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비건이 된다는 건 외식을 포기한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애시당초 별로 기대도 안 하고 살았지만 그래도 요즘엔 비건들이 방문할 수 있는 식당도 많이 늘고 있고 대기업에서도 비건들을 타겟으로 한 제품(아직은 라면이나 요거트 등 한정된 제품군이지만)을 속속 내놓고 있습니다.
원래 제 입맛이 서구식이라서 못 먹어서 한이 맺힌 한식은 없지만 그래도 비건에게 가장 아쉬운 건 국물 요리죠. 우리나라에서 국물 요리라는 건 베이스가 고기 육수이고 최소한 멸치 육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단골이 되지 않은 이상 맹물 베이스로 국물 요리를 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국물 요리, 그것도 채식 해장국을 먹을 수 있는 비건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가 봤습니다.
롯데마트 잠실점 6층 푸드코트에 있는 'Zero Vegan'입니다. Zero Waste와 비건을 접목한 상호라고 하네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식사 전이라 비교적 한산했지만 금방 손님들로 꽉 차더군요. 다른 가게에 비해 손님이 훨씬 많은 인기 식당이었습니다. 실제로 재료가 소진되어 못 먹고 돌아가는 손님도 봤습니다.
대표 메뉴는 해장국이고 여럿이 먹을 수 있는 감자탕과 사이드 메뉴로 느타리 두루치기 같은 음식도 있습니다. 주문은 입구에 있는 키오스크로 하면 됩니다. 저는 칼칼 채소 해장국과 토마토 해장국, 그리고 느타리 두루치기를 주문했습니다.
매장은 평범하지만 오픈 주방이라서 신뢰가 갑니다. 제로 웨이스트를 표방하는 매장답게 일회용품이 거의 없습니다. 키친 타월을 소량 사용하는 정도라고 하네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셀프 서비스인 반찬을 담아왔는데요. 당연히 비건이 먹을 수 있는 반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맛이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담백합니다. 특히 깍두기는 액젓을 쓰지 않아 전혀 시큼하지 않고 상큼한 맛입니다. 해장국에는 역시 깍두기죠.
음식이 나왔습니다. 밥이 흑미 잡곡밥인 것도 마음에 듭니다. 저는 주로 현미 잡곡밥을 먹기 때문에 가끔 외식할 때마다 백미밥을 먹으면 이제는 속이 느글거리거든요. 과장 조금 섞어서 혈당이 치솟는 느낌 아닌 느낌도 들고요.
토마토 해장국입니다. 토마토를 통째로 썰어 넣었는데 토마토 스프 같은 맛이 아닐까 싶었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토마토의 달달한 풍미가 얹혀진 김치찌개 느낌입니다. 매콤새콤한 맛을 선호하는 분이 좋아할 맛입니다.
칼칼 채수 해장국입니다. 육수 베이스로 끓인 느끼한 해장국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전혀 어필하지 못하겠지만 비건에게는 감지덕지한 맛입니다. 고기 해장국과 똑같다고는 말씀 못 드립니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그게 어떤 맛인지 어렴풋이 기억하는 저도 맛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고기의 느끼한 맛이 나지 않는 담백하고 칼칼한 해장국이라 저는 아주 좋았습니다. 정말 맛있다 수준은 아니지만 집이 가깝고 해장국이 생각나는 날이면 찾아와서 먹을 정도의 퀄리티는 됩니다.
마지막으로 느타리 두루치기입니다. 오늘 주문한 음식 중 간이 가장 센 요리였는데 살짝 불맛이 느껴지는 게 논 비건 음식점에서 먹는 것과 가장 비슷했습니다. 맵단 맛이고 식감은 당연히 느타리 버섯이니 살짝 고기 같은 느낌이죠. 밥반찬으로 딱이었습니다. 해장국 가격과 비슷하니 가격이 살짝 비싼 듯 했지만 이해할 정도의 수준입니다.
다른 사이드 메뉴로 새송이 강정(소:7,000원)과 표고 유부 잡채(5,500원)도 있다고 하는데 다음에 와서 먹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냉면도 있었는데 말이죠. 냉면(특히 물냉면)도 비건들이 못 먹는 대표 음식이잖아요. 못 먹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영업시간은 월~일 10:30~21:00이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가 브레이크 타임입니다.
유일한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은 무료 주차가 되지 않는다는 거. 푸드코트 입점 매장은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과일장을 롯데마트에서 봤기 때문에 상관 없었지만 차를 가져가실 분은 참고하세요.
제로 비건 바로 옆에 위치한 The Caffe에서는 비건을 위한 음료도 팝니다. 아마도 제로 비건을 방문하는 비건들을 공략하려고 메뉴를 추가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식사하고 음료를 여기서 주문하면 딱입니다.
메뉴가 꽤 많지만 저는 흔히 먹어볼 수 없는 흑당버블두유라떼와 딸기소이라떼를 주문했습니다. 가격도 착하네요.
음료까지 먹을 수 있을 건 기대하지 않아서 텀블러를 차에 두고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회용 컵에 담았네요. 다음에는 잊지 말고 텀블러를 가져와야겠어요.
딸기소이라떼와 흑당버블두유라떼 둘 다 여러분이 아는 바로 그 맛입니다. 저녁도 배불리 먹은데다 라떼 양도 많아서 오랜만에 위가 무리를 했네요.
강남에 사는 비건이라면 해장국 생각날 때 방문하기 좋은 집입니다. 비건 음료까지 후식으로 마시면 완벽한 한끼 식사가 될 것 같네요.
덧. 곧 새로운 곳으로 이전한다고 하네요. 7월 11일까지만 운영한다고 하니 헛걸음하지 않도록 날짜를 잘 보고 가셔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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