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는 것 만큼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한다고 믿었던 그것이 정말 원하는 것이 맞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걸 알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쳐 매진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생각으로? 마음으로? 분석을 통해서?
예를 들어,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하는 청소년이 있다고 해 보죠. 그런데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인지, 공부가 힘들어서 그림으로 도망가고 싶은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좋아서 그림에 매진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까요? 혹은 부모님이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니 파괴적 관심 끌기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더욱 그림 그리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또 어떻고요. 정말 구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심리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심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왜 심리학 공부를 그렇게나 하고 싶을까요? 사람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끌려서? 심리학 분야가 유망하다고 해서? 심리학 지식을 많이 알면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으니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어서 심리학으로 치유하려고? 역시 쉽지 않습니다.
대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진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까지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지 따져 볼 것'
이건 제가 도박 중독과 관련하여
'도박을 그만둘 수 있다면 무엇까지 버릴 수 있는가 : 상담자용'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린 내용의 변형입니다. 위의 글에서 저는 '이 고통스러운 도박 중독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까지 버리실 수 있나요? 혹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통해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지 측정하는 건 쉽지 않지만 그걸 위해서 무엇까지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지,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지를 물어보면 의외로 그 간절함의 정도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예로 돌아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은 청소년이 그 꿈을 위해서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할 때와 그 꿈을 위해서 평생 가난하게 살아도 좋다고 할 때를 비교해 보면 대번에 그 간절함의 정도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꿈을 위해서 평생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감수하겠다거나, 평생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외롭게 살게 되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어떤가요. 그 절절함이 느껴지시죠?
원래 인간은 손해를 싫어합니다. 손해를 피하려는 동기가 가장 강력하죠. 그러니 어디까지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간절함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추구하는 목표, 꿈, 물질, 사람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걸 위해서 어디까지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어렵지 않게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이 방법을 통해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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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2015년 4월 10일의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3가지' 포스팅에 기반하여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의 원인을 추론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저는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3가지로
1. 버리겠다는 협박
2. 상처받은(실패한) 자녀 탓하기
3. 편애의 노출
을 들었습니다. 이 3가지 부모의 실책은 워낙 중요하기도 하고 또 상담 현장에서는 너무나 흔히 만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내담자의 어떤 문제를 봤을 때 이 3가지 원인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할까요?
* 버리겠다는 협박 : Rejection Fear
: 대인 관계 문제를 호소하는 내담자 중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어릴 때의 경험(실제가 되었든, 가상의 위협이 되었든 간에)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과도한 착취를 감수하는 등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받습니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 아이일 때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음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계속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 것이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평등한 대인 관계 상황을 참고 있는 내담자가 있다면 어렸을 때 primary caretaker로부터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 이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건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 상처받은(실패한) 자녀 탓하기 : Basic Trust
: basic trust는 성과나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만으로 수용되고 인정받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할 때 형성되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나름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실패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해 비난을 받게 되면 과정이나 노력이 아닌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고 결과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결과 지상주의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의도야 당연히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그런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실패한 결과에 대해 비난받은 자녀는 자신이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수용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 당사자가 무려 자신을 낳아준 부모이므로 나중에는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됩니다.
