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직장인들은 누구나 나름의 이유로 고군분투 중입니다. 그것이 승진을 위한 전진이든, 마음의 평안을 위한 후퇴이든 간에 말이죠.
EAP 상담을 하다보면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내담자를 꽤 많이 만나게 됩니다. 직장에서는 야근과 주말 근무도 불사하고, 눈도장을 찍느라고 퇴근한 후에도 다시 회식 자리에 나가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요. 웃기지도 않는 상사의 농담에 맞장구도 쳐야하고 일이 돌아가게 하려고 옆 부서의 동기나 후배에게 알랑방귀를 뀌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단순한 정치 논리, 라인 논리로 승진에서 밀리고 엉뚱한 부서로 발령이라도 나면 이놈의 직장은 왜 내 충성심을 알아주지 않는거냐고 분통을 터뜨리게 됩니다.
집에 돌아오면 자상한 남편이 되기 위해 집안일을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상한 아빠는 기본이니 아이들을 돌보고 놀아주고 목욕시키고 재워야 합니다. 휴일에는 가족과 시간도 함께 보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짬짬이 자기 계발을 위해 운동도 하고, 학원도 다녀야 하지요. 그런데도 가사 분담에 적극적이지 않고 여전히 수동적이라는 배우자의 볼멘 소리를 듣거나 조금만 비위를 못 맞추면 쪼르르 엄마 품으로 달려가 버리는 아이들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사실상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인정을 받는 수퍼맨, 수퍼우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체력과 시간에는 한계란 것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조언을 하는 것이 상담자의 역할은 아니지만 EAP 상담에서는 이런 역할 갈등 해결을 위해 내담자와 고민을 함께 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때 자칫하면 포인트를 잘못 잡기 쉬운데 대표적인 것이 회사와 가정 둘 다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만 택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아니면 조절해서 양쪽 모두 적당히 하라는 뻔한 조언을 하는 것이죠.
무엇을 택할 것인가, 어느 정도로 조절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내담자의 몫이고 상담자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내담자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 볼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나는 왜 외부의 인정에 이렇게까지 목을 매고 있는가'
자신의 진가에 대해 스스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아무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EAP 상담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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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평가 불안으로 인한 부적응이 의심되어 심리평가를 받으러 온 아동의 부모를 면담할 때 자신들은 절대로 공부하라고 push하지 않는다며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학원도 굳이 보내려고 하지 않으며 특별히 사교육도 강요하지 않는다면서요.
이들의 MMPI-2 결과도 신뢰로운 걸 보면 실제로 겉으로는 별다른 공부 강요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겉으로는 공부는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필요할 때 말하면 그 때 학원도 보내주겠다, 공부에 취미가 없으면 안 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공부를 못하면 결국은 실패자가 된다든가,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자신들의 학업 기대를 감추면서 공부와 상관없이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허용하지 않는 부모라면 이런 부모가 자녀의 정신건강에는 훨씬 더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이런
double message는 자녀에게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차단시켜 더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부모님은 말로는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지만 속으로는 공부가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러니 공부로 인정받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는 부모님께 사랑받을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죠.
둘째. single message만 주는 부모는 차라리 simple합니다. 부모를 포기하거나 미워하거나 받아들이는 식으로 선택하는데 갈등이 덜하니까요(쉽기만 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double message를 주는 부모는 자녀를 양가 갈등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죄책감을 유발합니다. '부모님이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런 고마운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해. 부모님이 공부를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니 공부를 잘 못하는 건 오로지 내 잘못이야'라고 본인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니 아동의 심리평가 결과에서 심한 불안이 드러나고 있는데 부모가 공부 강요를 하지 않는다고 보고할 때 이런 discrepancy를 위에서 말씀드린 틀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겉으로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아이가 공부 잘하기를 기대하는 표리부동한 부모인지 말이죠. 제 경험으로는 학력 수준(학벌)이 높을수록 이런 부모가 확률적으로 훨씬 더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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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자가 어떤 말을 하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도박 중독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고, 그만하라고 가족들이 말릴 때 귀담아 듣지 않은 것도 자신의 잘못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도박을 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테니 제발 도박만 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읍소합니다.
얼핏 보면 자신의 도박 문제를 인정하고 치유가 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가 갈등 하나 없이 변화 단계 중 준비 단계나 실행 단계에서 곧바로 출발하는 도박자는 매우 드물거든요.
오히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면 납작 엎드려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유형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자기 고백에는 잘못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상담자에게 의존하고 자신은 편하게 묻어가려고만 하죠. 의존 대상이 가족에서 상담자로 바뀐 것 뿐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도박자는 제 시간에 상담에 오고, 상담도 열심히 하지만 재발이 잦으며 재발을 하고 나서는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동시에 다시 열심히 노력할테니 도와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도박 문제에 대한 진지한 수용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도박 결과를 깊이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발이 반복되고 끝내는 지쳐버린 가족이 포기하는 걸로 상담이 끝나고 맙니다.
