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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선생의 글은 월덴 3에서도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2005)'와
'예수전(2009)'을 통해 두어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김규항 선생은 진보로 평가되는 인물들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말씀드리지만 김규항 선생의 글에 대한 평가는 제 높은 선호도를 어느 정도 감안하여 보셔야 합니다.
이 책은 2005년 8월부터 2010년 3월까지 각종 매체에 실린 기고글과 일기, 각종 단상을 모아서 펴낸 것입니다. 연도 별로 글꼭지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왜냐?
출판사인 리더스하우스의 편집자도 서두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사회적 맥락을 알고 읽어야만 글 속의 함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책은 길게 소개할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 김규항 선생의 글은 읽을 때마다 저를 변화시킵니다. 제 삶을 더 낫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요즘 구설수에 많이 오르는 진모씨의 화려하지만 뒷맛 쓴 글빨과는 그래서 차원을 달리한다고 평가합니다. 김규항 선생의 글은 곰씹어 볼수록 달고 몸에도 이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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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 상대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 그에게서 배우겠다는 것이다. 진정한 예의는 아래로만 혹은 위로만 흐르지 않는다. 진정한 예의는 아래로도 위로도 흐른다. 그럴 때 예의는 비로소 품위가 된다. *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지배 체제와 불화할 수 밖에 없다. 지배 체제와 불화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그런 자들은 실은 예수의 명성을 빌려 제 말을 할 뿐이다. * 회개란 교회에 안 가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뒤집는 것'이다. * 지금 우리의 적은 군사 파시즘이나 그 잔재들이 아니라 새로운 파시즘, 자본의 파시즘입니다. * 세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눈, 즉 교양이다. 물론 교양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정직한 태도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 결국 세상에 대한 견해나 태도는 세상을 세로로 나누려는 세력과 가로로 나누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태도나 견해란 민족이나 국가로 은폐된 세상을 애써 계급으로 나누어보려는, 그 실체를 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런 노력의 가장 실제적인 방해물이 이른바 '국익'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라는 것, 인민에게 필요한 건 국익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 오늘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바로 개혁 우파 세력이다. 개혁 세력은 수구 세력의 도움으로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고 개혁이 진보를 자처하니 극우파인 수구는 아주 멀쩡한 보수로 행세할 수 있었다. * 실천으로 드러낼 수 없다면 다른 게 아니다. * 지배계급은 언제나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개념 흐리기'를 사용한다. * 가난은 적게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몫을 늘리는 보다 정당한 삶이며, 적은 땅을 사용하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태움으로써 파괴되어가는 지구에 생명의 도리를 다하는 보다 품위 있는 삶이다. * 오늘 한국 사회가 미궁에 빠지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민주화가 실은 자본화(신자유주의화)였다는 것,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민주화를 통해 국가권력이 자본을 거느리는(박정희가 이병철을 거느리는) 지배 체제에서 자본이 국가권력을 거느리는(이건희가 노무현을 거느리는) 지배 체제로 변화했다. * 비폭력주의는 서재나 연구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당사자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폭력 현장의 아픔과 당사자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비폭력주의는 폭력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이자 당사자에겐 폭력보다 더 가혹한 폭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닙니다. * 우리가 늘 잊곤 하는 사실은,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힘은 보수 반동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만큼이라도 어딘데' 하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민주화 이후, 혹은 김대중 정권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광풍이 가져온 여러 사회 변화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건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자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최소한의 꼴을 갖춘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나눔은,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행동이다. * 자유주의 우파는 먹고살 만한 양식 있는 시민들을 대변하지만, 좌파는 시민이라 불리면서도 시민으로서 인간적,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지 못한 대다수 인민을 대변한다. * 진실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는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존경이든. * 노예는 주인의 호사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른 노예의 나은 처지는 참질 못한다. *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 * 듣기 싫든 좋든 그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에 집중하면 돼. 그래야 똑똑한 사람이다. * 다른 생각을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 특히 친노(노빠라 부르기는 저도 참 싫군요)들께서는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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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나 상담에서 임상가들은 내담자가 갖고 있는 스키마를 찾아내고 분석하려고 애씁니다. 인지행동치료자라면 더더군다나 그런 작업이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임상가도 사람이고 당연히 스키마를 갖고 있습니다. 역시나 당연히 임상가의 스키마가 상담자와 내담자의 치료 관계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 상담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치료자 schema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했습니다.
