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다 보면 간혹 PAI(Personality Assessment Inventory)에 대해 물어보는 분이 계셔서 이 참에 PAI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PAI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PAI 사용을 고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겉보기에는 MMPI-A와 비슷하면서도 문항 수가 적기 때문에 MMPI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지요. 하지만 PAI는 MMPI를 대체할 수 없으며 문항 수가 적은 것도 그다지 장점이 될 수 없습니다.
PAI의 유일한 장점은 한 문항이 여러 척도에 속하는 중복문항 문제가 없다는 것 뿐입니다. 저는 사실 이것도 큰 장점이라고 보지 않는 게 중복문항 문제가 없다는 게 장점이 되려면 각 척도가 측정하는 구성 개념이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평가자가 이해가 될 수 있는 수준으로 명확해야 합니다. 그런데 PAI는 그 정도로 좋은 검사가 아닙니다. MMPI는 초반에는 익히기 쉽지 않지만 반대로 쌓이는 경험치가 그대로 평가자의 노하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복문항 문제를 단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 문항 수는 어떨까요? PAI는 총 344문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MMPI-A의 경우 478문항이니 대략 25% 정도 문항이 줄어든 겁니다. 하지만 이걸 장점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문항 수가 많습니다. 실제로 청소년(
PAI는 가장 아래 규준집단이 고등학생이니 중학생에게는 실시할 수 없으며 이것도 단점 중 하나입니다) 입장에서는 344문항이나 478문항이나 심리적 부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수준입니다. 어차피 둘 다 하기 싫은 분량이죠. 게다가 MMPI-A는 '그렇다', '아니다'의 이분화된 문항(dichotomous item)이지만 PAI는 4점 likert 척도라서 동의하는 정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TCI의 단점 : 해석 시 주의사항'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TCI의 약점 중 하나가 likert 척도의 사용이기 때문에
문항 수가 적다는 PAI의 장점은 likert 척도의 사용으로 모두 상쇄됩니다. 오히려 응답 경향성 때문에 해석이 어려울 수도 있어서 장점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용의 충실도에서 MMPI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자기보고형 검사에서 문항 수는 당연히 척도 수와 상관이 있어서 문항 수를 줄이면 척도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PAI 문항 수가 적은 게 장점이려면 MMPI에서 측정하는 정보를 모두 제공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MMPI-2의 경우 타당도 척도가 9개인데 PAI는 4개에 불과하고 반응지표를 포함해도 7개로 MMPI-2보다 적습니다. 그나마 타당도 척도는 MMPI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임상척도는 MMPI와 비교했을 때 정보량이 많이 부족합니다. '신체적 호소', '불안', '불안관련 장애', '우울', '조증', '망상', '조현병'에 성격 병리 문제로 '경계선적 특징', '반사회적 특징'이 추가되었을 뿐이고 '알코올 문제', '약물 문제'까지만 측정합니다. 다분히 병원 장면에서 사용하기에 좋은 병리적 문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미 이보다 좋은 도구를 갖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MMPI-2/A-RF 버전이죠. 물론 저는 MMPI-2/A-RF 버전도 추천하지 않습니다만(
'MMPI-2/A-RF 버전을 상담자에게 추천하지 않는 이유' 참조).
그러니까 정신병리적 문제를 중심으로 임상척도를 구성했고 여기에 반사회적, 경계선 성격병리와 물질 중독 문제만 구색을 맞추어 추가한 수준입니다. 당연히 나머지 성격 병리, 행위 중독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MMPI-2/A-RF 버전과 달리 PAI에서는 하위척도 프로파일을 제공하기 때문에 소척도 연결 분석을 할 수 있으나 하위척도 내용도 지극히 정신병리적인 내용이라서 변별 진단을 주로 하는 병원 장면에서나 유용할까 상담 현장에서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치료 척도에는 '공격성', '공격적 태도', '언어적 공격', '신체적 공격', '자살 관념', '스트레스', '비지지', '치료거부'가 포함되는데 치료에 대한 순응도나 수검자가 보일 수 있는 행동 경향을 분석할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공격성에 대해서만 꽤나 detail하게 보여줄 뿐(개인적으로는 MMPI의 ANG, Ho 척도의 비교가 이보다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나머지 척도는 구색 맞추기로 포함된 것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 척도로 '온정성'과 '지배성'이 포함되었는데 MMPI의 보충 척도에 포함된 심리적 자원 척도인 Do, Re, Es 만도 못한 정보가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특히 중요한 성역할 척도가 없습니다.
따라서 PAI는 정보량의 부족 때문에 상담자에게는 추천할 수 없으며 정신병리적 관점에서 변별 진단만 하려는 병원 임상가는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라면 문항 수도 더 적고 likert 척도가 아니며, 선행 연구도 더 많은 MMPI-RF 버전을 사용하면 되니 굳이 PAI를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PAI를 개발한 선생님들과 관련된 학교, 제자들을 중심으로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마도 MMPI를 대체하지 못할 겁니다. MMPI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PAI는 현장 임상가들이 원하는 수준의 정보량을 제공하지 못하니까요. MMPI의 상대가 안 됩니다.
PAI 사용을 고민하는 임상가라면 고민하는 그 시간에 MMPI의 경험치를 조금이라도 더 쌓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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