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세월호 참사로 안산 단원고에 자원봉사를 나간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들이 상담 기록을 학교에 남겨두는 것에 불응하고 일제히 외부로 갖고 나간 문제로 갑론을박 말이 많습니다.
한국 심리학회 산하 재난심리 위원회를 통해 파견 나간 심리요원들은 처음부터 어떠한 자료일지라도 일체 파견된 학교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쓰라는 교육을 받고 나갔기 때문에 다행히 염려할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정신과 선생님들은 지원 체계가 갖춰지기 전에 단원고로 들어간데다 개업의이거나 개인 자격으로 봉사하신 분도 많아서 일이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원칙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번 사건과 같은 경우는 상담, 진료 기록, 심리검사 자료를 단원고에 보관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단원고 내에 이 모든 자료를 보관, 관리, 통제할 수 있는 시설이나 전문가가 상주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단원고의 경우 이 자료를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치유와 회복을 연결해서 담당할 상시 전문가를 채용했습니다. 그러니 자원봉사를 나간 임상가들은 이들과 협력하여 단원고의 생존자와 유가족 및 관련자에 대한 치유와 회복이 이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고 물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이 논쟁에서는 내담자가 아예 배제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떤 기관이든 상담, 심리검사, 진료 기록 등은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의무기록이고 반드시 내담자의 동의 하에 공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번 경우에도 단원고의 내담자 중에는 자신을 상담하던 정신과 선생님을 따라 외부에서 진료를 계속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처음부터 고려되었다면 학교 내에 설립될 치유 센터로 연계될 내담자와 자원봉사를 나온 임상가를 따라 외부로 연계될 내담자를 구분해서 다르게 접근하는 방안이 마련되었겠죠.
결론적으로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로 철저히 보호되어야 할 내담자의 의무기록이 외부로 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학교가 미덥지 못하고 관리 체계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해도 외부로 유출되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자원봉사자는 말 그대로 자원봉사자입니다. 자원봉사자는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은 떠나야 하고 그 때 남게 될 내담자와 환자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합니다. 이번에 자원봉사를 나간 정신과 선생님들은 치료의 중추를 자신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치료의 중추는 어디까지나 내담자/환자입니다. 끝까지 내담자/환자를 책임지려는 자세는 존중하고 존경스럽게 생각하지만 방법이 틀렸습니다.
핵심만 짧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불필요하게 말이 길어졌습니다.
정리하자면
상담 기록 뿐 아니라 심리평가와 관련된 자료 등 모든 의무기록은 원칙 상 내담자/환자가 있는 곳에 보관해야 합니다. 내가 개업한 센터나 클리닉에 찾아온 내담자/환자의 기록이라면 그곳에, 이번 세월호 참사 지원처럼 자원봉사를 나간거라면 해당 학교에 보관하는게 원칙입니다. 내담자/환자의 기록이 제대로 보관되지 않을 것 같으면 대책을 마련해야지 보관 장소를 옮겨서 외부로 유출될 위험을 감수하면 안 됩니다.
덧. 국회의원 등 비관련자가 열람을 요청하면 내담자/환자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 당연히 거부해야 마땅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거부 주체가 학교이지 자원봉사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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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나서 곧바로 이런 저런 단체에서 저마다 정신건강전문가를 투입하겠다고 줄을 대는 북새통 속에서 이전과 달리 한국심리학회도 재난심리위원회를 중심으로 기민하면서도 진중하게 움직였고 2주도 안 되는 시점에 심리요원들을 위한 집체교육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저만 해도 5월 초부터 안산 지역의 학교를 배정받아 심리지원 자원봉사를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파견 형식으로 근무일에 자원봉사를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바람에 따로 개인 시간을 낼 필요도 없이 평소에 근무하듯이 전일 자원봉사를 하는 행운을 누렸기에 기왕 자원봉사를 할거라면 끝까지 제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집체교육을 받을 때도 분위기를 타고 끓어올랐다가 양은 냄비처럼 식어버리지 말고 학회가 중심을 잡고 최소한 올해는(개인적인 기대로는 내년까지) 지속적으로 자원봉사를 했으면 했고 당시 재난심리 위원회의 운영진들이 모두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셨기 때문에 이번 자원봉사만큼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두 달이 지난 지금 제가 초반에 가졌던 의구심은 그대로 적중하여 혹시나 했던 마음은 역시나로 끝이 났습니다. 재난심리 위원장 명의로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에게 6월 30일자로 발송된 공문의 내용인즉슨 7월 각급 학교의 방학에 맞추어 자원봉사를 종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7월 중으로 지속적인 상담이 필요한 학생은 정신건강증진센터 및 WEE센터로 연계하고 상담을 종료하는 학생들은 간단한 신상과 상담진행상황을 학교에 있는 상담 담당 교사에게 전달하고 끝내라는 거지요.
제가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가장 많이 전해들은 이야기는 자원봉사를 나오는 건 정말 고맙지만 하려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중간에 어설프게 빠져나가면 현장에서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상담전문교사나 WEE클래스 담당 교사가 잔여 업무를 모두 뒤집어 쓸 수 있어 결국은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우려섞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모두 사실이 되었습니다. 초반에 투입된 전문가들이 주력한 일은 정서행동특성검사를 전학년에게 실시하고 2차 선별평가까지 진행하여 위험군(또는 우선관리군과 일반관리군까지)으로 분류된 청소년들에게 상담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대적인 선별 작업이 진행되었고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청소년들이 선별되어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 경우 그런 선별 평가가 어느 정도 완료되어 지속상담을 시작한 것이 6월 3주차부터입니다. 그래놓고는 갑자기 상담을 중단하랍니다. 라포가 형성되었건 말건 학회 차원에서 손을 뗄테니 마무리하고 그만 나가랍니다. 그리고 자원봉사 활동의 댓가로 활동비를 줄테니 신분증과 통장사본, 전문가 자격번호를 알려 달랍니다. 누가 활동비 따위를 받겠답니까?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몰려든 수 백명의 전문가 중 어느 누가 활동비 따위를 신경쓰겠습니까(학회에서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얄궂게도 종료 공문에 활동비를 주겠다는 내용이 함께 적혀 있으니 기분이 더 상하네요).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지만 이미 결정난 사항이랍니다. 단호한 답장이 그것도 너무나 빨리 왔기에 더 반박할 의지를 잃었습니다.
한국 심리학회 산하 재난심리 위원회 명의로 종료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저도 더 이상 회사의 근무일에 자원봉사를 나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명령을 내지만 않아도 자원봉사를 할 수 있으니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자원봉사를 계속 하고 싶으면 개인 자격으로 하랍니다.
7월에 대부분의 학교들이 기말고사와 연이은 방학으로 상담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이 방학에도 개인상담을 받으러 나오겠노라고 이야기를 하는데다 학교마다 방학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해서 돕겠다고 하는데 정작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그것도 언론의 추이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기관이 다 빠져나가도 끝까지 남아서 돕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한국 심리학회가 발빠른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수많은 전문가가 매일 안산의 수많은 중, 고등학교에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제 그만 하랍니다.
어떤 이유로 자원봉사를 종료하게 되었는지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고, 이와 관련하여 150명이 넘는 자원봉사 전문가의 의견을 단 한번도 수렴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실망스럽습니다.
이번만은 다르겠지, 이번만은 다를거야.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습니다. 학회는 역시나 였습니다. 과거에도 역시나였고, 현재도 역시나이며 앞으로도 역시나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는 기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덧. 학회의 잘못된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제 자원봉사 활동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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