리감을 크게 느끼게 만들어서 절망적인 기분이 들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꿈과 목표를 구분하고 꿈은 최대한 모호하게, 목표는 구체적이되 작게 구성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 하나의 꿈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이 이렇다면 어떤 창의적인 일을 할 것인가가 목표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경우는 전업 미술가가 되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재능도 없고, 돈도 없고, 배움의 기회도 없는 것 같으니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미술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마련하는 과정에서 미술이 아닌 다른 길로도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걸 발견하고 진로를 바꿀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 꿈은 최대한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꾸고, 목표는 꿈에 맞추어 설정하되 아주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중요한 건 그 목표에, 그 꿈에 다가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겠지만요.
꿈을 꾸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태그 -
4대강,
MB,
간접세,
꿈,
동기,
동인,
목표,
살림살이,
세금폭탄,
연말정산,
조세저항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816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떡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많은 선험자와 멘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 찾죠?
좋아하는 걸 찾는게 뭐 그리 어렵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상담을 하면서 만나는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의외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문제인 건 맞는데 정말 어려운 문제이기도 해요.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방법을요. 2012년에 했던 포스팅의 연장이기도 하고 총정리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방법이라기보다는 경우의 수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겠네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이상적인 방법으로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영화에나 나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일단 한번 경험하게 되면 경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받게 되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알게 된다는 겁니다. 제 경우에는 여행이었는데 엉덩이가 무거워서 움직이는 거 싫어하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걸 경험하는 걸 딱 싫어하는 제 성향 상 여행도 그럴거라 착각했는데 생애 첫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뉴질랜드 여행에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딱 한 번 경험한 것 뿐인데 제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걸 완벽하게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운이 좋았죠. 물론 이런 경험은 아주 드문 것이라서 이 방법에만 기대면 짜릿한 전류만 기대하다 늙어죽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이 필요하죠.
좋아하는 것을 찾는 두 번째 방법은
태그 클라우딩을 해 보는 겁니다. 태크 클라우딩에 대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방법'이라는 포스팅에서 이미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를 찾지 말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보는 것이죠. 다만 태그 클라우딩은 상당히 강력하고 또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생각보다 느낌에 집중하는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뭐든지 머리로만 판단하고 마음에는 통 물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태그 클라우딩을 해도 거의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마음이 하는 말을 듣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태그 클라우딩 방법을 이용해서 발견한 좋아하게 된 것들의 목록은 관련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좋아하는 것을 찾는 세 번째 방법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방법이죠.
마음으로 끌리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던 간에 일단 시작하는 겁니다. 주로 뭔가를 배우는 분야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제 경우에는 인라인 스케이트였는데요.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 추석 선물로 받은 싸구려 국산 인라인 스케이트를 버릴 수 없어 그냥 해 보자고 마음 먹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였지요. 아이스 스케이트도 전혀 탈 줄 모르는 완전 생초보였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본 동영상을 교재로 해서 기마 자세로 걷기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셀 수도 없이 많이 넘어졌고 금방 다 때려치고 포기하고픈 마음만 들더군요. 하지만 참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넘어지기만 하고 재미는 하나도 못 느꼈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 버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제대로 중심도 못 잡고 비틀거리던 제가 4개월 만에 한강 로드런을 다닐 정도로 실력이 늘어서 이제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건 싫어하는 것이 지나간 뒤에 온다는 것을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 재미를 알게 되고 내가 그걸 왜 진짜로 좋아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려면 처음에 오는 싫다는 느낌을 버텨내야 합니다. 내가 천재가 아닌 이상 처음부터 좋아하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뭔가를 배워야 하는 것들은 특히 그렇죠. 그래서 일단은 조금 버텨봐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로 좋아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도 저도 안 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정석인 방법은 역발상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부터 적극적으로 피하는 방법입니다. 싫은 것을 배제하고 남은 것이 무엇인지 뒤적거려보는거죠. 남이 시키는 걸 억지로 하는 게 지옥같다면 남이 시킨 건 최대한 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아무도 시키는 사람이 없을 때, 그래서 시간이 남아돌 때 뭔가 하고 싶은 동기가 올라오면 그 때 가서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시도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겁니다. 제 경우에는 일단 남들이 누구나 다 하는 건 적극적으로 반대로 행동하는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누구나 TV는 본다고 하니 TV를 사지 않았고, 누구나 차 한 대쯤은 사니 차도 안 샀습니다. 심리학자라면 다들 박사 학위는 취득해야 한다고 하니 그것도 일부러 피했습니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성공이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삶의 방식이 제게는 딱 맞네요. 행복합니다. 이것도 2012년 8월에
'그래도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 :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방법 2탄'이라는 포스팅으로 정리해 두었으니 참고하세요.