* 편애의 노출 : Low Self-esteem
: 자기 혼자 독점하던 사랑을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동생을 돌보도록 강요받는 경험을 하거나 외모, 성적 등 자기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수행을 보이는 형제자매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건 누구에게도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다른 형제자매를 자신보다더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받는 상처는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특히 부모가 편애를 할 때의 이유란 게 대부분 외모, 기질, 성품처럼 개선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뛰어난 성적처럼 따라하기 매우 어려운 것들이 많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에게 큰 상실감과 좌절을 맛보게 합니다. 이런 편애가 지속되면 당사자는 자신이 원체 못났으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자기 비하, 자기 회의적 사고와 무력감에 빠지게 되어 객관적으로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3가지 행동과 상담에서 내담자가 흔히 호소하는 문제를 짝지어서 설명했지만 자세히 보면 rejection fear, basic trust, low self-esteem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존감이 낮은 내담자가 외동이라면 부모가 편애의 노출이 아닌 실패한 자녀 탓하기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반복적인 과도한 책망도 낮은 자존감 형성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부모의 잘못된 행동과 내담자가 보이는 문제가 일 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담자가 어떤 문제를 호소했을 때 이러한 영역들을 점검해 보는 게 필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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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선씨의 용감한 내부 고발이 요새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너무나 당연한 일이 화제가 되는 사회란 게 참 웃픕니다만) 중앙난방식 아파트에서 유량계를 조작해서 저런 식으로 난방비를 절감(이라고 쓰고 삥땅친다고 읽는다)할 수 있다는 꼼수도 놀랍지만 자신들의 행동을 당연시 하는 후안무치가 더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미 이명박 정권 이전부터 그랬던 모양이니 이 정권에 세금 내는 것이 아까워 수동 공격적으로 싸웠던 투사들도 아닌 듯 하고(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닌거죠)....
전에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에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건 동일하나 타인의 행복 추구권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개인주의자에 비해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착취한다는 차이가 있죠.
유량계 조작으로 내지 않은 난방비는 다른 사람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겁니다. 어차피 내가 피해보는 것이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고 가볍게 생각했겠지요.
그런 무임 승차자(free rider)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몫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정글이 되어가는 이 사회가 약육강식의 늪으로 변하는 속도가 빨라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런 악랄한 무임승차는 일벌백계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김부선씨와 같은 내부고발자가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문화가 이 참에 생기기를 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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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자의 가족이 쉽게 걸리는 대표적인 '병'으로는 '의심병'과 '조급증'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도박자에게 자신이 의심병에 걸렸다고 이야기하자'라는 글에서 다룬 바 있죠.
오늘은 가족 중에서도 콕 집어 도박 중독자의 아내에게 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부적절한 죄책감이 강합니다. 남편이 도박에 중독된 주된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과도한 귀인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죠. 이는 '당신이 하도 돈 돈 하면서 바가지를 긁어서', '당신이 내조를 엉망으로 하니'와 같은 도박 중독자의 책임 전가로 인해 더욱 악화됩니다. 특히 도박 중독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쓰는 아내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박 중독은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서 어느 하나의 원인만 갖고 설명할 수가 없죠. 따라서 아내가 이렇게 저렇게 했다고 해서 남편이 도박에 중독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적절한 죄책감과 적절한 죄책감의 차이는
'적절한 죄책감과 부적절한 죄책감'이라는 글에 정리해 두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나치게 희생적입니다. 이건 첫 번째 문제인 부적절한 죄책감과 결합하여 나타날 때 더욱 강력해지는데 남편이 도박에 중독된 원인을 자신이 제공했다고 잘못 원인 귀인을 하게 되니 도박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고 자신의 모든 시간, 역량을 쏟아 붓는 겁니다. 도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는 좋습니다만 문제는 지나치게 희생적인 아내는 노력 자체에만 치중한 나머지 치유의 원칙들을 지키면서 균형을 잡는 걸 잘 못합니다. 예를 들어 도박 중독자가 자신의 행동 결과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대위 변제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러한 대위 변제 절대 금지 원칙과 도박 빚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충돌할 경우 우선 순위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와 달리 반치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죠. 특히 지나치게 희생적인 아내는 도박 중독자와 상호의존(co-dependence)된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 또한 꼭 해결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도박에 중독되기 이전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도박에 중독되어 문제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는지는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정도의 상태에서 보면 더 이상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그래서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한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여가 선용은 사치이고, 대인 관계는 끊겼으며 쇼핑이나 외식과 같은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조차 어려워합니다. 그러니 인생에 즐거운 경험이 언제인지, 과연 있기는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당연히 부적절한 죄책감이 강할수록, 지나치게 희생적일수록 자신을 위한 투자나 위안은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이 세 번째 문제가 심할수록 기분 부전 장애(Dythymic Disorder)나 우울 장애(Depressive Disorder)로 진단될 가능성이 커지며 아내 본인 뿐 아니라 도박 중독자와 다른 가족들의 치유도 요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도박 중독 치유와 관련해서 기둥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아내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은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제가
'지금은 각자의 성을 돌볼 때다'라는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부적절한 죄책감이 강하고, 지나치게 희생적이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내는 개인주의자가 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적어도 이기주의자가 될 정도로 자신의 성에만 온전히 투자해야 겨우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는 수준이죠.
