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사들을 위한 맞춤형 글입니다.
대형 병원에서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받으면서 상담이라고는 수련 요구 조건을 충족할 정도의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만 접했는데 전문가가 되자마자 덜렁 중독 상담이라는 하드코어 영역으로 떨어져 맨 땅에 헤딩하면서 상담을 몸으로 익힌 제가 상담, 심리치료를 익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같잖게 보일 수 있지만 병원 장면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가들은 사실 상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대한 본격적인 supervision이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매우 부족하기에 제 경험이라도 도움이 되실까 하여 정리해 봅니다.
상담/심리치료를 익히는 기본적인 방법과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본인이 상담 내지는 개인 분석을 받는다. 이건 상담 전공을 하신 임상가들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데 정작 임상 전공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본인이 상담을 받을 정도로 힘든 상태가 아니라면 경험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 경우는 게슈탈트 집단상담을 30시간 받았지만 개인 상담이나 교육 분석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집단 상담의 경험이 좋지 않아서(당시에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수련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상담자가 반드시 상담을 받을 필요는 없겠다는 선입견만 잔뜩 생긴 것이 아닌가 후회합니다.
2)
supervisor의 지도 하에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내담자를 상담한다. 이것 역시 상담 전공자라면 당연한 수련 과정이겠지만 임상 영역에 계신 분들에게는 언감생심입니다. 왜냐하면 임상의 supervisor들도 대부분 임상 전공자라서 본인이 상담 supervision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무엇보다 상담을 하지도 않기 때문에 상담 supervision을 할 능력이 안 됩니다. 저도 제 supervisor가 상담 supervision을 해 줄 능력이 안 되기에 외부 상담 기관의 supervisor를 찾아가 supervision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실력이 출중하신 분이었지만 제가 상담한 케이스의 수 자체가 너무 적어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죠.
3)
관심 분야를 찾아서 좀 더 특수하고 전문적인 치료 기법이나 상담 접근법의 자격을 취득하거나 학회, 연구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EMDR, ACT, MBSR, MBCT, 사이코드라마 등이 있는데 전문성을 배가하고 자신의 상담/심리치료 내공을 올리는 좋은 방법이죠. 저는 단체나 조직, 집단으로 뭘 하는 것 자체를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정신병리연구회에 회비를 냄으로써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관심과 여력이 있는 분들은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시면 좋습니다.
문제는 임상 영역에서 일하는 분들에게는 이러한 순서와 방식으로 상담/심리치료를 익히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죠. 환경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결국 저처럼 self-help training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했냐 하면,
우선 상담을 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을 읽었습니다. 임상 전공은 상담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도 없기 때문에 춤으로 말하자면 소위 기본 스텝을 익히는 책을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이 때 대학원 등에서 주로 보는 상담 이론서, 치료 이론서를 읽으면 안 됩니다. 그건 나중에 상담을 실제로 하면서 추가로 읽어도 됩니다. 지금은 춤의 원리와 이론을 익힐 때가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책은 클라라 힐과 캐런 오브라이언이 공저한
'상담의 기술(Helping Skills)', 스캇 마이어와 수잔 데이비스가 공저한
'상담의 디딤돌(The Elements of Counseling)', 김환, 이장호 선생님이 함께 쓰신
'상담면접의 기초(Introduction to Psychological Interview)'입니다. 이 3권의 책만 읽어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반대로 이 3권의 책만큼은 꼭 읽으셔야 합니다. 이 정도도 안 읽고 상담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약간은 무식하게도 무조건 상담을 시작해야 합니다. 기본 스텝을 아무리 연습해도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아보지 않으면 춤을 익힐 수 없듯이 어설프고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어도 내담자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담자에게 못할 짓 하는게 아니냐고 비판하실 수 있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경우는 supervisor의 도움을 받을 수 없지만 상담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입니다. 당연히 내담자의 치유가 최우선이죠. 하지만 임상도 그렇고 상담도 그렇고 수련 과정의 특성 상 내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상태란 건 노선이 바뀌어 더 이상 오지 않는 버스와 같은 겁니다. 어찌 되었든 상담을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내담자부터 상담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임상 전공자라면 이 때 내담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익숙한 심리평가를 활용할 수도 있겠죠.