이런 도박자일수록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치유 초반부터 한계 설정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의사 결정부터 자신이 직접 내리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극도의 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담을 아무리 오래 해도 치유의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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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YES24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2007)'의 저자인 웨인 다이어가 25년 전에 쓴 베스트셀러(전세계적으로 1,500만 권이나 팔렸답니다)입니다.
이 책도 한글 제목 때문에 호오가 극명하게 갈릴 것 같습니다. 이기주의자와 개인주의자는 많이 다른데도 사람들이 오해를 할테니까요. 사실 이 책은 이기주의자가 아닌 개인주의자에 대한 걸 다루는 책인데 제목만 보면 선입견을 갖기 쉽거든요. 실제로 온라인 서평을 보면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과연 그런지 목차만 살펴볼까요?
제1장. 내 인생은 내가 지휘한다.제2장. 먼저 자신을 사랑한다.제3장.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제4장.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를 뗀다.제5장. 자책도 걱정도 없다.제6장. 미지의 세계를 즐긴다.제7장. 의무에 끌려다니지 않는다.제8장. 정의의 덫을 피한다.제9장. 결코 뒤로 미루지 않는다.제10장.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제11장. 화에 휩쓸리지 않는다.제12장. 행복한 이기주의자
어떠신가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든 착취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이기주의자에 대한 내용이 있어 보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10장을 보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죠.
이 책은 이기주의자로 살라고 충동질하는 책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가장 싫어하는 '희생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고, 찾은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저는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2007)'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최근에야 만났지만 이 책의 내용에 100% 동의합니다. 저는 평소에도 제가 아주 행복하다고 느끼는데(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내용에 반감이 드는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군'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으니까요. 제가 이 책의 내용대로 살아서 행복한 건 아니지만 행복한 상태에서 보니 온통 맞는 말 뿐이더군요.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몇 권 추천드렸습니다만 이 책은 그야말로 '행복하게 살기 종결자'입니다. 다른 사람 눈치(배려가 아닙니다)보고 싶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 한 권 정도는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월덴지기가 강력 추천하는 행복 지침서입니다.
닫기
*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너무도 짧은 것이 분명한데 적어도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똑똑함의 참된 척도는 하루하루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제대로 즐겁게 사느냐다.* 사랑이란 '좋아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선택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건 안들건 허용할 줄 아는 능력과 의지'다. * 행복하다는 것은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일들을 놓고 한탄하지 않는 것이다. * 자녀에게 인정은 언제든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마땅한 행동을 한 보상으로 주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떻다' 꼬리표들은 모두 다음의 네 가지 노이로제적인 말을 사용한 결과다. "그게 바로 나야", "난 항상 그래왔어", "어쩔 수 없어", "난 원래 그래". 모두 성장과 변화를 방해하며 삶을 색다르고 재미있게, 그리고 현재의 순간순간을 한껏 충실하게 살 수 없도록 가로막는 말이다. * 당신이 '나는 어떻다' 꼬리표를 불러내면서 과거에 매달린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회피'라는 한 마디로 깔끔하게 요약할 수 있다. * 일생을 통해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자책감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섣부른 걱정이 바로 그것이다.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실패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는 단지 특정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됐어야 했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방식으로 행해져야 할 일 따위는 없다고 믿는다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 '의무를 끌어안고 사는 경향'을 심리학자 Albert Ellis는 머스터베이션(musterbation)이라 지칭했다.
* 사실 미룬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않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게 아니라 그냥 하지 않는 것이다.
* 부모가 자녀를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 부모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부모라는 사실이다. 이는 자녀들에게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도록, 그리고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골방만 차지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 어머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대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다.
덧. 살짝 아쉬운 것은 행복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한 실천 지침들이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 아니라는 점인데 이건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자신만의 실천 지침으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목적지에 도달해 놓고 보면 옳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가는 길은 모호한 것과 같지요.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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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가 아닌 일반 상담센터나 대학교의 학생생활상담소 같은 곳에서 상담을 받는 내담자 중에는 인생이 즐겁지 않고 뭐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으며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내가 못난 사람 같아서 대인 관계에 주눅이 들고 사회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는 호소를 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낮은 자존감 문제는 어찌보면 현대인의 감기(우울증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문제이고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 중 어렸을 때부터 칭찬에 인색하고 처벌 위주의 훈육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부모에게 양육된데다 운이 없게도 머리도 그리 좋지 않아서 공부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담이나 심리치료 과정에서 작은 성공 경험을 하도록 manage하기도 합니다.
저도 상담을 하면서 혹은 상담 supervision을 하면서 상담 과정에서 작은 성공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조언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공 경험이 부족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 도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자존감이 낮아지는 이유는 나 아닌 다른 사람(부모, 교사, 손윗사람 등)의 인정과 수용에 목을 매기 때문이거든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내집단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의 틀을 깨지 않는 이상 성공 경험을 아무리 쌓아나간다고 해도 그 노력의 끝은 더 높아진 타인의 기대에 의해 가로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성공 경험 자체가 아예 없는 내담자의 경우에는 성공의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일시적으로 도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타인의 기준과 평가에 맞춰 살아가야한다는 인식의 틀을 부수고 내담자가 자신만의 수용과 인정 기준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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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6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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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님의 블로그 walden3에서 자존감을 높이는 근본적인 방법이라는 글을읽고나도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미르님은 상담할 때 내담자가 잘 하고 있는 것을 칭찬..