사실 위의 문제들이 있는 아내가 제아무리 이기주의자가 되겠다고 노력해봤자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 마저도 쉽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덧.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에 대해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자신이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분들은
'이기주의자와 개인주의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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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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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자,
도박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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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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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장애,
의심병,
이기주의,
이기주의자,
조급증,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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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이 영화로 김민희씨가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지요. 요즘의 연애 실태를 현실적으로 잘 그리고 있고 코믹한 요소도 적잖이 배치되어 있어 내 이야기가 아닌 이상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꽤 재미있게 봤고요.
개인적인 감상을 좀 말씀드리면,
연애란 건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거라지만 김민희와 이민기가 연기한 두 사람의 연애는 잘 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영화에서는 다시 한번 잘 해보는 걸로 해피엔딩 처리했지만 개인적으로 결국은 다시 헤어질 수 밖에 없을거라 예상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우선, 두 사람은 사내 커플입니다. 그것도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지점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은행원이죠. 예전에
'모든 다중 관계는 해롭다'는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내 커플은 사이가 좋을 때에는 상관없지만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파괴력이 훨씬 더 큽니다. 온갖 구설수때문에도 그렇고 연애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충시켜줄 자기만의 안전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50점을 깔고 들어가는 불리한 연애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 연애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진실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그러면서 상대방을 위해서 그랬다고 둘러대기만 하죠) 뒤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느라 온갖 방법(페이스북 감시, 미행, 전화 확인 등등)을 동원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신뢰가 싹틀 틈이 없습니다. 신뢰를 쌓아둔 것이 없으니 갈등이 생겼을 때 인출한 애정 자금이 없는거지요.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자신에게,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기대를 합니다. 연애란 이럴 것이라고까지 기대하기 때문에 매번 그 기대를 충족하는지 확인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슬퍼합니다. 자신이 만든 기대의 덫에 스스로 걸려서 고통스러워하는거지요.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걸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은 집착과 희생 밖에 없습니다. 그래봤자 고통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 뿐이지만요.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예후를 보여주는 건 동희(이민기 분)의 주사와 두 사람의 통제불능증과 기본 예의 부족입니다. 주량 통제가 잘 안되고 일단 술에 취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제맘대로입니다. 영화에서는 그런 요절복통 야단법석이 재미난 에피소드처럼 그려졌지만 사실 이런 주사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항상 맘졸여야 하지요. 실제로 이 영화에서도 박계장이라는 후배가 남자 주인공 때문에 개고생합니다. 그리고 이 커플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서로에게 쌍욕을 하거나 몸싸움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 역시 연애 동안에는 화끈하고 열정적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기본적인 존중과 매너를 지키지 않는 커플의 미래는 아주 어둡죠.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연애는 결실을 맺기도 어렵고 설사 결실을 맺는다고 해도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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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까지 도박과 도박 중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가족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대처 방법은 사실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헤어지는 것과 참고 사는 것.
주변 사람들도 가족들만큼이나 도박 중독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 상황인데 가족들 입장에서 헤어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차라리 속는 셈 치고 빚을 갚아주거나 도박자의 말을 믿어보는 것이 오히려 해 볼만한 도박일 겁니다.