모두 제가 직접 경험해보고 효과까지 제대로 본 방법이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꼭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서 행복한 인생을 누리시면 좋겠네요.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784
대인관계 갈등 때문에 상담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이 대충 두 가지 중 하나로 나뉘어지더군요.
첫번째는 상대방이 (객관적이든 또는 주관적이든) 잘못된 행동을 해서 그것 때문에 직접적으로 감정이 폭발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시댁 식구들 앞에서 배우자가 자신의 흉을 본 것을 알게 되었다든지, 자녀가 게임을 하다 걸렸는데 훈계를 듣던 도중 적반하장격으로 나에게 욕을 했다든지 등등
이런 경우는 내담자가 상대방의 행동 때문에 받은 상처를 점검하고 개선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면 동일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작업을 통해 재발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담자를 더 괴롭히는 문제는 두 번째 경우입니다.
바로
상대방이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폭발한 경우이죠.
예를 들어, 결혼 10주년 기념일인데 축하한다는 인사를 남편이 잊었다든지, 가족과 함께 하려고 어렵게 휴가를 냈는데 각자 일정이 있다고 가족 여행을 못 간다고 했다든지 등등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하기 쉽지만 다음의 예는 과연 상대방이 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살짝 미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저녁 설거지를 하겠다고 해 놓고는 그냥 놔두고 출근하는 남편, 학원 다녀오는 길에 신신당부한 심부름을 까맣게 잊고 털레털레 집에 돌아온 아들, 약속에 늦지 않겠다고는 또 다시 늦은 친구 등등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이야기를 해놓고는 결국 지키지 않은 것이니 뭔가 나에게 나쁜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도 모두 하지 않은(일어나지 않은) 행동입니다.
하지 않은 행동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하지 않은 행동을 비난하는 건 상대방이 내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좌절된 내 기대 때문에 생긴 괴로움을 상대방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표현 방법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은 결코 효과적이지 않으며 문제를 개선하지도 않고 오히려 상대방의 반발만 초래해 상황을 악화시키게 됩니다.
상대방이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화가 난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왜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는지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면에는 좌절된 욕구와 기대가 숨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걸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욕구와 기대는 근본적으로 스스로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의해 충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하지 않은 행동, 일어나지 않은 현상을 비난하는 걸 그만두세요.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703
부부/커플이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사랑? 신뢰? 건강? 재정 건전성?
물론 모두 중요한 것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다음의 두 가지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어느 정도 서로 연결되어 있죠.
1. 공짜는 없다.
이건 사실 부부/커플 관계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한 지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에게 수고를 끼치게 만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마음가짐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과도 비슷한거여서 이 가치관이 없는 사람과 부부/커플 관계를 맺는 상대방은 항상 뭔가 손해보는, 빚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공짜일수록 좋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죠. 공짜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항상 공짜를 바라고, 가능하면 공짜를 누릴 기회를 늘리려고 하기 때문에 공짜란 없다는 가치관을 가진 상대방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속물적으로, 속보이는 사람 같거든요. 자칫하면 부부/커플을 헤어지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인 혐오감을 만들어 낼 수도 있어서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상대의 호의를 부담스러운 빚으로 간주하고 재깍재깍 갚아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의 호의를 즉각 되갚으면 상대방이 정나미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되돌려 줘야 하는 호의로 기억해 두는 걸로 충분합니다. 물론 상대방이 기억하는 기한 내에 되돌려주는 게 좋죠.