스키마(Schema) 목록
* 기준 요구
: "내 모든 내담자를 치료해내야만 한다. 나는 항상 높은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내 내담자는 치료적 작업을 뛰어나게 해내야만 한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 특별한, 우월한 사람(자기애적 스키마)
: "나에게는 성공할 만한 특권이 있다. 내담자들은 내가 그들을 위해 하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상담을 할 때 지루해져서는 안 된다"
* 거절 민감
: "갈등은 당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내담자를 괴롭히는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 버림받음
: "만일 내 상담을 힘들어한다면 내담자는 나를 떠나버릴 것이다. 내담자가 상담을 종결하려고 하면 당황스럽다. 모든 내담자들이 나를 떠날 것이다"
* 자율성
: "나는 내담자에게 조종당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 동작, 느낌, 내가 말하는 것이 제한을 받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거나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가끔 나는 상담에서 나 자신을 잃을까 봐 염려된다"
* 통제
: "나는 내 주변이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통제해야만 한다"
* 비판
: "어떤 사람은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다.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
* 피해의식
: "내담자들은 내게서 뭔가 쉽게 얻으려고 한다. 나는 이용당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그들을 항상 믿을 수는 없다"
* 승인 욕구
: "나는 내담자가 나를 좋아하기를 바란다. 만약 내담자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면 그것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타인을 좋아해야 할 필요성
: "내가 내담자를 좋아하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내담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한다. 우리는 친구처럼 함께 가야 한다"
* 억제
: "나는 내담자에게 내 생각과 느낌을 알리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싶지 않다. 나는 상담 시간 동안 감정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 무력감
: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실수할까 두렵다. 내가 정말로 능력이 있는지 고민이다. 가끔 나는 포기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목표 억제
: "내담자는 내가 목표를 성취하는데 방해가 된다.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다"
* 지나친 자기희생
: "나는 내담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나는 그에게 더 나은 느낌이 들게 해 주어야만 한다. 대개 내담자의 욕구는 내 욕구보다 우선한다. 나는 가끔 그의 요구를 어떤 것이라도 들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 감정 억압
: "나는 내가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내담자와 함께 있을 때 좌절감을 느낀다. 나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출처 : 'Overcoming Resistance in Cognitive Therapy' by Robert L. Leahy 중 일부 내용 발췌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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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판을 받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없을 테고요.
하지만 누군가 내 잘못을 이야기하면 혹시 그게 사실이 아닐까 한번쯤은 의심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그게 사실일 경우 바로잡고 고쳐야 발전이 있습니다.
"걔는 대체 왜 그런다니?", "왜 우리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고자질하냐?"라고만 발뺌하면서 뭐가 문제인지 살펴볼 생각을 안 한다면 그게 사람이든, 조직이든 더 이상 발전은 없습니다.
자기가 속한 조직을 비판하면 그 똥물이 나에게는 튀기지 않을까요? 내 얼굴에 침뱉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그 사람이 개망신을 당하건, 그 조직이 망하건 말건 나 하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뭐하러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잘못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우리 솔직하게 나이, 학력, 출신 등 모든 계급장 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 해 봅시다.
문제가 정말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문제가 되지 않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그걸 누가 이야기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문제를 고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이야기하고 누가 이 문제를 고칠 겁니까?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달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참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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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한국 경제 길을 말하다', '사다리 걷어차기' 등으로 신자유주의의 허구를 밝히는데 큰 공헌을 해 온 장하준 교수가 2008년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집대성 해 내놓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2008)'를 북 크로싱합니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소개글'을 참고하시고요.
장하준 교수의 기존 저작물을 읽지 않았던 분들이라도 이 책 한 권으로 신자유주의의 실상을 꺠부수는데 충분히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다른 책에 비해 전문용어가 많고 무거워 난이도는 좀 높은 편입니다. '나쁜 사마리아인'에 비해 어려운 편입니다.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 월덴 3의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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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지식만 적당히 갖고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안 제시는 아무나 할 수 없죠. 풍부한 지식과 경험 뿐 아니라 문제 개선을 하려는 의지와 애정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첨병 역할을 자처하는 장하준 교수가 2008년에 내놓은 이 책은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누차 이야기를 했던 것들의 총 집결판입니다.
1부 경제 발전에 대한 신화와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아래의 신화들을 실증적 근거에 따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신화1.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자유 시장 원리를 지속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신화2.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한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려 왔다.신화3.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중단될 수도 없고 중단되어서도 안 된다.신화4.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은 모든 개발도상국이 모방해야 할 이상적인 형태다.신화5. 영미형 모델이 보편적 시스템인 반면 동아시아 모델은 특수한 시스템이다.신화6. 개발도상국은 국제기구와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국내 정책 기관이 요구하는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
속이 다 시원하죠. ^^
2부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정책 대안에서는 무역과 산업, 민영화, 지적재산권, 국제 민간 자본 흐름, 국내 금융 규제, 환율과 통화 정책, 재정 정책 분야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설 대안들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비해 아무래도 난이도는 조금 높습니다만 일독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정책 입안자들이 봐야 하는 책인데 정작 이놈의 정부는 절대로 보지 않을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 금서로 지정하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신자유주의에 대해 종합적인 이해를 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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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부터 임상심리학회 게시판의 글쓰기와 답글 달기 기능이 실명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악플을 차단하기 위해 정통부에서 강력하게 권고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의사개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서마저도 완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명제를, 임상심리학회에서 몇몇 회원들의 요청만으로 단행한 것입니다. 솔직히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이야기도 못하겠습니다.
