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PI-2/A의 결과 profile에는 결정적 문항(Critical Items)이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MMPI-2의 결정적 문항은 Koss-Butcher의 6개 영역과 Lachar-Wrobel의 11개 영역을 합한 17개 영역(MMPI-A의 경우 15개 영역)으로 구성됩니다.
결정적 문항은 정신과 환자를 대상으로 이들이 주로 호소하는 증상과 문제들을 list up한 뒤 그 리스트에 따라 MMPI에서 관련성이 높아 보이는 문항들을 임상가들이 골라내고 의견 일치가 많이 된 문항을 환자 집단과 통제 집단에 적용하여 비교한 뒤 이 두 집단을 잘 구분하면 확정하는 방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결정적 문항의 장점은 안면 타당도가 높다는 것인데 임상가들이 현장에서 많이 접하는 증상을 중심으로 문항을 골라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죠. 다만 이는 미국 문화에 한합니다. 문화적 배경에 따른 해석 가능성의 차이가 큰 편이죠.
최근에 supervisor급 상담 전문가들이 수련을 받고 있는 선생님들에게 결정적 문항을 꼼꼼히 챙겨보라고 강조하는 모양인데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결정적 문항을 특별히 챙겨 볼 필요가 전혀 없거든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별해야 할 영역이 너무 많아서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크다
: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결정적 문항은 17개 영역에 달합니다. 수검자가 그렇다고 응답한 해당 문항이 하나만 있어도 결정적 문항 영역에 표시됩니다. 오히려 결정적 문항으로 잡히지 않는 영역이 적을 정도로 지나치게 예민하기 때문에 결정적 문항의 내용을 갖고 추가적인 면담을 진행하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2. 정신병리학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을 할 위험성이 너무 크다
: 시간과 에너지가 충분하다면 그래도 민감도가 높은 문항들이니 활용하면 좋지 않겠냐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결정적 문항은 현장 임상가들이 현장에서 자주 접하는 정신 질환의 증상을 토대로 골라낸 것들이라서 정신병리학(내지는 정신장애진단편람)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다면 잘못된 해석을 할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3. 시야가 제한되기 때문에 점점 더 결정적 문항에 의존하게 된다
: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결정적 문항에만 의지해 구조화된 면담을 진행하게 되면 결정적 문항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놓치게 됩니다. 즉 시야가 좁아져서 수검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틀이 고정되는 것이죠. 그래서 점점 더 결정적 문항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상담을 전공한 선생님들은 MMPI-2/A의 각종 척도와 수치 등을 조합해서 해석하는 것보다는 결정적 문항의 내용을 토대로 추가적인 탐색과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익숙할 수 있기 때문에 결정적 문항이 유용해보일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얻는 이득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소위 가성비가 좋지 않죠.
실제로
결정적 문항의 제작자들은 단일 문항 반응의 제한된 신뢰도와 타당도 때문에 문항 수준에서 검사 결과를 해석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으며 검사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할 때 제한적으로 사용하거나 follow-up을 위한 가설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라고 권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2005년에 MMPI-2가 표준화되어 출시했을 때 초기에 몇 번 사용해 본 이후로는 아예 안 봅니다. 결과지 출력할 때도 결정적 문항을 빼고 출력할 정도에요. 그래도 수검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결정적 문항을 사용하면서도 '이거 너무 시간 낭비 아닌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선생님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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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에 한국심리주식회사에서 Beck 관련 척도의 판권을 산 뒤 임상심리학회 정회원들에게
협조협박 문건을 발송한 내용을 포스팅한 적(
'한국심리주식회사가 Beck 척도 시리즈를 출시했습니다.....만' 포스팅 참조)이 있습니다.
그 때의 제 논조는 Beck 척도를 사용하는 관련자를 그렇게 잠재적 범죄자 취급까지 했어야 했냐는 감정적인 질타에 가까운 것이었는데요.
1년이 지나는 동안 이 척도들이 사용된 심리평가 케이스를 다수 supervision하면서 문제가 제가 생각하던 수준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로 봤던 건 BDI와 BAI인데요.
가장 큰 문제는 증상이 과도하게 평가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 수검자에게 MMPI-2/A와 BDI를 동시에 실시하면(기관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검사 수가를 맞추기 위해서 둘 다 실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도 불필요한 검사 비용을 수검자에게 떠넘기는 불합리한 관행입니다만)
전혀 우울하지 않은 타당한 MMPI-2/A 프로파일을 보이는 수검자의 경우에도 대부분 BDI 결과에서는 우울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BDI 결과에서 우울하지 않은 정상 수준으로 나타나려면 MMPI-2/A에서는 정상 수준이 아닌 S나 K가 비정상적인 수준까지 상승한 방어적 프로파일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BDI, BAI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해서 의미 그대로 해석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우울, 불안하지도 않은 수검자를 우울 장애, 불안 장애로 잘못 진단할 수 있는 false positive error가 높다는 말입니다.
물론 MMPI-2/A와 BDI, BAI가 함께 상승한 수검자의 경우는 BDI, BAI의 문항 내용 분석을 통해 수검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이 또한 MMPI-2/A의 문항 분석(결정적 문항 등)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불필요한 비용과 심리적인 부담을 수검자에게 전가하는 BDI, BAI를 굳이 실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나마 MMPI-2/A를 함께 실시하는 경우라면 그래도 해결책이 있는데 선별평가에서 BDI, BAI만 사용하는 경우는 정말 큰일입니다. 임상심리전문가가 없거나 파트 타임 임상가로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local NP에서 여전히 BDI, BAI만 사용해서 우울 장애, 불안 장애로 진단하고 약물치료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거든요.
저는 false positive error가 높게 나타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BDI, BAI를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덧. BDI의 경우 높은 수준으로 측정된 사례의 문항 내용을 살펴보면 endogenous depression에서 흔히 나타나는 vegetative symptom 관련 문항보다는 guilty feeling, punishment, internal attribution 관련 문항이 높게 평정된 경우가 굉장히 많은 걸 흔히 볼 수 있는데 역기능적인 신념이나 자동적 사고 교정, 대인 관계 역동 분석을 해야 하는 수검자를 약물치료에만 의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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