예전에
'도박 중독자는 칭찬에 목마르다'라는 글에서 도박 중독자가 얼마나 가족들의 칭찬을 갈구하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도박을 하지 않고 참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힘든 일인데 도박자는 가족의 인정과 용서를 받기 위해 집안 일을 돕거나 대소사에 신경을 쓰는 등의 갖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심하게도 그런 도박자의 행동에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도박자가 도박을 그만두고 참는 것이라든가, 집안일을 돕는 것 등의 행동이 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고 어찌보면 당연하기 때문에 도박자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생각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박에 빠지기 이전에는 가족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도박자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가족을 아끼고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면 눈에 띄지 않을리가 없지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가족들은 무심하고 칭찬에 인색합니다. 왜 일까요?
그건
가족들도 칭찬을 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도박자가 교만해져서 변화하려는 긍정적인 노력을 멈추거나 만에 하나 다시 도박에 손을 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강한 두려움이 아직도 마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글에서 저는 도박 중독자의 긍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라도 칭찬을 해 주라고 가족분들께 주문했지만 이번에는 도박자들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그러한 두려움에서 가족들이 벗어나 마음껏 칭찬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참고 오히려 한 번 더 노력하라고요.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한번 제대로 바뀌기만 하면 그 변화는 터진 둑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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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저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항상 전전긍긍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칭찬에 목말라하고, 누군가 나를 비판하거나 흉을 보면 그게 신경쓰여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안간힘을 썼더랬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즐거울리가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눈치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흠결에 별로 관심이 없고 제가 그렇게 고민했던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는 식후 가십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요.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저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누가 누구와 사귀든 말든, 누가 얼굴이 어떻게 생기든, 누가 능력이 있든 없든, 성격이 더럽든 말든 그건 그냥 잠시 스쳐지나갈 뿐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안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이후 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특히 뒤에서 궁싯거리는 소리에는 일체 신경쓰지 않습니다. 어차피 질투심에 찌든 찌질이거나 대놓고 이야기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일테니까요. 저를 아끼고 제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제 얼굴을 보고 직접 조언을 할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말들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더군요.
그래서 마음이 저를 이끄는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옳은 판단이 저를 이끌거라고 믿으면서요. 그리고 아직까지는 별 문제 없이 제가 원하는 삶을 나름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만약 잘못된 길을 걷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는 제가 믿는 신이 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최소한 저를 아끼는 사람들이 제게 옳은 feedback을 할거라 생각합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 인생은 저의 것이고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니까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신경 쓸 여력이 제겐 없습니다.
그래서 제 앞에서 당당히 이야기하는 말이 아니라면 누가 뭐라든 전혀 상관 없습니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민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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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다툼의 이유는 (거의) 대부분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벼운 차량 접촉 사고가 났을 때 상대방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상소리가 오가는 이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과실 비율을 따져서 자신의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건방지게 끼어든 침입자에게 한방 먹여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픈 심리가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교통 신호 위반이니, 정지선 준수니 하는 말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나이가 얼마냐는 둥, 말하는 싸가지가 없다는 둥 인신공격적인 언사가 난무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나오는 상대방에게 합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봤자 쇠 귀에 경 읽기 꼴이 됩니다. 이 때에는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추어 적절한 반응을 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나 도의적인 책임이 약간 있는 일을 꼬투리 잡아 상대방이 화를 낸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니 내 책임은 별로 없다고 하면 상대방이 알았다고 수긍할까요? 전혀 아니죠.
일단 상대방의 비난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인정이나 납득이 아니라 수용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하는 말이 맞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얼핏 보면 불합리한 책임 전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수용하는 것은 상대방의 상한 감정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이 수용하면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건 엄청난 죄책감을 유발하니까요.
이런 수용은 나 스스로 떳떳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외부 평가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대신 절대로 상대방을 무마하기 위해 겉으로만 수용하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만 납니다. 상대방에 대한 측은지심을 유지해야만 진정한 수용이 가능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지금까지 상대방이 나에게 하고 있던 공격이 전적으로 감정적인거라면 그리 신통한 답이 나오지 않을겁니다. 이미 확실한 공감을 받았으니까요.
만약 아주 구체적인 답이 나온다면 이해 득실을 따지려는 생각도 상당히 섞여 있는 겁니다.
상대방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정도만 답하면 됩니다.
나중에 어떤 해결 방법을 제시하든 상대방은 최소한 무리한 감정적 대응을 자제할 겁니다.
감정적인 갈등이 없으면 적어도 합리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는 기본 바탕은 마련된 겁니다.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화해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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