사실 그간 감정적인 게시글과 덧글이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포털 사이트의 자유 게시판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정도가 약한 편인데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부 집행부의 과잉 대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실명제를 대체 왜 실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보기 싫으니까 이름 까고 말하라는 것으로 밖에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회원들의 의견도 수렴하지 않고, 양해를 구하는 공식적인 공지글 하나 없이 달랑 안내 문구 하나 걸어놓은 것을 보면 무시당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확 상합니다. 까라면 그냥 까야하는 겁니까? 요새는 군대도 그렇게 안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름 밝히고 떳떳하게 말하라"는 요구라면 더더욱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수련 제도 자체가 엄격한 도제 시스템에 입각해 사실상 '언로'가 막혀 있는 임상심리학회에서 실명으로 글을 올리라는 것은 비판적인 말일랑 할 생각을 말고 입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번 실명제 실시를 촉발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MMPI 저작권 관련 글들은 사실 현장, 특히 병원 장면에서 일하는 임상 심리학자라면 엄청난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 사안이고 학회에서 신속하게 후속 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명제 실시라니요. 뭔가 거꾸로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명색이 사람의 심리를 다룬다는 사람들이 감정적인 글의 행간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고 다소 무례하고 보기 싫다고 해서 실명제를 실시한다니 참 답답합니다.
집행부 및 회원들의 요청이라고는 하지만 누구의 요청인지도 상당히 궁금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수련을 받고 있는 선생님들은 단 한분도 안 계실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명제를 주장하신 선생님들 중 지금까지 게시판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분이 얼마나 되는지도 정말 궁금합니다.
앞으로 실명제 게시판에 소위 영양가가 있는 글이 올라오기는 힘들 겁니다. 가뜩이나 썰렁한 학회 게시판이 실명제 실시 이후로 파리만 날리고 있죠. 저라도 제 이름을 걸고 글을 올리기가 꺼려집니다. 그만큼 임상심리학회는 좁고 뒷말이 많은 곳입니다.
게시판의 실명제 실시는 재고되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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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에 대한
세 번째 비판은 진화심리학이 유전자 결정론을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진화심리학자들이 유전자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환경을 경시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유전자 결정론은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고 사회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비판론자들은 진화심리학이 유전자 결정론을 조장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 중 많은 것은 불가피하며 고칠 수 없는 것으로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심장과 두뇌의 크기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심장과 두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크기의 마음의 모듈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의 설계는 기본적으로 모두 똑같습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마음의 기본적인 설계 특징, 즉 인간의 본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이 개인차를 나타나게 하는 유전적 또는 환경적 요인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해 어떤 말을 할 때에는 행동유전학의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이는 인간 행동의 대부분 특성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 모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할 뿐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진화심리학을 포함해 과학은 사실 주장을 하는 데서 그치고, 가치 판단의 문제는 윤리학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미루고 있습니다(점점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는 있지만).
출처 : 진화 심리학(by Dylan Evans & Oscar Zarate)
- 온라인 문법/맞춤법 점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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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진화심리학이 '환원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의 선두 주자는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입니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비판자뿐 아니라 간혹 심리학자들도 '환원주의'하면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환원주의는 모든 과학의 기본적인 절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중력 이론은 행성과 별들이 보이는 여러 움직임을 한 가지 힘, 즉 중력으로 환원시킵니다. 즉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현상을 하나의 본질적인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 '환원'입니다.
문제는 단순성을 추구하는데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정확성을 희생할 때 발생합니다. 이를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탐욕스러운 환원주의'라고 부르며 과학적 관행인 환원주의와 구분하였습니다.
사실 진화심리학자들은 서로 달라 보이는 현상들을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다루는 복잡한 현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환원주의자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마음은 모듈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원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티븐 핑커(Stephen Pinker)의 말입니다.
출처 : 진화 심리학(by Dylan Evans & Oscar Za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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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은 지금까지 나온 과학 이론 중 큰 성공을 거둔 두 이론인 진화생물학과 인지심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tephen Jay Gould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진화심리학이 '범적응주의'라는 비판입니다. 범적응주의는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을 적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module 들은 인체를 구성하는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이 살던 환경에서 제기된 특정 문제들을 풀기 위해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적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모든 생물학적 특성이 다 적응은 아니며 어떤 것들은 단순히 적응의 부작용이거나 부산물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뼈가 흰색인 것은 적응이 아니라 뼈가 칼슘으로 만들어진 데서 나온 부수 현상이죠.