상담을 하다보면 당연히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중요한 건 실수에서 배우는 겁니다. 모든 상담을 철저히 복기하고, 놓친 부분을 챙기고,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좌절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밀려드는 내담자를 기계적으로 만나는 것만큼 내담자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안무가는 없으니까 좌절할 시간에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하세요.
예약한 상담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뛰고, 내담자와 눈을 맞추는 것이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상담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되면 이제 중요한 건 깊이를 추구하는 겁니다. 춤으로 따지자면 익히기 쉬운 스윙으로 시작했지만 탭 댄스로 갈 것인지, 탱고로 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상담에서도 generalist 역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담자의 문제에 좀 더 전문적으로, 좀 더 깊이, 좀 더 세심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전문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로 상담하는 내담자의 유형이 대상 관계 이론의 틀로 접근할 때 잘 보인다면, 그리고 그러한 틀이 본인에게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면 본격적으로 대상관계이론과 그에 따른 기술을 공부하는 겁니다. 앞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연구회나 모임에서 활동할 수도 있겠죠.
제가 드린 설명이 임상 전공이면서 상담 영역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하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선험자 입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조언이니 가끔은 유용한 조언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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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의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저는 개인적으로 심리평가를 통해 성격 장애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될 수 있으면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바입니다.
심리평가로 성격 장애를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임상가는 병원 장면, 그것도 대학병원급의 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을 하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무조건 진단을 내리는 것이 상례이고 진단을 내리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그래서 false positive error가 상당히 높은 편이죠. 저도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는 몰랐는데 supervision을 하면서 학생생활상담소, local NP, 종합병원 급의 정신건강의학과, 개업 상담 센터, 국가 기관 등 다양한 임상/상담 현장에서 일하거나 수련받는 분들의 사례를 반복해서 접하다 보니 대형 병원에서 얼마나 과잉 진단을 많이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일부 대형 병원에서는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DSM의 Axis I 진단이 이미 내려진 환자에게도 반드시 성격 장애 진단을 내리거나 성격 문제를 찾아내도록 교육시킵니다. BIG 5 병원 중 하나입니다. 반성하세요.
성격 문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폭넓게 피검자를 살펴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마는 그걸 이론적 근거도 없이 무조건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심리평가에 포함된 심리검사 도구의 본질적인 제한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격 장애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성격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그렇기 때문에 기질이나 특성까지 염두에 두고 종단적으로 살펴봅니다. 그런데 이를 진단하는 심리검사 도구는 대부분 횡단적인 도구입니다. Full Battery에 포함된 검사 도구 중 성격 문제를 잡아내는 종단적인 검사 도구는 사실 상 없습니다. 그나마 TAT가 가능성이 가장 큰 도구이지만 정작 Full Battery에는 빠져 있기 때문에 결국 남는 후보는 로샤 밖에 없습니다.
자 여기에서 질문입니다. 로샤 검사가 정말 성격 문제를 명징하게 드러냅니까? 로샤 검사로 찾아낸 것이 정말 성격 문제 맞습니까? A, B, C군의 성격 장애를 로샤로 정확하게 변별할 수 있나요?
성격 장애는 충분한 상담을 통해 발달력을 포함한 개인력을 포괄적으로,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살펴봐야지만, 그것도 어림짐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성격이라는 것은 다면적인데다 DSM의 Axis I에 속한 장애와도 관련성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칼로 무우 자르듯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왜 DSM-5에서 DSM-IV의 성격 장애가 4개나 빠지는지(40%의 탈락율)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심리평가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으니 의사들의 약물 치료에만 의존하면서 그렇게 무책임하게 진단하지 마세요. 성격 장애가 약물만으로 치료 됩니까? 그런데 왜 자기가 치료하지도 않으면서 정확하지도 않은 진단을 함부로 내립니까? 본인이 성격 장애 진단을 내린 근거를 명확하게 심리검사 sign으로 교차 입증하지 못한다면 심리평가로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심리평가에 사용되는 심리검사도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특히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데 있어 기존의 Full Battery는 무용지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설쓰기의 위험성을 상당 부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취약한 도구들입니다.
