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이성, 여성은 감성의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남자는 입장과 처지를 이해받는 게 중요하고, 여자는 마음을 알아주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생각이든, 마음이든 간에 어쨌거나 나를 알아주는 것,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원하죠.
이걸 상담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인 공감에 포함된 중요한 내용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공감이란 게 정작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현장에서 일하는 상담자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병상련도 아니고 단순한 측은지심도 아니면서 동정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죠.
사설이 길었는데 오늘은 상담 현장에서 사용하는 공감 말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공감(위에서 이야기 한 나를 알아주는 것과 유사한 의미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모든 대인 관계에서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 나를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부부 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쌍방 관계에서는 더더욱 중요하죠.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가사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당연히 남편은 그게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면서 위로하려고 애를 쓰죠. 하지만 아내는 당신은 머리로만 이해를 하지 내 감정을 마음으로 아는 것 같지 않다면서 쏘아 붙입니다.
위의 예에서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고통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할 뿐,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불평하지만 제가 볼 때 이 문제의 핵심은 이해냐 감정이냐가 아닙니다.
아내가 자신의 고통과 힘겨움을 남편이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남편의 이해가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공감은 행동을 기반으로 작동하거든요.
말로는 혼자서 살림하고 애보느라 얼마나 힘드냐며 위로하지만 정작 퇴근하면 나 몰라라 자신만 씻고, 밥 먹고, TV 보고, 일찍 자고, 새벽에 아이가 울어도 모른 척하고, 주말에는 일 핑계를 대면서 휴일 근무를 나가거나 라인 관리를 해야 한다며 골프나 등산을 가면서도 정작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가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겁니다.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고 선을 그었지만 상담에서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면 알게 모르게 자연스레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내담자의 고통에 공감이 되면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게 되고 공명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내담자가 고통을 이겨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탐색하게 됩니다.
'네가 왜 힘든 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고통의 원인으로는 A와 B, 그리고 C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B인 것 같고 나머지 두 개의 이유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으니 환경 개선을 통해 이들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고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온전히 직관할 수 있도록 자동적 사고를 교정할 필요가 있겠다'
이처럼 머리에 기반한 상담자의 문제 이해는 공감에 이르는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공감을 한다면 말이 아닌 행동을 하게 되고 행동을 하다 보면 더 깊은 공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진정한 공감을 하고 싶으면 먼저 행동이라도 하세요. 하루라도 혼자서 아이를 돌보면서 모든 집안 일을 해 보면 아내의 고통이 어떤 수준인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이후에 공감을 더 깊게 하게 만드는 다른 바람직한 행동으로 이어질 지, 공감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회피 행동으로 이어질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행동을 해야 공감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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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이 책은 2010년 11월에 열린 '아름다운 재단' 10주년 기념 컨퍼런스의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11명의 각계 각층 인사가 나와 '나눔'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풀어놓은 이야기를 묶었습니다.
모든 참여 인사 뿐 아니라 이 책의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들까지 모두 재능 기부하였고 이 책의 인세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 재단의 '나눔 사업'에 쓰입니다.
1부에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했던 나눔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주제로 이선재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협력사업본부장'과 김진혁 'EBS 지식채널 e PD', 홍기빈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선대인 '선대인경제전략연구소 소장'이 각각 서로 다른 분야에서 나눔을 바라보는 시각을 소개합니다.
2부에서는 '미래의 나눔에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심샛별 'Big Issue Korea', 송인창 '해피 브릿지', 도법 스님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 뿐 아니라 '게스츠하우스 빈집'의 구성원들이 실제 나눔의 현장에서 경험한 내용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거리들을 펼쳐 놓습니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나눔에 대한 자유로운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해 네티즌들이 올린 답을 엮은 현문현답이 '아직 못 다한 나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나눔을 고민하고 계신 분이 읽어도 좋지만 이미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분들도 한번쯤 읽어보시면 좋은 책입니다.
기부에 대한 깊이 있는 책으로는 예전에 소개한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The Life You Can Save, 2009)'를 강력 추천드리지만 책은 나눔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을 다양한 시각으로 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닫기 * 선의가 선행을 낳지 않는다. * 우리가 기부나 자선 행위를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그분들을 대상화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해야 되는 대상으로 전략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포괄적인 정보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기부에 중요하다* 나누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 '동정'은 '나의 불안과 공포가 타인의 고통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것'이고 반면에 '측은지심'은 '내 안의 사랑과 연민이 타인의 고통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것'* 나눔은 세상을, 그 어느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품위 있고, 멋있고, 우아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적게 가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니게 하는 것이 빈집이다. * 우리가 많이 내세우는 구호는 사람이든 조직이든 사회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의 반영이다. 대개 조직에서 내세우는 급훈이나 사훈을 보면 그 조직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담겨있다. * 미래의 모금 운동에 있어서 키워드는 세 가지. 소셜(social), 펀(fun), 모바일(mobile)이다. * 등산을 할 때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지, 정상에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목적에 있는 게 아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지요. 따라서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참 불행한 거거든요.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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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스피어를 돌아다니다 보면 기부를 하는 사람은 정작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부 문화가 자리잡은 미국의 실상을 예로 들지요.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는 유럽의 경우에는 기부 문화가 없다고 하면서요.
그런 단선적인 분석을 주장의 근거로 내놓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것이 짧은 관계로 굳이 반박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그냥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기부를 하는 사람 중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 중에서 기부를 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저는 단연코 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 행동의 심적 기반이 다르면서도 어느 한 쪽을 포괄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측은지심'이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생명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고 그 고통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이죠. 하지만 기부를 하게 되면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님을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궁극적인 해결 방안을 고민하게 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나 하나의 행동이 밀알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소명의식이죠.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측은지심과 달리 사명감은 자칫하면 자만심이나 특권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만이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은 기부를 하는 사람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게 됩니다. 기부하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을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행동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앞서 던졌던 물음으로 돌아가보죠.
기부를 하는 사람 중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 중에서 기부를 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어느 쪽이 더 많은가와 상관 없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바꿀 사람은 전자의 유형일까요? 아니면 후자의 유형일까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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