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출처 :
YES24
슬라보예 지젝이 현존하는 철학계의 이단아이자 이슈 메이커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사람은 라캉,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도 유명하고 대중 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으로도 유명하죠.
영어로만 이미 60권이 넘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국내에도 30종이 넘는 저작이 번역 소개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2~3권의 책을 쓸 정도의 생산성 넘치는 다작가입니다.
이 책은 폭력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성찰을 정리한 겁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뒤집어 과연 무엇이 폭력인가라고 되묻는 삐딱하면서도 참신한 그만의 생각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들 중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이현우 선생이 잘 요약했듯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지젝의 주장이자 제안입니다.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오늘도 수많은 미디어들이 폭격하듯이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을 우리는 얼마나 여과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한 편으로는 동정하면서, 한 편으로는 분노하면서 말이죠. 그 내면에 자리잡은, 그 행간에 숨은 의미를 분석하고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소수일까요?
지젝은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 꼼수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한글판 부제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인데 적절한 네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이라는 현상을 슬라보예 지젝다운 시각에서 삐딱하게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상당히 어려울 걸로 각오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읽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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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 미디어가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에 파묻혀 있을 때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이 폭력을 초래하는지, 우리는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포스트모던 좌파의 좌장인 안토니오 네그리 자신이 디지털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모든 요소들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며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 우리가 내면의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다.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문제는 문화적 차이(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가 아니라, 정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이 이미 우리와 같아졌다는 사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기준을 내재화했으며 자기 자신을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실제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서구적 언어를 바탕으로 티베트 불교를 정당화하는 달라이 라마야말로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역설적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게 정말로 부족한 것은 바로 진짜 '인종주의자' 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다.
*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쉽게 견딜 수 있는 얘기다.
*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 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의지를 따르고 구원을 받기 위해 선행(자기가 선행이라 여기는)을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그저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
* 흄이 보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한 채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억압과 착취에 동의했음을 의미하는 형식적 제스처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 실질적 개선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이 아니라 '무정치적' 사회적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다.
*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모든 변화를 이루는데 궁극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환상이고, 바로 이 환상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처럼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부에서 바로 그 국가와의 거리를 두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도구로 이용해서 말이다.
* 간단히 말해서 폭력은 탈신비화돼야 한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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