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든 타의든 도박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도박 중독자가 치유 과정 초기에 잘 빠지는 함정 중 하나가 약속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인 도박은 어차피 할 수가 없는 상태이고 지금은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안 할 수 있지만 가족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도박을 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 상처받은 가족들에게 뭔가 점수를 딸 요량으로 이런저런 약속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담배를 끊거나, 술을 줄이거나, 정기적인 운동을 하겠다거나, 집안일을 돕겠다는 등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가족들이 그런 노력을 보여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강요하는 것도 사실 문제입니다만) 단도박 의지를 보여주겠노라며 스스로와 약속을 하는 건 좋지만 가족과 지인들에게 공공연히 약속을 하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도박 중독 때문에 의지력이 한껏 약화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단순해보이는 행동 변화도 이루기가 쉽지 않거든요. 도박까지 못하는데 친구들과 만나서 회포를 푸는 술자리의 횟수를 갑자기 줄이는 게, 도박을 그만둔 지금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던 담배까지 끊는다는게 과연 생각만큼 쉬울까요?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도박자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이런 약속 위반은 가족들에게 더 큰 실망감을 주게 되고 도박자의 단도박 의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갈등이 더 심해지게 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킬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공약 남발이 아닙니다. 정말 가족들에게 신뢰를 주고 싶고 자신의 변화 의지를 보여주고 싶다면 약속하지 말고 묵묵히 실천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도박자에게 필요한 건 약속이 아니라 실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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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김규항 선생의 글은 월덴 3에서도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2005)'와
'예수전(2009)'을 통해 두어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김규항 선생은 진보로 평가되는 인물들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말씀드리지만 김규항 선생의 글에 대한 평가는 제 높은 선호도를 어느 정도 감안하여 보셔야 합니다.
이 책은 2005년 8월부터 2010년 3월까지 각종 매체에 실린 기고글과 일기, 각종 단상을 모아서 펴낸 것입니다. 연도 별로 글꼭지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왜냐?
출판사인 리더스하우스의 편집자도 서두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사회적 맥락을 알고 읽어야만 글 속의 함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책은 길게 소개할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 김규항 선생의 글은 읽을 때마다 저를 변화시킵니다. 제 삶을 더 낫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요즘 구설수에 많이 오르는 진모씨의 화려하지만 뒷맛 쓴 글빨과는 그래서 차원을 달리한다고 평가합니다. 김규항 선생의 글은 곰씹어 볼수록 달고 몸에도 이롭죠.
닫기
*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 상대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 그에게서 배우겠다는 것이다. 진정한 예의는 아래로만 혹은 위로만 흐르지 않는다. 진정한 예의는 아래로도 위로도 흐른다. 그럴 때 예의는 비로소 품위가 된다. *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지배 체제와 불화할 수 밖에 없다. 지배 체제와 불화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그런 자들은 실은 예수의 명성을 빌려 제 말을 할 뿐이다. * 회개란 교회에 안 가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뒤집는 것'이다. * 지금 우리의 적은 군사 파시즘이나 그 잔재들이 아니라 새로운 파시즘, 자본의 파시즘입니다. * 세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눈, 즉 교양이다. 물론 교양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정직한 태도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 결국 세상에 대한 견해나 태도는 세상을 세로로 나누려는 세력과 가로로 나누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태도나 견해란 민족이나 국가로 은폐된 세상을 애써 계급으로 나누어보려는, 그 실체를 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런 노력의 가장 실제적인 방해물이 이른바 '국익'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라는 것, 인민에게 필요한 건 국익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 오늘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바로 개혁 우파 세력이다. 