잘려나가는 것이 내 살이 아니라고 그런 무딘 칼 함부로 휘두르지 마세요. 우리가 다루는 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부끄러운 줄을 좀 아세요.
심리평가만으로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기존의 Full Battery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덧. 정신병리연구회 사례회의에 참석했을 때 병원에서 수련받는 임상심리 레지던트들과 수련 감독자가 이구동성으로 피검자가 histrionic 하다느니, narcissistic 하다느니 하는 걸 듣고 기가 차서 하는 포스팅입니다(DSM-5에서는 histrionic PD가 빠지죠. 훗). 정작 어이없는 것은 그 사례는 Full Battery 검사도 안 했다는 거. 치료도 안 하면서 소설 그만 쓰세요. 병원에서 성격 장애로 함부로 진단내리면 정작 심리치료를 담당하는 상담센터 등의 현장 임상가들이 뒷수습하느라고 얼마나 힘든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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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회는 세부 워크샵 일정표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등록하라는 것(이미
2008년에 제가 한바탕 비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동안 전혀 개선되지 않았네요)에 이미 빈정상했고 중독심리학회는 학술대회 내용이 별로라서 어떻게 할까 고민 중에 정신병리연구회 하계학술대회에서 DSM-5 워크샵을 한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여 하루 휴가를 내어 다녀왔습니다. 이것으로 올해 임상심리전문가 연수 시간은 다 채웠삼~
원래는 DSM-5 워크샵만 들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시간이 1시간 30분 모자라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전에 하는 치료 사례 회의까지 신청해서 들었습니다.
장소가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강당이었는데 본관, 별관과 떨어진 별도의 건물이라서 그런지 조용한 게 마음에 들더군요. 워크샵이 열렸던 대형 강의실에 에어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내내 더웠던 것은 빼고요. 하루종일 부채질하느라고 지쳤습니다. ㅠ.ㅠ
우선 치료 사례 회의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4개의 강의실에서 각각 연속으로 2개의 사례를 진행했는데 책상을 원형으로 배치한데다 토론자가 일방적으로 comment하지 않고 청중을 사례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시도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이 효과가 있으려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도 충족되지 못해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히 망했습니다. 연수 평점 시간이 아니라면 저만해도 그런 치료 사례 회의에는 참석 안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참석자가 온통 사례 발표를 앞둔 수련 레지던트 선생님들뿐이고 전문가는 가뭄에 콩나듯이 하더군요. 이래 가지고 무슨 발표자에게 도움이 되는 노하우와 comment가 나오겠습니까. 둘째. 여전히 심리치료와 상담을 하지 않는,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을 토론자로 배치했더군요. 인력 pool이 부족한 건 알지만 그럴바에는 토론자의 수를 줄이고 대형 강의실에서 하더라도 질을 높이는 편이 낫습니다. 발표자와 수준 차이가 거의 없는 토론자는 이제 그만 좀 보고 싶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사례 발표는 그나마 이상한 치료 기법들을 적용하지는 않았더군요. 오히려 현장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사례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 때문에 발표자나 참석자나 참 지루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전문가랍시고 참석한 김에 이런저런 생각나는 점을 좀 많이 말했더니 나중에 혼자서 다 떠들더라, 아예 강의를 하더라는 뒷담화가 들려오던데 매우 불쾌합니다. 오죽 엉망이었으면 저같이 낯가림 심한 사람이 나서서 떠들어야 했는지에 대한 치열한 반성부터 해야 할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심리치료와 상담 수련을 간과하면 나중에 심리평가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상담심리전문가들이 병원 장면에 진출한 뒤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경고를 해도 귓등으로나 듣고 정신들을 못 차리니 원... 쯧쯧쯧...