건강한 부부/커플 관계에 해롭더라도 나는 공짜가 좋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왜 그런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 물론, 두 사람 다 공짜는 많을수록 좋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뭐 나름대로 해로하면서 잘 살 수 있겠죠. 천생연분이니까요. 대신 주변 사람들이 짜증나겠지요.
2. 당연한 건 없다.
앞서 말씀드린 공짜는 없다는 마음가짐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추상적인 것이든 뭔가를 받으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므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의미이니 공짜는 없다는 마음가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응당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한층 더해진 거라고 보면 됩니다. 상대방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 건 내가 받아 마땅한 권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자는거지요. 난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하고 거만 떨 것이 아니라 당연한 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를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의외로 연인이나 부부가 되고 나면 상대방이 나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어장 관리를 왜 하느냐며 우스개를 하곤 하는데 어장 관리를 하지 않으면 물고기가 폐사하게 되죠. 관리를 제대로 안 하는데 어떻게 물고기들이 건강하게 살 수가 있나요? 수고를 다하고 정성을 쏟아야지 당연한 건 없는 겁니다.
상대방이 식후에 향긋한 커피 한 잔을 타오는 게 과연 당연한 걸까요? 내가 좀 더 자는 동안에 아이를 깨워서 북새통에 아침을 먹이는 게, 퇴근하면서 마트에 들러 찬거리를 사오는 게, 집에 들어갔다가 비가 온다고 우산을 들고 나를 마중 나오는 게 과연 당연한 걸까요?
'공짜는 없다', '당연한 건 없다'는 마음가짐만 끝까지 잘 간직하고, 그러한 마음가짐에 따라 행동하기만 해도 부부/커플 관계에서 갈등의 소지가 될 부분을 굉장히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당장 저부터 그랬고 제가 부부 상담했던 많은 내담자들 또한 그렇더군요. 경험적으로 꽤 많이 검증된 내용이니 한번쯤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태그 -
건강,
공짜는 없다,
관계,
당연한 건 없다,
부부,
사랑,
신뢰,
재정 건전성,
커플,
혐오,
호의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691
과거에는 남자가 밖에서 일해서 돈을 벌어 오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명확한 편이었지만 점차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아이 양육과 가사를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의 속도에 비해 인식 변화의 속도는 더딜대로 더뎌서 외벌이든 맞벌이든 상관없이 아이 양육과 가사는 여전히 여자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의외로(제 생각에는 거의 대부분) 많습니다.
그래야 하는 근거로 드는 것 중의 하나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게 있는데 이건 말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죠. 남자가 여자에 비해 더 많은 돈을 버는 건 능력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불평등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럼 여자가 많이 버는 집에서는 남자가 아이 양육과 가사를 모두 책임지나요?
다른 근거로 많이 드는 것 중 하나는 여성이 양육과 가사에 특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여자가 더 잘 한다는거죠. 정말 그래요? 여성들 사이에서도 편차가 심한데다 그냥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서툴고, 사실 하기 싫어서 그렇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에 익숙한 사람이 있답니까?
가사와 아이 양육을 분담하는 문제는 사실 상 독자 생존이 가능(배우자 중 한 사람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더라도)하도록 훈련하고 그런 훈련을 하는 가운데 효율성을 극대화해서 두 사람 모두가 심신의 평화를 누리자는 차원에서 논의할 일이지, 위에서처럼 내가 돈을 더 많이 버네, 이 일은 원래 여자가 할 일이네 하면서 찌질하게 굴 일이 아닙니다.
막말로 배우자가 죽으면 어차피 모두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아님 모두 사람 사서 처리하시든지...
게다가 여자가 음식을 만들어서 식사를 하고 난 뒤 자상한 남편 코스프레하면서 "설거지는 내가 할께"라는 멘트를 던지는 남자들이 있는데 멋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심리는 '그 일은 원래 내 일이 아니다'이기 때문에 사실 아주 괘씸한 것이죠.
