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는 부부용이라고 했지만 갈등이 일어나는 2자 관계라면 상대방이 배우자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부모 형제가 되었든 간에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소위 대화 기술을 가르치는 많은 책들이, 때로는 상담에서도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감적 경청을 해야 한다, 입을 열지 말고 귀를 열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듣기보다 말하기가 더 중요하다고요. 경청을 하려면 말을 하는 상대방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둘 다 똑같이 경청만 하려고 한다면 무슨 소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서로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격화되는 게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첫째.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해 억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말하는 비율의 압도적 차이가 생기므로(그 압도적 차이를 일시에 좁히려고 상대방이 감정을 실어 말하는 등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 둘째.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잘못된 말하기 방법(비아냥, 냉소, 과잉 일반화, 허수아비 공격, 논리적 비약 등). 즉, 둘 다 말하기 방법의 문제입니다.
결코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말하기가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말하기는 생각하기를 전제하고 있고(아무런 생각없이 말한다는 통념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마세요. 그런 무뇌인간은 거의 없습니다),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감정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전달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말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말을 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 대화와 마음의 창을 닫은 문제는 말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 제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몇 가지 원칙 또는 팁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내가 말을 해야 상대방이 듣는다. 일단 말을 시작해야 한다.
: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나서 그 다음에 이야기해야지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전례가 있지 않나요?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꼬투리를 잡을 준비를 하고 듣게 됩니다. 반대로 꼬투리를 잡히기 싫어서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보세요.
둘째. 내가 다 말하기 전에는 대화가 끝난 것이 아니다.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의 말을 듣자.
: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 이유는 공감적 경청 따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공감적 경청은 전문적인 상담자나 대화 기술을 충분히 훈련한 사람들이나 가능한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상대방의 말을 듣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 위해서입니다. 돌려서 말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지 않았다면 대화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말을 들으세요. 그 다음에 내가 말할 순서가 올 겁니다. 남자에게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후퇴할 동굴이 필요하다는 말 따위도 믿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동굴은 필요합니다. 단지 감정적으로 폭발할 것 같을 때 열을 잠시 식히기 위해서 필요한거죠. 감정이 가라앉으면 곧 다시 돌아와 말하기를 재개해야 합니다.
셋째. 말할 때 상대방이 나를 알아줄거라 기대하지 말고 내 말만 하자.
: 이게 가장 중요한 팁인데 보통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말할 때 상대방이 내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데 그 기대가 당연히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상대방이 하는 말은 듣지 않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려고 노력하는 게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자꾸 이야기하지만 공감적 경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엄청난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해요. 좀 더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말을 할 때 상대방이 이렇게 저렇게 반응했으면 하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 겁니다. 만약 아무리 해도 그런 기대를 내려놓을 수 없다면 당신은 상대방과 대화를 할 게 아니라 전문 상담자와 상담을 먼저 해야 합니다.
넷째. 절대적인 대화의 양을 늘려라. 그게 꼭 양질의 대화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내용이 더 낫다.
: 말을 줄이는 이유 중 하나는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하려고 머릿속에서 걸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필터를 작동시키면 점점 말 수가 줄어들 뿐입니다. 좋은 말이 10%에 불과하더라도 10개 중 1개보다는 100개 중 10개가 훨씬 낫다는 걸 기억하세요. 일단은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의 연결 고리가 생기게 됩니다. 나머지 90개의 말 실수는 어떡하냐고요?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감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지만 그런 실수는 말을 할수록 점점 줄어들게 되어 있고 어차피 말을 계속 해야 말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깁니다. 그러니 10%의 비율을 좀 더 늘리고 내용의 quality를 높이는데 주력하는게 더 효과적입니다.
다섯째. 갈등을 두려워하지 마라.
: 이 글을 주의깊게 읽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일테고 그 사람과 관계 개선을 하고 싶어서일겁니다. 평생 꼴보기 싫은 사람이라면 모든 부담을 무릅쓰고 일부러 말을 꺼내려는 시도 자체를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그러니 말싸움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런 두려움을 누르고 자꾸 말해야 다름과 차이를 줄일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할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싸움이나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는 방법이 건강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여섯째. 말하기에도 기술과 연습이 필요하다.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히자.
: 앞서 말씀드린 다섯가지 원칙과 팁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데도 뭔가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 들고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드디어 말하기 기술을 익힐 시간입니다. 비폭력 대화법, I message로 말하기 등등 말하기 기술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이 블로그에 소개한 책만 몇 권 참고해도 충분합니다. 다만 모든 기술은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수 있을때까지 반복 훈련해서 체화해야 한다는 것만 명심하세요. 머리로만 아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스텝을 계산하면서 춤을 추는 건 춤을 추는 게 아니듯이 어떤 기술을 사용할 지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다면 제대로 된 말하기가 아닙니다. 음악을 들으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결국은 중요한 건 이겁니다.
일단 말하세요. 나머지는 그 다음입니다. 입을 닫지 마세요. 그럼 마음이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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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공감적 경청이나 수용으로 착각하는 상담자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몇 년 전에 부하 여직원이 자기 맘대로 성희롱을 했다고 오해하는 바람에 상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여성들을 대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이 듭니다"라고 내담자가 말했다고 해 보죠.
이 때 'trauma에 의해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내담자구나. 혹시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나 여자 형제와 관계 맺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내담자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상담자 마음대로 소설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상담은 심리평가와 다르고 형사 취조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 확인에 목을 맬 필요는 없습니다. 상담에서의 사실이란 것은 이미 내담자의 인지틀 안에서 기억 윤색이나 망각 등으로 어느 정도 왜곡된 상태이기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확인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담자가 하는 말이 주관적 사실에 가까울거라고 가정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위의 예라면 '대체 어떤 일인데 단 한번의 사건으로 여성에 대한 불편함이 시작되었을까, 발단이 된 에피소드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이 났을까, 불편한 마음이라는게 직장에서 만나는 여성과의 사이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아니면 직장 밖에서 만나는 여성에게도 일반화 된 것일까'처럼 궁금증을 갖고 다양한 각도에서 물어봐야 하는 것이죠.
이래서
상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내담자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상담자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그냥 넘기지 않고 물어보되 내담자와 내담자가 갖고 온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에 기반하는 것이죠.
그러면 내담자가 갖고 있는 생각의 오류나 착각, 오해, 지각의 왜곡 등을 찾아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담자가 하는 말을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담자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질문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상담자도 확신하지 못하는 길을 가라고 내담자에게 권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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