개혁 세력은 수구 세력의 도움으로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고 개혁이 진보를 자처하니 극우파인 수구는 아주 멀쩡한 보수로 행세할 수 있었다. * 실천으로 드러낼 수 없다면 다른 게 아니다. * 지배계급은 언제나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개념 흐리기'를 사용한다. * 가난은 적게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몫을 늘리는 보다 정당한 삶이며, 적은 땅을 사용하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태움으로써 파괴되어가는 지구에 생명의 도리를 다하는 보다 품위 있는 삶이다. * 오늘 한국 사회가 미궁에 빠지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민주화가 실은 자본화(신자유주의화)였다는 것,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민주화를 통해 국가권력이 자본을 거느리는(박정희가 이병철을 거느리는) 지배 체제에서 자본이 국가권력을 거느리는(이건희가 노무현을 거느리는) 지배 체제로 변화했다. * 비폭력주의는 서재나 연구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당사자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폭력 현장의 아픔과 당사자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비폭력주의는 폭력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이자 당사자에겐 폭력보다 더 가혹한 폭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닙니다. * 우리가 늘 잊곤 하는 사실은,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힘은 보수 반동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만큼이라도 어딘데' 하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민주화 이후, 혹은 김대중 정권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광풍이 가져온 여러 사회 변화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건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자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최소한의 꼴을 갖춘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나눔은,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행동이다. * 자유주의 우파는 먹고살 만한 양식 있는 시민들을 대변하지만, 좌파는 시민이라 불리면서도 시민으로서 인간적,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지 못한 대다수 인민을 대변한다. * 진실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는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존경이든. * 노예는 주인의 호사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른 노예의 나은 처지는 참질 못한다. *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 * 듣기 싫든 좋든 그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에 집중하면 돼. 그래야 똑똑한 사람이다. * 다른 생각을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 특히 친노(노빠라 부르기는 저도 참 싫군요)들께서는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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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는 내 손에 무기가 없음을 상대방에게 먼저 보임으로써 신뢰를 쌓는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부치료나 상담을 할 때에도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라기보다는 나부터 변화하자'는 것입니다.
갈등이 있는 부부는 대부분 "저 사람만 고치면 됩니다"라고 말하지만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그래서는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내가 먼저 바뀌어야 그 영향으로 인해 상대방이 바뀌게 됩니다. 'give & take'에서도 'give'가 먼저 나오죠. ^^
제가 즐겨쓰는 '테니스 코트의 비유'를 들자면 내가 내 코트에 넘어온 공을 먼저 성실하게 상대편 코트 안쪽으로 넘겨줘야 상대방이 성실하게 뛰어와서 받는 것이지 관중석으로 헛방을 날리면서 상대방이 성실하게 경기에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최근에 제가 상담하는 부부에게 과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바뀌었으면 하는 점'을 적고 이것을 서로 교환한 다음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골라서 지키도록 노력하는 과제였는데 단 2주 만에 부인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정말 영화와 같이 부부의 사이가 신혼 때처럼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서로 잘해주려고 경쟁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끝까지 손을 뒤로 감추고 있으면 상대방은 진심으로 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내가 먼저 바뀌고, 내가 먼저 주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꿈변화는 이루어집니다. ^^
덧. 가끔 '내가 일단 먼저 주면 저 사람도 그만큼 주겠지?' 하는 기대로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얄팍한 마음가짐으로는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궁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어렵습니다. 자발적인 내 변화에 고무되어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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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몇몇 특수(?)한 하위 분야를 제외하고 심리학자들은 입으로,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임상이나 상담 분야는 두 말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바닥에서 일을 하다보니 어떤 깨달음(사실 편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언론 매체에 얼굴 팔리는 것 좋아하는 사람치고 전문가 없고(대체 새로운 전문지식을 습득할 시간을 낼 수가 있어야지요), 사람들 앞에서 떠드는 것 좋아하는 사람치고 실제 일하는 사람 없더군요.
요새 제가 기득권층에 욕먹을 작정을 하고 몇 가지 일을 벌리고 있습니다. 예상했던대로 우려와 신중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비판을 받으면 참지 못하는 속좁은 성격이라서 바로 받아칠까 생각하다가 시간을 좀 두고 지켜봤습니다.
역시 아무런 행동이 없더군요. 그저 말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포스팅한 글(
비판을 하는 사람과 대안을 내놓는 사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안을 내놓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대안을 앞서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그리고 일을 내는 것은 그 소수의 사람입니다.