설거지를 당연히 해야 하는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사람은 굳이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겁니다. 그냥 조용히 가서 설거지를 하겠지요.
여자들이 "아이는 내가 재울께", "저녁은 내가 만들께"라고 이야기하는 거 보셨습니까?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말 따위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양육과 가사 분담을 제대로 하고 싶으면 '저 일은 원래 모두 내가 할 일이다'라는 자세부터 가지셔야 합니다. 일단 백번 암송하세요.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681
제가 가족 문제(원가족이든 현가족이든)가 있는(혹은 있었던) 성인 내담자를 상담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이미지 떠올리기 기법 중 하나는 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단, 과거의 추억이나 경험을 염두에 두지 말고 자신이 현재 원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 제한 조건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온 가족이 함께 하나의 자동차를 타고 동일한 목적지로 이동(여행일 수도 있고)하는 걸 상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건강하게 작동하는 가족이라는 건 가족 구성원(물론 성인) 각자가 자신의 차(인생)를 몰고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지가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고 중간까지는 같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달라질 수도 있고요. 누구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하고 싶지만 다른 누구는 국도나 지방도를 이용해 여기저기 들르고 구경도 하면서 천천히 가고 싶어하는 것, 그걸 서로서로 이해하고 용인하는 것, 그것이 건강한 가족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꼭 하나의 차에 함께 타야만 하고 목적지도 당연히 같아야 하며, 이동 경로까지 통일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가족 내에 있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가족을 쥐락펴락하려고 할 때부터 고통이 시작됩니다.
물론 온 가족이 하나의 차에 타고 동일한 목적지로 향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않게 된) 가족이 다른 차를 타고, 다른 목적지로 향하겠다고 하거나 중간에 경로를 바꾸겠다고 할 때 이를 용인하지 않고 권력으로 제압하려는 것이죠.
항상 내가 모는 차의 뒷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던 자녀가 어느덧 장성하여 자신의 차를 사고 항상 가던 가족 휴가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휴가를 보내겠다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섭섭할 수도 있고 내심 못마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순리입니다.
가족은 숲과 같아서 나무, 덤불, 꽃, 이끼 등 다양한 식생이 한데 어우러져야 건강합니다. 높이 치솟은 자작나무만 열을 지어 한데 모아놓은 걸 우리는 목재 재배지라고 부르지 숲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너무도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걸 억압하지 않고 조화로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족, 그러한 가족이 진정으로 건강한 가족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676
제목 그대로 임상/상담심리 Job DB를 오픈합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제가 예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숙원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2014년을 넘기지 않고 드디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임상/상담심리전문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산업인력공단 임상심리사 등 전문 자격을 소지한 임상가들께서 어떤 처우를 받고 계신지 비교 선택하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최신 정보를 수집해서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포함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기관명 : 분쟁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일부 익명 처리해 공개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 프렌차이즈 여부
* 지역(지점명)
* 환자/수검자에게 청구하는 심리평가비(Full Battery 기준)
* 평가자가 받는 실제 금액
* 환자/내담자에게 청구하는 상담/심리치료비(회기 당)
* 치료자/상담자가 받는 실제 금액
* 급여 형태(비율, 고정급 등)
* 근무 형태(주 5일 상근, 주 2회 파트 타임 등)
* 4대 보험 적용 여부
* 특징 : 이 부분이 본 임상/상담심리 알바 DB의 핵심이자 알짜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나라합니다;;;
모든 정보는 해당 임상가들이 실제로 일을 하면서 경험한 내용만을 담았습니다. 월덴3의 임상/상담심리 Job DB는 ~카더라 통신을 지양합니다.
혹시라도 DB에 수록된 기관의 정보가 새롭게 변경되었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체없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최초 포스팅에서는 part-time job인 알바 정보만 포함했으나 full-time job 정보까지 포괄하도록 폭을 넓히겠습니다. 근무하고 계신 직장 또는 이직 후 이전 직장에 대한 full-time job 정보 제보도 환영합니다.