오후에는 DSM-5에 대한 워크샵이 있었는데 3시간 30분으로 예정된 시간 내에 8명의 전문가가 20분씩 intensive하게 강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예정보다 30분이 더 걸렸지만 8개의 강의 모두 매우 훌륭했습니다. 특히 성격 장애 발표를 담당한 박준영 선생님의 강의는 아주 발군이었습니다. 부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핵심을 정확하게 짚더군요. 매우 좋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잘 하셨고요. 확실히 junior 전문가들이 대거 투입되니 에너지도 넘쳐서 전반적으로 워크샵에 기합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덕분에 DSM-5에 대한 기대가 듬뿍 생겼습니다. 자료집과 발표 자료의 슬라이드가 차이 나는 강의가 몇 개 있지만 워낙 꼼꼼하게 DSM-IV와의 차이를 잘 정리해 주셔서 자료집만 꼼꼼히 뒤져봐도 DSM-5의 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신병리연구회에서 이번 워크샵 자료를 온라인으로 공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직 최종 결과가 아니라서 내년 APA 학회가 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DSM-5를 공부하느라고 2013년이 정신없이 그러면서도 즐겁게 지나갈 것 같습니다.
아직 90% 정도만 결정된 상태라서 최종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럽게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의 분류와 진단 기준이 임상 현장의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바뀌었고 과잉 진단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진단에 필요한 기간을 대폭 늘리는 등의 깨알같은 노력도 꼼꼼히 기울였더군요. 각 장애의 severity를 평가하도록 한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아마 병원에서 평가만 담당하는 임상가들은 full battery에 의존해 평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DSM-5에 맞춰 진단하기 위한 새로운 평가 방법의 개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심리치료나 상담을 주로 하는 임상가들은 초기 적응기만 잘 넘기면 DSM-IV에 비해 업무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워낙 현장의 실태를 정확하게 반영해서 적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거든요.
dementia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점, MR의 진단에 더 이상 지능 지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점, 도박 중독이 충동 조절 장애 중 유일하게 중독 장애로 이동한 점 등도 새로웠습니다.
빨리 DSM-5로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DSM-IV는 빈틈이 너무 많은 진단 편람이기 때문에 상담을 할 때나 supervision을 할 때마다 적잖이 짜증나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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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임상심리학회 산하 정신병리연구회의 회원입니다(커밍아웃?). 수련을 마친 뒤에도 될 수 있으면 정기모임에 참석하려고 노력하는데 하나는 제 자신을 단련하는데 필요한 지적 자극을 받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전문가가 되고 나서도 계속 자리를 지켜 수련받는 임상심리 레지던트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어제는 제가 일하는 분야의 이야기라서 일부러 시간을 뺐습니다.
6시 30분부터 시작이라서 조금 일찍 도착해 등록을 하고(2009년 회비로 3만 원을 냈습니다. ㅠ.ㅠ), 병원 구내에서 라떼 한 잔을 산 뒤 뒷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하 1층에 커다란 카페가 새로 생겼네요. 환자를 위한 시설에는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돈 벌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참 씁쓸합니다.
모임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도록 김밥 등을 제공한 것은 좋았습니다. 저야 일찍 저녁을 먹고 갔지만 병원 일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오는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많을테니까요.
대신 각 병원의 supervisor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은 것은 무책임하게 보였습니다. 과거에는 어느 병원에서 발표를 하건 supervisor들은 항상 자리를 지키고 질문도 많이 해서 모임을 활발히 이끌었는데 어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바쁜 지 모르겠지만 별로 보기 좋지 않았습니다. 초심을 지켰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발표는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성 안드레아 병원의 1년차 레지던트 선생님이 병적 도박의 정의와 원인, 이론, 측정도구에 대해 발표했고 2년차 선생님이 이어서 치료와 사례,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상당히 긴장을 하셨을텐데 침착하게 시간도 잘 조절하면서 하시더군요. 예전에 제가 발표할 때 엄청 떨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내용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임상심리 레지던트를 대상으로 한 발표였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외국 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현장과 다른 점을 짚어주지 못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의심없이 믿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한국의 도박중독 유병률을 9.28%라고 소개(터무니없이 과장된 수치)하면서 reference가 되는 금홍섭(2006)의 연구에서 어떤 평가 도구를 사용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SOGS가 허위 긍정이 매우 높은 도구라서 현장에서는 단독 사용을 꺼리는 데 대표적인 평가 도구라고만 소개를 하고 넘어가더군요. 그리고 도박 중독자의 MMPI profile에 대해 설명하면서 외국 연구자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주로 4번을 위주로 한 profile)했는데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런 부분들은 나중에 다시 포스팅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아쉬운 부분은 성 안드레아 병원에서 운용하고 있는 치료 프로그램의 소개였는데 다양한 치료 기법을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임상심리학자들이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럴꺼라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역시나 도박 중독자를 맡기지 않더군요.
