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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월덴3를 자주 방문하는 분들이라면 학회와 교수에 대한 제 적개심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계실 겁니다. 여러 차례 다른 글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학회와 교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신건강분야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임상심리전문가를 양성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교육 과정의 체계가 하나도 없어 막상 전문가가 되어서도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학회가 정신을 못 차리고 이에 대한 대비를 전혀 못하고 있고 교수라는 사람들은 기득권에 취한 나머지 이러한 학회의 무능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기 위한 교육 과정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당연히 그보다 더 중요한 임상가의 윤리에 대해서는 두 말 할 것도 없겠죠. 임상심리전문가만 해도 자격을 취득한 뒤에 의무적으로 듣게 되어 있는 윤리 교육 달랑 한 번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요새는 분위기가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지만 제 기준으로는 아직 멀었습니다)입니다. 현장에서 부닥칠 수 있는 수많은 윤리 문제들은? "그건 니가 알아서 해" 수준입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개인적인 문제이니 "니가 알아서 책임지고" 물의를 일으킨 수준이 심하면 학회에서 제명하고 땡입니다.
현장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윤리적 문제(내담자와의 사적 관계, 개인 정보 보호의 한계, 비용 문제, 종교적인 문제와 가치관 등)와 만나면서 윤리 문제야말로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가들이 그야말로 정신 바짝 차리고 박터지게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막상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 전무합니다. 국내 서적은 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실정에 딱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작년 9월에 소개한
'상담 및 심리치료 윤리(Issues and Ethics in The Helping Professionals, 2007)'이 있어서 다행인 수준이죠.
서론이 길었는데 그렇다면 2010년 5월에 나온 이 책은 어떨까요?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별 한개도 아까운 책입니다. 장점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풀어서 쓰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1. 2010년에 번역이 되었지만 원서는 1994년에 출판된 것이라서 무려 16년이나 된 책입니다. 당연히 그동안 변화해 온 윤리 규정의 흐름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용의 적절성은 둘째치고 아주 구태의연합니다. 이것만 익혀서는 어림도 없는 수준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위에 링크한 Corey의 '상담 및 심리치료 윤리'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중독전문가의 윤리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내용이 온통 알코올과 약물의존 분야에만 치우쳐져 있습니다.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섹스 중독 등 행위 중독에 대한 부분은 전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용어 자체가 거의 안 나옵니다. 이 책의 원 저자인 두 사람 모두 알코올 및 약물의존 분야 전문가이니 당연할 수 밖에 없겠지요. 이 분들의 약력을 보면 행위 중독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습니다.
3. 우리나라와 미국의 현실 차이가 너무 크다는 사실에 대해 번역자의 각주 하나 안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예전에 중독자였던 사람이 치료자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우 드물죠. 도박 중독 분야만 따지면 제가 알기로 전국에 단 한 명의 상담자만 있을 뿐 입니다. 또한 미국의 경우는 소송이 난무하는 국가이기때문에 임상가가 윤리 규정을 준수하느냐 법적 소송의 가능성을 줄이느냐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료법 상 책임을 의사가 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별로 없죠. 그게 다행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런 문화적 차이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도 안 해놨습니다.
4. 게다가 번역 실력이 뛰어난 신성만 선생님이 역자 중 한 명인데도 이 책은 가장 중요한 번역부터가 엉망입니다. 아무리 공동 번역이라고 해도 대표 역자가 원서와 일일이 번역을 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당연하거늘 그런 작업 자체를 안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번역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중독전문가 협회의 교육 과정을 위해 급조해 번역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5. 이건 학지사의 잘못인데 138페이지에 불과한 소책자에 13,000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을 책정해 놓았습니다. 협회의 중독전문가 자격을 따려는 수강생들은 이 책을 반드시 사야할테니 그걸 이용해 장사하시려는 건가요? 이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가격 책정은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알코올, 약물의존 분야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도박 중독 분야는 우리나라가 외국에 전혀 뒤질 것이 없는 수준입니다. 미국 등은 지금 알코올, 마약과 전쟁을 치르느라고 도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SCI 등재 journal에도 도박 관련 논문은 거의 올라오지 않고요. 당연히 현장에서 일하는 도박 중독 전문가가 거의 없고 수준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약물 중독과 행위 중독을 하나로 묶어서 중독 전문가로 다루는 것 자체를 반대합니다만 통합한다고 해도 윤리 규정부터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게 안 될까요? 무엇보다도 책을 써야 할 수준의 사람들이 더 이상 현장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네 분의 선생님이 일주일에 중독자를 과연 얼마나 만나고 있을까요?
도박 중독 분야는 더 말 할 것도 없고 알코올, 약물의존 분야에서 일할 전문가들에게도 이 책은 꼭 피하라고 권하고 싶은 수준입니다. 읽으면서 시간이 아깝더군요. 차라리 좀 비싸더라도 '상담 및 심리치료 윤리(2007)'를 읽으세요!
덧. 이 책의 뒷면에는 '중독전문가의 윤리에 관해 가장 인정받고 있는 책'이라는 문구가 선명한데 비웃음 밖에 안 나옵니다. 이 정도의 책이 가장 인정받는 책이라면 미국 중독 분야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덧2. 한국중독전문가협회 회장이신 이미형 선생님이 추천사에서 중독전문가 자격증 보급을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고 하셨던데 알코올 약물 상담 분야에서 도박 등의 행위 중독을 포함하려고 협회 명칭을 개정한 것이 제가 알기로 작년인가 재작년입니다. 그 전까지 이 협회에서는 도박 문제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신뢰감을 준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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