2014년 8월 4일 현재 9개의 기관이 포함되어 있으며 새로운 기관이 추가될 때마다 즉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덧. 이 포스팅은 8월 한 달 동안 유지하고 이후 공지글 영역으로 옮기겠습니다.
덧2. 나도 DB 공유에 기여하고 싶다는 임상가들께서는 연락주세요. 당연히 제보 환영합니다. 본 DB의 양식대로 채워서 제게(walden3@gmail.com) 보내주시면 됩니다. 단, 신뢰성 확보를 위해 최근 2년 이내의 정보로만 부탁드립니다.
: 2014년 8월 19일 현재(20140819 Version)
* 오O영 아카데미에서 수검자에게 청구하는 심리평가비가 35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올랐답니다 : 8월 4일
태그 -
4대 보험,
DB,
Full Battery,
고정급,
급여,
내담자,
산업인력공단,
상담,
상담심리,
상담심리전문가,
상담자,
수검자,
심리치료,
심리평가,
심리평가비,
알바,
임상,
임상가,
임상심리,
임상심리사,
임상심리전문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치료자,
환자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660
과거 MMPI 같은 경우는 채점 프로그램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검사지에 비용이 부과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복사 엄금이었죠. K-WAIS 지능검사의 검사지와 같은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MMPI-2/A나 TCI/JTCI는 채점 프로그램이 (주) 마음사랑의 서버에 있기 때문에 채점을 위한 크레딧이 실질적으로 구매하는 상품입니다.
물론 1 검사지 1 크레딧으로 매칭되어 있기 때문에 크레딧으로 채점을 하고 나면 당연히 검사지는 폐기해야겠지요. 답안지도 사용되었으니 재사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검사지를 가져가서 답안지만 복사하고 검사지를 그대로 가져오는 수검자도 있습니다(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이 때 1:1 원칙에 따르면 멀쩡한 검사지를 폐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자원낭비하는 검사자는 아마 없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검사지가 남으면 크레딧을 구매할 때 저처럼 검사지 배송을 원치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기관 자격이 아닌 개인 평가자는 많아야 30부 정도, 제 경우는 대략 20부 정도의 소량 구매를 하거든요.
TCI는 부 당 2,500원이기 때문에 10부를 구매한다면 25,000원이 됩니다. 그런데 15만 원이 넘지 않으면 배송료 2,500원을 구매자가 부담해야 하니 총 구매액의 10%를 배송료로 부담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배송료를 부담하지 않으려면 60부 이상을 구매해야 하는데 그 정도 수량이라면 개인적으로 소진하는데 몇 년은 걸릴겁니다.
크레딧만 구매하고 싶다고 하면 검사지도 배송받으라고 연락이 옵니다. 원칙이니까요. 1 검사지 1 크레딧 원칙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융통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재미있는 건 기관 사용자의 경우 수검자가 검사지를 가져갔다가 안 가져오면 크레딧은 남아 있는데 검사지가 부족하게 되는데 그 때는 소정의 비용을 내고 크레딧 없이 검사지만 구매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1 검사지 1 크레딧 원칙이 그렇게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지요. 그 검사지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추가 인쇄를 한 것은 아닐테니 저처럼 크레딧만 구매한 구매자의 검사지를 모아서 판매한 것은 아닐까요?
검사지 배송 정책과 관련하여 해외 저작권자에게 이런 사정을 전달할 수 없냐고 물으니 그럴 계획이 없답니다. 원칙이 중요하니 검사지 소량 구매자는 검사지가 남아 있더라도(원칙적으로는 검사지가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니) 구매자가 배송료를 부담하면서 검사지를 배송받으라는거지요.
검사지가 실질적인 상품인 MMPI와 달리 크레딧이 실질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인 MMPI-2/A, TCI/JTCI라면 검사지/답안지 복사를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요? 온라인 채점을 하는 시대에 종이에 저작권을 걸어 구매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을 계속 지속하는게 과연 합리적일까요?
저는 검사지 20부를 구매하기 위해 써야 하는 배송료도 아깝거니와 상담 기록지를 절약하려고 상담 시간에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터라 솔직히 낭비되는 종이도 만만치 않게 아깝네요.
