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삶의 모토 중 하나는 '최대한 남들과 다르게 살아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대한 모난 돌이 되어라' 정도로 바꿀 수 있겠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튀지마라", "중간만 해라", "남들하는대로만 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것과는 상반됩니다.
남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야 했던 건 우리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던 시대에나 효과적인 적응 전략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튀면 가장 먼저 맹수의 습격을 받거나 무리에서 배제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았으니까요. 그러한 무리짓기 본능이 DNA로 각인되어 진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현대인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분쟁 사회가 아니라면요.
더 이상 안전 지향을 목표로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들과 비슷하게 살수록 더 위험해집니다. 배에 구멍이 뚫렸을 때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몰려 가면 하중이 쏠려 배가 더 빨리 침몰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남들이 이게 새로운 투자처라고 우 몰려갈 때 절대로 그리로 가면 안 됩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 때 집단 지성을 신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인공 지능의 시대, Know-where의 시대입니다. 사실 그 당시는 집단 지성이 아니라 집단 체력의 시대, 집단 압력의 시대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남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섞여 살면 안 되는 이유는 많습니다. 무엇보다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걔중 앞서 가는 누군가(현명한지는 아무도 모르는)의 판단과 시야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합니다. 어찌 보면 집단주의의 대표적 나라인 일본과 우리나라는 한 줌도 안 되는 위정자의 판단에 그동안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도박을 해 왔죠.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요?
또한 남들과 비슷하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비교 기준이 내 옆에 서 있는, 내 시야가 미치는 곳에 있는 사람에 국한되어 하향 평준화 됩니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냐가 어느 지역 아파트에 살고 있냐로, 어떤 급의 자동차를 타고 있냐로,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로 바뀌었을 뿐 다른 삶의 기준을 고려하지 못하게 됩니다. 직급이 어느 수준이냐로 따진다는 건 조직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지는 물거품 같은 것인데도 이후를 고려하지 못하고 충성에 목을 매게 됩니다. 멀리 보지 못하는거지요.
그럼 불확실성의 시대에 남들과 최대한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어떻게 될까요?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각자 도생의 시대가 도래하면 어차피 남들과 비슷하게 가는 전략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워집니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삶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보다 남들과 다르게 살면 블루 오션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레드 오션은 정보력, 자금을 가진 소수에게만 유리하지만 블루 오션은 아닙니다. 틈새 시장을 선점하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죠. 제가 이 블로그를 만든 게 2004년 7월입니다. 그냥 제가 알고 있는 심리학 지식, 제가 공부했던 자료를 올려서 다른 사람과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만들었죠. 그 당시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니 노하우인데 그걸 왜 공유하냐, 왜 남 좋은 일을 시키는거냐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 블로그 때문에 책도 썼고, 강의도 많이 하고 있고 매일매일 새로운 기회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 때 남들처럼 나만 알고 있거나 유료 폐쇄 사이트를 만들었거나 했으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겁니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의 또 다른 장점은 비교 대상이 없으니 실패해도 창피하지 않습니다. 비교 대상이 차라면 남들보다 작은 경차를 타는 것이 창피할 수 있으나 차를 원하지 않아 차 없이 사는 삶은 비교 대상 자체가 없으니까요. 자신의 차보다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치 않는 차 대신 다른 것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죠.
이 글의 제목이 '최대한' 남들과 다르게 살라는 것인데 그럼 청개구리처럼 무조건 남들과 반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양육과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남들처럼 살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남들처럼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일부러 남들과 반대로 살도록 노력하는게 좋습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터널 속을 달릴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터널을 빠져나오면 갑자기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려면 가속이 줄어들고 관성이 깨질 때까지는 일부러 다른 사람과 달리 살아야 합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자 애쓴 결과로 제 삶이 어떻게 되었냐 하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고, 집을 사지 않기로 했고(기회가 되면 아예 제 집을 지을 생각이지만),
차도 안 사고, TV도 안 사고, 반려동물로 고양이를 입양했고,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비건 채식인이 되었고, 네
세 곳의 정기후원을 하고 있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이건 노력 중입니다만). 그리고 여전히 남들과 다른 삶은 진행 중이죠. 무엇보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고 제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사는 인생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남들과 똑같은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남들과 똑같다면 재미 없잖아요. 제가 누군가의 아바타나 클론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다른 것도 아닌데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참 좋더라고요. 행복하고요. 초반의 거리낌만 극복하고 나면 마음의 평안도 찾을 수 있습니다. 참 편해요.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기대보다 훨씬 더 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남들과 다른 삶,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한번 살아보는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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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학습 장애로 인해 낙제를 거듭하여 대학을 두 번이나 옮겼고 천신만고 끝에 박사 학위를 받고 촉망받는 심리학자로 탄탄대로를 막 걸어가려던 무렵 33세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 사고로 척수 손상을 입어 전신 마비가 된 사람, 그 이후 이혼과 지독한 우울증, 자녀들의 방황, 아내, 누나, 부모님의 죽음을 차례로 경험한데다 둘째 딸이 낳은 유일한 손자가 자폐증 판정을 받은 사람, 그가 바로 이 책을 쓴 대니얼 고틀립 박사입니다.
이 책은 그가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쓴 책으로 자신의 투병 생활에서 느낀 점과 임상가로서 현장에서 경험한 인생의 지혜들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은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만이 말 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들로 가득한데 결코 투쟁기나 성공담이 아닌 그야말로 내려놓기를 몸소 실천한 한 임상가의 솔직한, 그러면서도 친절하고 따뜻한 자기 고백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실패와 좌절을 겪어본 사람의 자기 고백이기에 그만큼 더 절실하고 마음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수용(acceptance)'과 '내려놓기'를 그야말로 몸으로 체득한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그런 소중한 지식을 너무나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좋다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사랑, 후회, 연민, 죽음, 불안, 평가, 분노, 연민, 마음, 경청, 평화, 적응, 미래, 인생, 외로움, 영혼, 상처, 사색, 치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과 유머가 마음을 울리는 책, '마음에게 말걸기'
모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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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이발소로
한국이용사회중앙회가 보건복지부에 미장원(미용실)에서 남자의 머리를 깎지 못하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복지부가 이에 대해 (남자)의 이발은 이발소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이용사회중앙회와 미용사회중앙회에 전달했다는 기사입니다.
변화의 물결을 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물결에 맞서 싸우려는 모습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한편으로는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으니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불 보듯 뻔한 변화의 흐름을 보고도 그동안 적응하려는 노력은 왜 게을리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들의 주장은 컴퓨터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워드 프로세싱은 타자기에 맡기고 컴퓨터는 기존의 기능(그렇다면, 수치 계산만 해야 하나요? -_-;;;)에만 충실하도록 해 달라는 요구같이 들리는군요.
게다가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수많은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겠다는 건가요?
마음으로는 안타깝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가차없이 도태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하고 정보를 나누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런 노력 없이 주저 앉아서 떼를 쓴다고 들어주는 사회가 이미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으면 합니다.
덧말. 저는 퇴폐 이발소를 제외하고는 이발소가 모두 없어졌던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전국에 2만여 개나 있군요.
- 온라인 문법/맞춤법 점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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