특히 시댁, 친정 따질 것 없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어른들이 종용하는 경우 많은 배우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박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이 상황을 수용(accept)하는 것과 자신을 희생(sacrifice)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수용한다는 건 도박 중독의 문제가 도박자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일차적인 책임도 도박자에게 있다는 것,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치유의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면서 도박자 역시 그 원칙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희생은 수용과 달리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도박 중독이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그저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 이 창피한 일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박자가 직장에서 잘리는 일이 없도록, 필요하다면 도박자의 공범이 되거나, 변명과 거짓말을 하거나, 빚을 대신 갚는 것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뒤집어 쓸 수 있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죠. 당연히 그 결과로 희생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인 도박 중독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합니다.
수용은 희생이 아닙니다. 수용은 치유의 원칙을 지켜 도박 중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희생은 그저 자신을 던져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수용 없는 희생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오게 됩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잊으세요. 도박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아닌 수용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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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간 관계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두 가지로 '기대'와 '희생'을 꼽는다는 트윗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합니다만 유효성과 가능성은 별개의 것이라는 게 항상 문제죠.
혹자는 희생은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 사이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있냐며 반문합니다. 기대가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면서요.
개인적으로는 굳이 기대를 하지 않더라도 현재에 충실하게만 살면 충분히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번 포스팅에서 다룰 내용은 아니니 통과하고요.
기대를 내려놓기가 정 힘들다면 대상을 바꿔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남에게 기대하지 말고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죠. 남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기대하면 좌절을 맛볼 확률이 매우 높죠. 간혹 기대를 충족한다손 쳐도 일시적인 안도감을 느낄 뿐이지요.
자신에게 기대를 해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남에게 기대하는 것만큼 불확실성이 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믿음에 기반한 기대는 성취를 향한 연료를 제공할 수도 있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성공해 있거나 성공 여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든 꼭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목표 지향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작은 기대를 하는 것도 기대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다면 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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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라디오 방송을 들으니 신혼 부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례사 1위로 5분 이내에 끝내는 간략한 주례사가 뽑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 추세에 발맞춰 저도 5분 이내에 끝내고 주례 잘 모셨다는 인사 한번 들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딱 4가지입니다. 이래놓고 한 말씀 더 한 말씀 더, 이런 짓은 안 하겠습니다. 정말 딱 4가지만 말씀드리죠.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 내용은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도 아니고, 정도 아닙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부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뢰는 어떻게 쌓아야 할까요?
첫 번째 말씀은 바로 신뢰를 쌓는 방법에 대해서입니다.
무조건 상대방 배우자의 편이 되십시오. 부모도 자식도 형제자매도 배우자의 앞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혈육의 인연과 정은 쉽게 끊어지지 않지만 부부가 쌓은 신뢰의 성은 너무나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드시 배우자가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왜 무촌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만큼 가까워서요? 아닙니다. 헤어지면 아무 사이도 아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배우자의 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배우자는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응원군을 원하지 정의의 재판관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말씀 역시 신뢰를 쌓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무조건 배우자의 편이 되라는 말은 총론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 말씀은 각론에 해당합니다. 실천 기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주 쉽습니다.
어설픈 마음 읽기를 하지 말고 무조건 사실을 말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에게 사기를 칠 의도로 행한 적극적인 거짓말만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보를 모두 알리지 않는 소극적인 거짓말도 분명히 거짓말입니다.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으면 그 빈자리를 추론과 마음 읽기로 메워야 하는데 여기에서부터 오해와 왜곡이 발생하게 됩니다. 배우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사실을 숨기는 것도 하지 마세요. 책임은 자신이 지되 배우자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해야 합니다. 배우자에게만큼은 완전히 투명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앞서 두 가지의 말씀은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신뢰를 쌓고 지키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부 사이를 붙여놓는 접착제와 같은 것들이었지요.
그런데 이제부터 드릴 말씀은 부부 사이를 떼어놓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고 생각되어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 들어보면 큰 맥락에서 다른 말은 아닙니다.