제가 온라인 토론문화를 믿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말 많은 사람치고 결코 행동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저 말 뿐입니다. 행동하는 사람은 앞에 나서서 떠들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이 뒤따르게 됩니다. 선구자의 길을 가는 것이지요.
원래 떠들기 좋아하는 제 성격 상 말 없이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입과 머리와 손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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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용 제목으로 한가위 이후 첫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
낚시용 제목보고 들어온 분들 중 월덴 3를 처음 방문한 분들은 트랙백, 댓글을 달기 이전에
대문의 안내글을 꼭 차근차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페로페로님의 포스팅에 걸린 트랙백을 타고 들어온 분들은 이 글이 페로페로님의 포스팅과 상관없이 이전에 작성된 것임을 아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이 글은
댓글/트랙백/방명록 기부금 모으기 캠페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도 미리 밝혀둡니다. ^^;;;
한가위 연휴 시작 무렵에 일찌감치 대전에 계신 어른(?)을 1박 2일 일정으로 뵙고 왔습니다. 처음으로 내려간거라서 그랬는지 이런저런 화제가 끊이지 않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대체 왜 그리로 빠졌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_-;;;). 그 어른은 남자가 (자존심상하게) 왜 앉아서 소변을 봐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저를 비롯해 다른 여성(제 아내와 그 어른의 부인되시는 분)들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남자가 앉아서 소변을 봐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올 3월 경에 이글루스를 비롯한 여러 블로그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던 적이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검색해서 찾아보시기를 바라고...
저는 소변기가 설치된 공중 화장실이 아닌 경우 반드시 좌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봅니다. 제가 앉아서 소변을 보는 이유는 그것이 양성평등으로 가는 작은 실천이기 때문이 아니며, 정력에 도움이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훨씬 위생적이고 동시에 다음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왜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이 좋은지 모르는 남자는 화장실 청소를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거나, 해 본 적은 있지만 평소에 하지 않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거의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에게, 미혼이라면 어머니에게 애도를...
저는 제가 욕실 청소를 (아내와 번갈아) 하기 때문에 좌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봅니다. 서서 소변을 보면 아무리 조심을 하고 조준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변이 튀기 때문에 금방 지저분해지고, 냄새가 심하게 나며 청소하는데 훨씬 더 힘이 많이 듭니다. 엉덩이를 까고 앉는 수고만 하면 조준이 틀릴까봐 전전 긍긍할 필요가 없고, 배설의 기쁨에, 짧은 사색의 기쁨까지 덤으로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바지를 내리고 좌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해서 '고추'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목젖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침에 한시적으로 앉아서 소변을 보기에 불편한 상황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조준하느라고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서서 소변보기에 비한다면 사실 별 것 아닙니다.
편안히 앉아서 배설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
덧1. 저는 배움의 기회가 반드시 직접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삶의 많은 부분에서 직접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직접 경험은 단순한 지식의 총합이 아니며 다양한 맥락과 감정이 버무려져 있는 비빔밥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복무를 하지 않은 여성들은 남성들의 군복무에 대한 집착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남성들은 절대로 출산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과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 대화를 통해 평행선이 좁혀져서 언젠가는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짧고 누리고 싶은 일들은 무궁무진하거든요.
덧2. 요새 한가위를 맞이하여 명절 증후군에 대한 논란이 다음 아고라를 비롯한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진행중인 모양인데, 남성들은 제발 여성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일을 하고나서 왈가왈부 이야기를 하기 바랍니다. 저는 제 아내가 어머니에게 밉보이는 것이 싫어서 본가에 가면 일부러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곤 하지만, 그런 일들을 비슷하게라도 해 보았기에 여성들이 시댁에서 명절에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어느 정도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명절증후군 논쟁에 대해서는 무조건 여성들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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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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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집, 식구 수대로 화장실이 없다면 아침마다 화장실 사용으로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특히, 젊은 남자가 먼저 화장실을 이용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나죠. 왜냐구요? 소변이 이리저리 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