마음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것이 그렇습니다. 문자는 겨우 5천 년 전에 발명되었기 때문에 자연 선택이 문자를 읽기에 필요한 복잡한 적응을 설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는 읽기 모듈이 없습니다.
이 사실은 진화심리학자들이 마음의 지도를 작성하려고 할 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복잡한 능력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모듈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Stephen Jay Gould는 진화심리학자들이 바로 이런 오류를 쉽게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진화심리학자들은 범적응주의에 빠져 있을까요?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진화심리학자들은 오히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어떤 것을 적응이라고 부르는 것을 매우 주저합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미국의 생물학자인 George Williams가 1966년에 출판한 '적응과 자연선택'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경험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적응은 그것이 정말로 필요한 곳에만 사용해야 할 특별하고 부담스러운 개념이다' 라는 것입니다.
진화심리학이 태동하던 당시라면 모르겠지만 최근 진화심리학자들은 오늘날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이 다른 것을 위해 설계된 모듈들에서 나온 부수 효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화심리학은 석기 시대의 생활을 위해 설계된 마음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엄청난 문화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지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출처 : 진화심리학(by Dylan Evans & Oscar Za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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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총장의 발언에 대한 포스팅에 달린 덧글에 다시 덧글을 달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판은 누가 해야 정당한 것인가?'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을 하면 흔히 따라붙게 되는 비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도 못한게...", "알지도 못하면서...", "네가 못 들어가니까 열등감에 하는 말 아니냐..." 등등
여성의 군대 문화 비판, 비 서울대생의 서울대 비판에서 처럼이요.
그렇다면 현역 군인의 군대 문화 비판, 서울대 출신의 서울대 폐지론 옹호는 어떤가요? 분명 무경험이나 열등감의 소산이라는 비난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겠지만 이제는 내집단(ingroup) 구성원의 비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조직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한 놈이...", "어떻게 자기가 속한(했던) 집단을 비판하느냐, 은혜도 모르는 놈.." 등등
전에 어떤 포스팅에도 썼지만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저보고 어떻게 자기가 속한 집단을 비판할 수 있느냐고 나무랐던 제 윗사람이 제가 지금 속한 조직에 대해 사회에서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자기가 속한 집단이라고 옹호할 생각을 한다고 나무라더군요(나보고 어쩌라고~).
그나마 저는 배신자라는 오명이 열등감의 소산이라는 비난보다는 견디기가 더 쉽더군요. 현실적인 불이익만 감수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삼성 계열에서 일한 경력으로 삼성을 비판하고, 서울대에서 공부한 학력으로 서울대를 비판하고, 임상 심리학자라는 직업으로 임상 심리학을 비판합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다면 뭐하러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비판을 할까요? 애정 관계에서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indifference)이라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과연 건전한 비판이란 가능한 걸까요?
덧. 아래 포스팅에 덧글을 다신 분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혹시 오해하실까 봐 노파심에서 말씀드림. 소심한 월덴지기 ^^;;;). 쓴소리를 해 주시는 분들이 저는 항상 고맙습니다. 덧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자주 떼를 쓰지만 뒤돌아서는 많이 반성하고 배우고 그런 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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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직접 하는 사람과 말을 하는 사람
이오공감에 올라온 A-typical님의 글을 읽다가 생각난 바가 있어 끼적여 봅니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 상황인지 모르겠지만(아마도 비슷한 양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리학 분야에서는 참으로 비판에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논문을 심사하든, 프로젝트 미팅을 위해 모이든, 심포지엄의 패널로 참여하든 말이죠. 너도나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흠을 찾아내고 결점을 지적해 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판은 난무하는데 대안은 별로 나오지 않더군요. 논문을 심사받고, 프로젝트 미팅을 주재하고, 심포지엄을 계획한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대안일 텐데 말이죠. 대안이 없는 비판은 자칫 비난으로 오해받기 쉽고 결국 인신공격으로 확대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가 쉽습니다. 그런 오해로 인해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심리학자들을 저는 꽤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대안없는 비판을 하는 사람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제가 리드하는 자리에서는 꼭 비판하는 사람에게 대안을 요구합니다. 물론 비판에는 강하나(뛰어난 분석력이 있으니) 대안에는 약한(창의성이 부족하니)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 사람에게 비판할 부분을 정리해서 서면으로 회람하고 모임에서는 침묵을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그 사람의 비판이 다른 사람들의 대안 제시를 막을 수 있으니까요.
비판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못 찾아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안 제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평소에 치열한 공부와 고민을 한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대안(물론 영양가가 있어야겠지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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