바로 독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한다고 하면 싱글의 삶이 끝나고 상대방에게 헌신하는 밀착된 삶이 새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래서는 건강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해야 하고 개인으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희생하지 말고 배우자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희생을 미화하고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댓가가 없는 희생이라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희생은 항상 기대를 낳습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기대라면 괜찮겠지 싶겠지만 사실은 그게 더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가 열심히 내조하면 내 고마움을 알아주겠지 하는 기대가 좌절되었을 경우 더 큰 분노를 생성하게 됩니다. 그러니 희생하지 마시고 기대하지 마시고
배우자가 없었다면 어차피 자신이 했어야 할 일이니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하세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려면 뭐하러 결혼하느냐고 묻는 분이 계셔서 그 차이를 설명하는게 참 쉽지 않지만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도적으로 살면 배우자의 사랑과 존경은 저절로 얻게 된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오히려 고난도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도 독립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보통 결혼을 하게 되면 둘 중 한 사람이 재정 관리를 전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용돈을 받아서 쓰는 사람은 항상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고 전담하는 사람도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인 지출을 극도로 억제하게 되니 욕구 불만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재정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지 않으면 용돈을 받아서 쓰는 사람은 재정 상태에 대한 정보가 지극히 부족하기 때문에 돈을 관리하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결혼을 하더라도 독립 채산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자분들께서 반발하시는데 과연 재정을 관리하면서 본인에게 득 되는 일이 뭐가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화장품이라도 돈 걱정 안 하고 제대로 사신 적이 있던가요? 알뜰살뜰 모아서 집 마련했다고 누가 제대로 알아주던가요?
요점은 니 돈 내 돈 나누자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재정 관리 능력을 극대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을 전제하고 반드시 가계부를 써야 합니다. 가계부를 쓰지 않으면서 미래의 재정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가정의 빚이 얼마인지, 수입이 얼마인지, 지출이 얼마인지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미래 계획을 세운다는게 어디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꼭 가계부를 쓰십시오. 재정 전문가들이 그럽디다. 가계부를 쓰는 것만으로도 생활비가 30% 정도 감소한다고요. 빨리 시작하면 할수록 득이 되는 것이 가계부 쓰기입니다.
신혼 부부를 앞에 두고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지 말라는 둥, 니 돈은 니 돈 내 돈은 내돈으로 살라는 둥 다소 생경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니 그냥 객적은 소리이겠거니 하고 넘기지 마시고 한번쯤 신중하게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5분이 지난 것 같으니 이 정도로 주례사를 끝내려고 합니다. 행복한 결혼,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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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2007)'의 저자인 웨인 다이어가 25년 전에 쓴 베스트셀러(전세계적으로 1,500만 권이나 팔렸답니다)입니다.
이 책도 한글 제목 때문에 호오가 극명하게 갈릴 것 같습니다. 이기주의자와 개인주의자는 많이 다른데도 사람들이 오해를 할테니까요. 사실 이 책은 이기주의자가 아닌 개인주의자에 대한 걸 다루는 책인데 제목만 보면 선입견을 갖기 쉽거든요. 실제로 온라인 서평을 보면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과연 그런지 목차만 살펴볼까요?
제1장. 내 인생은 내가 지휘한다.제2장. 먼저 자신을 사랑한다.제3장.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제4장.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를 뗀다.제5장. 자책도 걱정도 없다.제6장. 미지의 세계를 즐긴다.제7장. 의무에 끌려다니지 않는다.제8장. 정의의 덫을 피한다.제9장. 결코 뒤로 미루지 않는다.제10장.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제11장. 화에 휩쓸리지 않는다.제12장. 행복한 이기주의자
어떠신가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든 착취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이기주의자에 대한 내용이 있어 보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10장을 보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죠.