제가 장담하건대 임상 심리학자를 치료에 적극 활용하지 않는 이상 성 안드레아 병원에서 도박중독치료의 질이 높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정신병리연구회에서 도박 중독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한편으로는 고무되면서도 앞으로는 더 이상 이론적인 부분이 아닌 실제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달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월덴지기의 Comment
그래도 MMPI-2와 TCI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계시더군요. 조만간 논문도 나올 것 같던데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05년부터 자료만 줄기차게 모을 뿐 논문 한 편 쓰지 않고 있는 제게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내년에는 저도 좀 논문도 쓰고 그래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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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신병리연구회 정기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모임의 특성 상 정신병리에 대한 발표가 주를 이루는지라 수련을 마친 이후 한동안 발길이 뜸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주제의 발표가 이뤄지는지라 시간을 내서 참석했습니다(솔직히 말하자면 연수 평점을 채우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TCI에 대해 한신대 오현숙 선생님이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오현숙 선생님은 국내 TCI 도입에 견인차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고 항상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습니다. 저는 사실 오현숙 선생님이 표준화한 주의력 측정 도구인 'FAIR'에 실망한 바 있어 선입견이 좀 있습니다만 최소한 발표 태도는 좋았습니다.
강의 서두에 생각보다 TCI에 관심을 갖고 오신 분들이 많아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연구회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하신 듯 했습니다. 강의 준비를 하실 때 참석 인원의 구성과 욕구에 대한 사전 조사(이건 사실 아주 기본적인 것인데도)를 안 하신 것 같더군요. 정신병리연구회는 각 병원 임상심리실 소속의 임상심리레지던트와 supervisor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연히 레지던트들은 의무 참가입니다. 발표 내용에 대한 관심도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거든요. 아마 각 병원 임상심리실에 포함된 인원을 빼면 자발적 참여 인원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너무 좋아라하시니 말씀도 못 드리겠더군요.
이후로 TCI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TCI는 일반 성격검사와 달리 성격(character)과 기질(temperament)을 분리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rough하게 말씀드리면 기질은 변화하지 않으며 성격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고 발달하니까 자신의 기질을 파악, 수용하고 성격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달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글쎄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후 성격 발달의 예측 뿐 아니라 진단적 기능을 강조하시던데 성격 발달의 예측 기능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하시는 듯 보였습니다. 자칫하면 과학자가 점쟁이 소리 듣기 딱 좋은 이야기(실제로 발표 후반부에 점쟁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_-;;;)이고 진단적 기능도 성격 장애에 국한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보기에는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뭐 TCI만 갖고 성격 장애를 진단할 정도의 임상가라면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테지만요.
한국판 TCI는 4가지 version으로 나오는데 유아용(3~6세), 아동용(7~1세), 청소년용(12~18세), 성인용 단축형(TCI-RS)가 그것입니다. 유아용과 아동용은 양육자 보고식이고 청소년용과 성인용은 자기 보고식입니다. 나중에 질의 응답 시간에도 그런 질문이 나왔지만 TCI는 MMPI처럼 타당도 척도가 없어 솔직하게 답하지 않는 경우 걸러낼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TCI를 진단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면 MMPI와 같은 다른 도구와 반드시 병행해야 할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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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질 척도
: 4개의 척도로 나뉘며 뇌의 행동조절시스템의 BAS(behavioral activation system), BIS(behavioral inhibition system), BMS(behavioral maintenance system)에 해당이 됩니다. 주요 신경전달물질의 작용과 방출에서의 차이에 의해 구분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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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ty Seeking(NS), BAS, 도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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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m Avoidance(HA), BIS, 세로토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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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ard Dependence(RD) 및
Persistence, BMS, 노어에피네프린
* 성격 척도
: 3개의 척도로 나뉘며 자기 개념(the Self)을 중심으로 구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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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directedness : 자율적인 자아로서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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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ativeness : 사회의 한 일부로서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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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transcendence : 우주의 일부로서의 자기(진단과 상관없는 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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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질 유형
: NS, HA, RD의 높고 낮음에 따라 8개의 조합이 나타나는데 이것으로 기질 유형을 구분합니다.