얼핏 배송료 정책을 손 보겠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저 같은 사람은 배송료를 무료로 해 준다고 해도 불필요한 검사지는 배송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도 마음사랑측과 제 생각이 엇갈리는 부분은 융통성 발휘가 원칙을 훼손한다고 믿느냐 아니냐인 것 같습니다.
원칙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융통성이 발휘될 여지를 주지 않는 원칙은 가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네요.
덧. 제가 하도 까다롭게 구니 이번은 검사지를 배송하지 않고 크레딧만 구매할 수 있도록 마음사랑 측에서 편의를 봐 주셨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 아닙니다. 융통성은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두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지 특정인에게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태그 -
JTCI,
K-WAIS,
MMPI,
MMPI-2/A,
TCI,
검사지,
마음사랑,
배송,
수검자,
심리검사,
지능검사,
크레딧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562
부모 교육을 하다보면 칭찬과 격려의 차이를 모르는 부모가 너무 많다는 것에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부터 칭찬과 격려가 다르지는 않았겠지만 이제는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사용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달리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에 정리를 해 봤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둘 다 정적 강화물로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실생활에서 부모나 선생님 등 윗사람이 자녀나 학생에게 사용할 때 뚜렷한 지각 차이가 존재합니다.
격려가 주로 과정 중에 있는 행동이나 상태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아주 잘하고 있는데?")인데 비해 칭찬은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된 결과물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렇게까지 해 내다니 대단하구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격려가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비해 칭찬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죠. 당연히 성장 가능성과 지속성의 측면에서 격려가 칭찬보다 더 나은 피드백입니다.
그러니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나 하더라도 칭찬보다는 격려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535
부모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것 중 하나는 머리가 굵어진 자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춘기가 되어 변성기가 되고 여드름이 돋아 나기 시작하면 슬슬 짜증이 늘고 어른들에 대한 반항이 심해지면서 고민이 시작되곤 했는데 요새는 그 연령대가 점점 내려가고 있고 스마트폰 등 IT기기로 인해 대화 단절의 시기가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만 되면 이미 자녀의 대답 패턴이 "네", "아니오", "몰라요", "싫어요"와 같이 단답형에 그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부모들이 많죠.
어렸을 때야 부모의 권위를 앞세워 이래라 저래라 해도 찍소리 않고 고분고분하게 복종했던 자녀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대답도 시큰둥하고 눈도 안 맞춘 채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부모를 귀찮아 하면 괘씸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지요.
그래도 자녀를 사랑하는 많은 부모들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터 보고자 애를 쓰지만 방법을 잘 몰라 답답해들 합니다.
몇 가지 중요한 원칙과 Tip이 있는데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내 자녀는 나와 독립적인 인격 개체이며 나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입니다. 알게 모르게 내 자녀는 내가 낳았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사랑으로 포장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너는 내 아들/딸이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대화를 시도하는 한 절대로 자녀들의 말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철저히 존중하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탤런트 최수종씨가 집에서 아이들과 상호존대를 결코 그냥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는 못해도 자녀를 대할 때 밖에서 다른 어른을 대할 때 처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대화를 시도할 때는 '강요'가 아닌 '부탁'하듯이 말을 건네야 합니다. 대화를 시도했다가 자녀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 기분이 상한다면 자녀라면 당연히 부모의 대화 시도에 응해야 한다는 기대를 깔고 있는 것이고 그건 자녀에게 대화를 강요한 겁니다. 자녀들은 그런 강요를 아주 예민하게 눈치채거든요.
거절당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때만이 부탁하듯이 대화를 시도한 것이죠.
이렇게 전향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는데도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자녀들에게는 어떡할까요? 잠깐 그 전에 이것부터 생각해보죠. 혹시 이미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계셨나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냉소를 짓지는 않으셨나요? 지금까지 자신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던 부모가 어느 날 갑자기 다정하게 말을 건다고 '아~ 우리 부모가 개과천선을 해서 드디어 나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하는 자녀는 없습니다. "왜 이러시지? 뭐 잘못 드셨나? 내가 뭐 잘못했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죠. 그래서 역시나 방어적인 반응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Tip 한 가지.