이 책은 이기주의자로 살라고 충동질하는 책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가장 싫어하는 '희생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고, 찾은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저는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2007)'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최근에야 만났지만 이 책의 내용에 100% 동의합니다. 저는 평소에도 제가 아주 행복하다고 느끼는데(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내용에 반감이 드는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군'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으니까요. 제가 이 책의 내용대로 살아서 행복한 건 아니지만 행복한 상태에서 보니 온통 맞는 말 뿐이더군요.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몇 권 추천드렸습니다만 이 책은 그야말로 '행복하게 살기 종결자'입니다. 다른 사람 눈치(배려가 아닙니다)보고 싶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 한 권 정도는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월덴지기가 강력 추천하는 행복 지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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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너무도 짧은 것이 분명한데 적어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똑똑함의 참된 척도는 하루하루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제대로 즐겁게 사느냐다.* 사랑이란 '좋아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선택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건 안들건 허용할 줄 아는 능력과 의지'다. * 행복하다는 것은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일들을 놓고 한탄하지 않는 것이다. * 자녀에게 인정은 언제든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마땅한 행동을 한 보상으로 주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떻다' 꼬리표들은 모두 다음의 네 가지 노이로제적인 말을 사용한 결과다. "그게 바로 나야", "난 항상 그래왔어", "어쩔 수 없어", "난 원래 그래". 모두 성장과 변화를 방해하며 삶을 색다르고 재미있게, 그리고 현재의 순간순간을 한껏 충실하게 살 수 없도록 가로막는 말이다. * 당신이 '나는 어떻다' 꼬리표를 불러내면서 과거에 매달린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회피'라는 한 마디로 깔끔하게 요약할 수 있다. * 일생을 통해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자책감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섣부른 걱정이 바로 그것이다.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실패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는 단지 특정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됐어야 했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방식으로 행해져야 할 일 따위는 없다고 믿는다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 '의무를 끌어안고 사는 경향'을 심리학자 Albert Ellis는 머스터베이션(musterbation)이라 지칭했다.
* 사실 미룬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않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게 아니라 그냥 하지 않는 것이다.
* 부모가 자녀를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 부모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부모라는 사실이다. 이는 자녀들에게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도록, 그리고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골방만 차지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 어머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대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다.
덧. 살짝 아쉬운 것은 행복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한 실천 지침들이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 아니라는 점인데 이건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자신만의 실천 지침으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목적지에 도달해 놓고 보면 옳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가는 길은 모호한 것과 같지요.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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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부부 상담을 하다보면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마음 한뜻으로 사는 건 참 좋은데 일심동체라는 말을 부부는 항상 붙어다녀야 한다는 말로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십 년을 각기 다른 가족 문화와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사는 것인데 당연히 다른 취향과 기호, 생활 방식을 갖고 있을텐데 무조건 함께 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어디든 함께 가고, 꼭 함께 밥을 먹어야 하고 쉬는 날에 서로 다른 일정을 소화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서로에게 감옥을 만들고 있는 것이죠.
둘이 항상 붙어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고 서로에게 맞지 않는 부분을 느끼게 되면(그럴 수 밖에 없겠죠. 맨날 붙어 있으니) 괜시리 날이 서게 되어 예민하게 반응하는겁니다. 그러다보니 직접적으로 물어봐도 될 일도 마찰을 피하기 위해 '마음 읽기'를 하게 되는데 이게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어 사이가 더욱 벌어지게 되고 상대방을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무리한 에너지를 투입하거나 반대로 상대방과의 차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체념하고 자포자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건강한 부부 관계는 잘못된 일심동체의 신화를 깨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건강한 부부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거리 두기'를 잘 합니다. '교집합'에 해당하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여집합'에 해당하는 일정 부분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활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이죠.