- 모험적 : 반사회성 기질(자극추구 강/위험회피 약/사회적민감성 약)
- 열정적 : 연기성 기질(자극추구 강/위험회피 약/사회적민감성 강)
- 예민한 : 수동-공격성 기질(자극추구 강/위험회피 강/사회적민감성 강)
- 폭발적 : 경계선 기질(자극추구 강/위험회피 강/사회적민감성 약)
- 꼼꼼한 : 강박성 기질(자극추구 약/위험회피 강/사회적민감성 약)
- 독립적 : 분열성 기질(자극추구 약/위험회피 약/사회적민감성 약)
- 신뢰로운 : 순환성 기질(자극추구 약/위험회피 약/사회적민감성 강)
- 조심성많은 : 수동의존적 기질(자극추구 약/위험회피 강/사회적민감성 강)
강의가 전반적으로 ‘어’, ‘에’, ‘응’과 같은 의성 감탄사가 많아서 상당히 distractible하고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rehearsal도 하지 않고 오신 건지 파워 포인트 프로그램과 그림판을 사용할 때도 버벅거리시더군요. 그래도 수련 레지던트 이상의 전문가급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인데 너무 무성의하다 싶었습니다. 또한 2시간짜리 강의에 달랑 14장짜리 PPT자료를 가져와서 나머지는 말로 때우시더군요. 제가 알기로 PPT자료는 1장에 2분 분량을 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2시간 강의라면 적게는 45장에서 60장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아무리 말을 주로하는 강의라도 2시간 강의에 14장의 발표 자료는 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충실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TCI의 기본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전 응용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뭔가 어중간한 position으로 진행을 하더군요.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도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정신병리연구회 회원이라서 공짜로 들은 강의지만 회원이 아닌 경우는 2만 원이나 등록비를 내야 하는 유료 강의인데 제가 돈을 내고 이 강의를 들었다면 상당히 짜증이 났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상담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설명하면서 당신은 자기방어성향이 강한 인텔리들의 경우 TCI를 사용하지 않고도 TCI 구조를 갖고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반응 양상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과감하게) 하시던데 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TCI 구조만 머릿속에 넣고 문항에만 익숙하다면(사실 100문항도 안 되니까요) 현장에서는 굳이 TCI를 사용할 필요가 없겠네요? @.@ 대체 심리검사도구에 대한 설명을 하러 오신 분이 그런 말을 하다니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점쟁이 소리를 듣는다는 둥, 자리를 펴라는 말을 듣는다는 둥 우스개로 넘기기에 듣기 불편한 말씀을 계속 하시던데 TCI에 대한 신뢰성까지 확 깎아 먹는 분위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오현숙 선생님 강의는 비추입니다. 강의 하나만 들어도 어떤 스타일의 강사 유형인지 한 눈에 알겠더군요. 좌충우돌, 우왕좌왕이라서 2시간 동안의 강의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됩니다. 앞으로도 강의 기피 대상이 될 것 같습니다.
* 월덴지기의 Comment
진단 기준으로는 동일한 도박 중독자라고 하더라도 사실 상당히 다양한 유형의 도박자가 있습니다. 그걸 Action Gambler, Escape Gambler로 크게 구분하기도 하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거든요. TCI를 통해 도박 중독자의 기질과 성격을 구분해 본다면 상당히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기질 차원인 자극추구, 위험회피 요인만 보더라도 도박 중독자를 기질 면에서 상당히 신뢰롭게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게 어제 강의에서 건진, 유일한 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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