자녀가 기대했던 것만큼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녀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세요. "오늘 별로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닌가 보네. 아빠가 귀찮게 해서 미안해. 나중에 한가할 때 다시 이야기하자. 언제라도 아빠와 이야기하고 싶으면 와"라는 식으로요. 대화는 물처럼 흐르는 겁니다. 잠시 끊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계속 흐를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되죠.
자녀와 대화할 때는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나쁩니다. 다른 부모는 다 실패하더라도 나는 내 아이들과 꼭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거라는 희망을 잃지 마세요.
결국 끈질지게 시도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 자녀와의 대화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434
심리학에도 굉장히 다양한 하위 분야가 있어서 심리학이라기보다는 생물학에 가까운 세부 전공도 있습니다. 이런 영역에서는 실험법을 주로 사용하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심리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질문지를 사용해 양적 연구를 많이 하니 학위 논문이건 연구 논문이건 이런 저런 척도를 이용해 survey를 하는 분들은 부디 이 글을 주의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자신이 수행하려는 연구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자아 존중감(self-esteem)이라고 해 보죠. 그럼 연구자는 대개 자아 존중감을 측정하는 척도가 무엇인지 먼저 찾아봅니다. 심리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척도들을 모아놓은 '심리척도 핸드북'같은 책을 참고할 수도 있고 국내 journal에서 자아 존중감의 키워드 검색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척도를 찾아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아 존중감을 측정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척도는 Rosenberg가 개발한 척도이니 이걸 국내에 번안한 논문을 찾아 부록에 있는 질문지를 그대로 가져다 씁니다. 다들 이런 식으로 질문지를 찾지 않으십니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그렇게 해 왔다고 해도 앞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 가지 작업을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1. 국내에서 자체 개발된 척도가 아닌 경우 국내에 번안 소개(보통 타당화 논문임)한 최초 논문을 찾아서 번안된 질문지를 확보할 것
2. 번안된 척도의 제작자를 찾아서 최초로 공개된 원 논문을 찾아서 원 질문지도 반드시 확보할 것
특히 원 논문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이제 왜 그런 번거롭고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하는지 말씀드리죠.
국내에 번안되어 소개되는 과정에서 원 논문에서 사용된 척도가 난도질 당하는 일이 굉장히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문항을 수정하거나 몇 개 빼는 건 차라리 귀여울 정도입니다. 원 논문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번안하다 보니 지 맘대로 요인을 다시 나누거나, 기존에 있던 하위 요인을 아예 통째로 날려서 요인 구조를 조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가장 큰 문제는 역 채점 문항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원 논문에서는 역 채점을 하도록 되어 있는 문항을 그냥 정채점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많습니다. 역채점 문항을 정채점하면 어떻게 될까요? 심한 경우 역상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냐 하면 후속 연구자들이 국내 번안 연구의 척도만 가져다가 논문을 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논문 심사위원들도 분석 결과와 논의의 연결, 논리의 적절성 등은 유심히 보지만 설마 척도 자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거든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어떤 심리적 개념을 측정하기 위해 척도를 사용한다면 반드시 국내 번안된 질문지와 원 논문에서 사용된 질문지 두 개를 모두 확보하고 철저히 문항 비교를 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clear하지 않으면 아무리 정교하게 연구 설계를 해도 결과가 안드로메다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저라면
번안 논문의 저자가 누군지, 제대로 된 번안 절차를 거쳤는지도 꼼꼼히 살펴볼 것 같습니다.
태그 -
survey,
논문,
번안 논문,
실험법,
심리적 개념,
심리학,
양적 연구,
연구 논문,
질문지,
척도,
학위 논문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260
.
2013/07/10 15:54
.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트라우마 관련 척도(scale) 중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정리하는 중에 느꼈지만, 국내로 번안/수정되면서 요인분석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