둘 다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면 영화는 함께 보지만 수영은 남편만 좋아하거나 기타 배우는 건 아내만 좋아한다면 상대방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자고 강요하지 말고 자신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마찬가지로 배우자도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혹자는 어떻게 그렇게 부부 생활을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눠서 할 수 있느냐, 한쪽이 적당히 참고 양보하고 희생하면서 맞추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단호히 말씀드리지만 희생은 암묵적인 강요가 수반되어 있고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하게 됩니다. 내가 지난 번에 참고 당신이 하자는 거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걸 당신이 해 줘야지라는 마음이 숨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상대방이 나처럼 희생하지 않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모든 부부 갈등의 근원 중 하나이기도 하죠.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잘못된 일심동체와 희생의 신화를 깨고 적당한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덧. 저는 개인적으로 배우자나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70%, 자신만의 시간 30% 정도의 비율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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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유명한 미치 앨봄의 2003년 작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북 크로싱합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다룬 좋은 책이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소설의 형태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면서도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씌여진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 월덴 3의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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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6월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보고 올린 소개글에
혜란님이 댓글로 저자인 미치 앨봄(Mitch Albom)의 다른 소설을 추천해 주시길래 카트에 담아두었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읽었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1997년에 나온 것이니 무려 6년 만에 나왔네요. 저는 깨달음을 담는 책은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한 권의 역작을 세상에 선보이고 나면 다시 새로운 책을 쓸 때까지의 내공이 축적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맞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어떤 분야이든 대작을 내놓은 뒤 연이어 다른 책을 내놓는 작가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고 경험 상 대부분 제 선입견이 맞더군요.
그래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너무 좋았기에 6년 만에 내놓았다고는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미치 앨봄이 원래 칼럼니스트이고 그 중에서도 문장 실력이 아주 뛰어난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단순히 상상력만 갖고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직면할 때까지는 죽음이 자신에게 절대로 오지 않을 것처럼 외면하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통 불안해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양 극단의 어느 한 지점에 있을 겁니다. 죽어야 하는 상황이면 죽을 수 밖에 없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죽는 것이 아직은 좀 두렵거든요. 지금 죽어도 행복하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아무런 미련 없이 두고 떠나는 것이 가능할 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미치 앨봄은 우리가 세상에 홀로 된 존재가 아니며 어떻게든 다양한 인연으로 얽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 놀이공원 정비 반장인 에디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옮겨져 자신과 관련이 있는(그럴거라 짐작했던 사람도 있고 전혀 몰랐던 사람도 있습니다) 다섯 사람을 만나 이승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인연, 희생, 용서, 사랑, 화해의 장에서 순서대로 말이지요. 이 책에서 천국은 천사가 날아다니면서 나팔을 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미치 앨봄은 우리의 삶에서도 인연, 희생, 용서, 사랑,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죽음에 직면하지 않아도 말이죠.
참 괜찮은 책인데 개인적으로 별 세 개로 평가한 이유는 얇은 책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주인공 에디가 만나는 다섯 사람 각자의 내용만 갖고도 책 한 권씩은 족히 나올 것 같기에 읽으면서도 250페이지에 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용서의 장에서 나온 내용은 그리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용서가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아나?'라는 생각만 들더군요.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미치 앨봄이 워낙 글을 재미나게 쓰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그게 단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조금은 느린 호흡으로 읽으면서 마음을 다독여야 하는 책인데 책장이 술술 넘어가니 천천히 읽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저는 최근에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해서인지 확실히 다르게 읽히는 느낌이었습니다.
불시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살아가면서 나와 연결된 세상을 돌아보고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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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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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세종서적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로 유명해진 미치앨봄의 두번째 소설입니다.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주위만 봐도 의외로 많더군요.
제가 좋아서 베푼 호의에 미안하다고 하면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미안해야 할 일은 분명 아닌데 말이죠.
대체 왜 그러나요? 그냥 습관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하면 그 사람이 원하지도 않으면서 희생을 감수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당사자를 기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겸손함이 지나쳐 자신감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이미지 관리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세요.
그러면 그냥 씩 웃어드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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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릴 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위인전에 등장해 제 어린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고 감동에 물들게 한 위인들의 숨겨진 모습들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고 상처받은 나머지 제 자신과 타협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더 테레사와 같은 분을 존경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한비야씨를 존경한다는 분도 있더군요.
저는 이들이 왜 존경받아야 하는 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던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어려움마저도 즐겁게 감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더 테레사와 한비야씨가 부럽기는 하지만 존경스럽지는 않습니다.
어찌보면 저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존경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 사람의 모든 면을 존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게 제가 존경할 만한 사람 하나 없는 이 참혹한 시대에 적응해 살아가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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